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29) - 상쾌해진 뒤에 길을 떠나라

펜보이 2007. 8. 4. 00:16
 

  상쾌해진 뒤에 길을 떠나라


  진하


  그대가 불행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대의 삶이

  타인에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할 때

  아직 길을 떠나지 말라.


  그대의 존재가

  이루지 못한 욕망의 진흙탕일 때,

  불면으로 잠 못 이루는

  그대의 밤이 사랑의 그믐일 때

  아직 길을 떠나지 말라.


  쓰디쓴 기억에서 벗어나

  까닭 없는 기쁨이 속에서 샘솟을 때,

  불평과 원망이 마른풀처럼 잠들었을 때,

  신발끈을 매고

  길 떠날 준비를 하라.


  생(生)에 대한 온갖 바람이 바람인 듯 사라지고

  욕망을 여읜

  순결한 사랑이

  아침 노을처럼 곱게 피어오를 때,


  단 한 벌의 신발과 지팡이만 지니고도

  새처럼 몸이 가벼울 때,

  맑은 하늘이 내리시는

  상쾌한 기운이 그대의 온몸을 감쌀 때


  그대의 길을 떠나라.


  누군가는 이승의 삶이란 고해의 바다와 같다고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설령 저승에서 아름다운 세상이 기다린다고 한들 이승보다야 나을 리 있겠느냐고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고난과 곤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이에게는 현재의 삶이 지옥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어려운 가운데서도 조그만 일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이에게는 현재의 삶 그 자체가 아름다움의 바다일 수 있으리라. 그렇다. 인간의 삶이란 그 주체로서의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천양지차를 보인다. 인간은 저마다 독자적인 성정이 있고 또한 자기에게 맞는 일이 있다. 이는 타고난 재능 또는 노력에 따른 결과일터인데, 이를 인정하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가 보는 세상은 전혀 다르다. 따라서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설령 현재의 삶이 이상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는 힘든 현재의 삶이 자신의 부실함 때문이 아니라, 세상과 남의 탓으로 돌리려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자기자신과 관련된 세상의 일이 어디 잘못된 원인 없이 나쁜 결과만 있으랴. 세상이치란 빤해서 반드시 뿌린 만큼 거둔다고 한다. 만일 현재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면 현실과 동떨어진 너무 큰 이상 때문이거나 노력부족일 가능성이 높다. 나에게 주어진 일체의 현실적인 상황은 다름 아닌 내가 만들어낸 것이다. 이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비로소 삶에 대한 진정한 가치,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럼으로써 앞으로 전개될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이와 두께를 만들어갈 수 있다.

  ‘그대가 불행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을 때/그대의 삶이/타인에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할 때/아직 길을 떠나지 말라’

  고진하의 “상쾌해진 뒤에 길을 떠나라”는 잠언처럼 시작된다. 하기야 시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꿈과 사랑과 아름다움만을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비탄과 비애 고통을 들려주는 시도 적지 않다. 그리고 고진하 시인처럼 삶에 대한 교훈적인 경구를 건네는 시도 적지 않다. 이 시는 사뭇 교훈적이면서도 그 이면에서는 해탈한 자의 맑은 심신처럼 곱디고운 서정적인 이미지가 펼쳐진다.

  여기에서 말하는 ‘길을 떠난다’는 제재는 상징성이 짙다. 길이란 어딘가를 향하는 공간적인 장소이자 행위를 일으키는 시간적인 과정을 시사한다. 따라서 길은 공간적이면서도 시간적인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서 말하는 어딘가는 공간적인 목적지임과 동시에 이상적인 목적이 된다. 그 목적지가 어디이며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거기에 도달하고 성취하려면 ‘불행의 기억’에서 벗어나거나 ‘타인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거두어들이라고 말한다. 그렇지 못하면 아예 ‘길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런 상태로 길을 떠난다고 한들 어찌 목적지에 이를 수 있으며,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대의 존재가/이루지 못한 욕망의 진흙탕일 때,/불면으로 잠 못 이루는/그대의 밤이 사랑의 그믐일 때/아직 길을 떠나지 말라.’

  또한 욕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거나 사랑의 아픔으로 잠 못 이루는 일이 있어도 길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 혼란스러운 모습은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을 기대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그 첫발을 떼어놓는 것을 뜻한다. 미지의 또는 새로운 세계로 가는데 ‘이루지 못한 욕망’ 및 저물어 가는 사랑의 미련은 거추장스러운 짐이 될 따름이다. 새로운 길을 떠나는 데는 이전과는 다른 홀가분한 몸과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쓰디쓴 기억에서 벗어나/까닭 없는 기쁨이 속에서 샘솟을 때,/불평과 원망이 마른풀처럼 잠들었을 때,/신발끈을 매고/ 길 떠날 준비를 하라.’

  모든 고통의 기억에서 벗어나 속으로부터 기쁨이 차 오르게 되었다면 비로소 길 떠날 채비를 하라고 한다. 또한 불평이나 원망이 생명을 다한 마른풀처럼 사그라들었다면 이제는 길을 떠날 준비를 해도 좋다는 것이다.

  새로운 일이나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데 과거의 그림자를 가지고 가서는 안될 일이다. 만일 굳이 길을 떠나야 할 처지라면 적어도 과거의 아픔 따위는 흔적 없이 말끔히 지워야만 한다. 이러한 태도는 상대를 위한 배려 때문만이 아니다. 어쩌면 일체의 마음의 짐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홀가분해질 수 있는 길이겠기에 말이다.

  ‘생에 대한 온갖 바람이 바람인 듯 사라지고/욕망을 여읜/순결한 사랑이/아침노을처럼 곱게 피어오를 때,’

  불행의 기억과, 타인에 대한 불평 및 원망과, 사랑의 미련과, 일체의 욕망을 거둠으로써 마침내 고뇌의 바다에 불어대던 바람이 잦아들게 된다. 그리함으로써 마치 새싹이 돋아나듯 새롭고도 순결한 사랑 또한 상큼한 아침노을처럼 곱게 피어오르게 된다.

  ‘단 한 벌의 신발과 지팡이만 지니고도/새처럼 몸이 가벼울 때,/맑은 하늘이 내리시는/상쾌한 기운이 그대의 온몸을 감쌀 때’ ‘그대의 길을 떠나라’

  마지막 연에서 우리는 길을 떠난다는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길을 떠난다’는 일은 곧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이 잠시 멈칫거리게 되는 것이다. ‘단 한 벌의 지팡이’와 ‘새처럼 몸이 가벼운’이라는 표현에서 문득 이승을 하직할 때의 담담한 이미지가 겹쳐지는 까닭이다. 현실적인 온갖 욕망의 그늘에서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음은 이 세상에 더 이상 미련을 둘 수 없는 상황에서나 가능하겠기에 말이다. 그 상황은 이승을 하직하는 자의 모습이다.

  이 세상에 왔다가 어떠한 모습으로 어떻게 살았던 간에 적어도 저승으로 가는 길만큼은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요구인지 모른다. 저승이야말로 이승과는 또 다른 세상이겠기에 말이다. 이와 같은 요구는 현실적인 삶에서도 다르지 않다. 이러한 의미와 연결시키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시는 묵직하고도 의미심장한 내용과는 달리 시각적인 경쾌함을 느끼게 한다. 생에 대한 엄숙성보다는 일체의 현실적인 짐을 벗어  던진 자의 그 구름처럼 가벼운 발걸음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