명시감상 (38) - 하얀 밤 하얀 밤 김여정 망초꽃이 메밀꽃처럼 하얗게 강변 둔치를 뒤덮고 있는 하얀 밤에는 달빛이 모래알처럼 하얗다. 아니 쌀처럼 하얗다. 하얀 밤 망초꽃밭에서 곤히 잠든 하얀 나비 한 마리 하얀 메밀꽃밭의 추억을 꿈꾸는지 알 듯 모를 듯 고이 접은 나래가 조용히 떨리고 있다. 나도 감전된 듯 하얀 찔레.. 명시감상 2007.09.08
명시감상 (37) - 슬픈 식욕 슬픈 식욕 서안나 그녀는 조선족이라고 한다 얼굴만 보아서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말 한 마디로 출신성분이 정확히 간파되고 만다 전국을 떠다니며 산다고 한다 잔뿌리 같은 열 손가락으로 허공이라도 움켜쥐고 싶다는 그녀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아도 아랫배가 왜 부풀어오르는지 지퍼가 벌어질 때.. 명시감상 2007.09.02
나를 울린 시 (36) - 혼자서 붐비다 혼자서 붐비다 정진규 꽃으로 있을 때까지는 그래도 한시절 지낼만 했는데 나의 여름은 언제나 불행하였다 가을까지 가는 동안 그동안이 늘 숨이 찼다 나의 들숨과 날숨은 언제나 고갯턱에 머물렀다 혼자서는 안돼, 안돼 타일렀으나 비워둔 틈 하나 없었다 혼자서 붐볐다 단물이 고일 틈이 없었다 풋.. 명시감상 2007.08.26
나를 울린 시 (35) - 누군지 모를 너를 위하여 누군지 모를 너를 위하여 최승자 내가 깊이 깊이 잠들었을 때, 나의 문을 가만히 두드려 주렴. 내가 꿈속에서 돌아누울 때, 내 가슴을 말없이 쓰다듬어 주렴. 그리고서 발가락부터 하나씩 나의 잠든 세포들을 깨워 주렴. 그러면 나 일어나 네게 가르쳐 줄게. 어째서 사교의 절차에선 허무의 냄새가 나는.. 명시감상 2007.08.21
나를 울린 시 (34) - 애가 애가 이창대 그대 떠난 마음의 빈 자리 아플지라도 숨막히는 이별은 말하지 않으리. 여기로 불어오는 바람 서러웁고 저기서 울리는 종소리 외로와도 가만히 견디며 들으리라 커다란 즐거움은 아픔 뒤에 오는 것. 흐르는 강가에 가슴은 설레어도 말하지 않으리라 이별의 뜻을. 그대 떠난 마음의 빈 자.. 명시감상 2007.08.18
나를 울린 시 (33) - 떠도는 자의 노래 떠도는 자의 노래 신경림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명시감상 2007.08.14
나를 울린 시 (32) - 비가 오면 비가 오면 이상희 비가 오면 온몸을 흔드는 나무가 있고 아, 아, 소리치는 나무가 있고 이파리마다 빗방울을 퉁기는 나무가 있고 다른 나무가 퉁긴 빗방울에 비로소 젖는 나무가 있고 비가 오면 매처럼 맞는 나무가 있고 죄를 씻는 나무가 있고 그저 우산으로 가리고 마는 사람이 있고 자연은 인간 삶.. 명시감상 2007.08.11
나를 울린 시 (31) - 성 담론 시편 - 거시기 & 머시기 6 성 담론 시편 -거시기 & 머시기 6 윤금초 물에 빠진 건 건져줘도 계집에 빠진 것 못 건진다? 봄 한철 이슥하도록 늦바람 감투거리에 줄초상 맞은 산벚꽃 눈발 뿌리네, 눈물 뿌리네. 지구상의 자연계를 이루는 생명체는 대다수가 암수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교접에 의해 그 種종을 이어간다. 말하자면 암.. 명시감상 2007.08.08
나를 울린 시 (30) - 낮달 낮달 이영식 거울 속보다 고요한 날 양지바른 블록 담 아래 노인들이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빈 부대자루처럼 접힌 몸 번갈아 의자에 부렸다 세우며 명함판 사진을 찍습니다 햇발 참말 좋아 잎새들 초록초록 혀를 내미는데 이승의 끝자리, 마지막 그 밤을 지킬 모습이라니! 얼굴은 오래된 놋쇠 빛이 되.. 명시감상 2007.08.06
나를 울린 시 (29) - 상쾌해진 뒤에 길을 떠나라 상쾌해진 뒤에 길을 떠나라 고진하 그대가 불행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대의 삶이 타인에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할 때 아직 길을 떠나지 말라. 그대의 존재가 이루지 못한 욕망의 진흙탕일 때, 불면으로 잠 못 이루는 그대의 밤이 사랑의 그믐일 때 아직 길을 떠나지 말라. 쓰디쓴 기억에서 .. 명시감상 2007.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