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30) - 낮달

펜보이 2007. 8. 6. 11:15
  

  낮달


  이영식


  거울 속보다 고요한 날

  양지바른 블록 담 아래

  노인들이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빈 부대자루처럼 접힌 몸

  번갈아 의자에 부렸다 세우며

  명함판 사진을 찍습니다


  햇발 참말 좋아

  잎새들 초록초록 혀를 내미는데

  이승의 끝자리, 마지막

  그 밤을 지킬 모습이라니!

  얼굴은 오래된 놋쇠 빛이 되고

  끊었던 담배에 손이 자꾸 가는데

  주름 활짝 펴 웃으라는

  빵모자 사진사의 주문에

  덩굴장미만 벙긋벙긋 피어나는

  날도 억수 좋은 날


  영정(影幀)처럼 떠 있는 돛배 하나

  늙은 복사나무 가지에 걸립니다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가지고 와서 주어진 수명을 완전히 소진한다고 해도 100년을 넘기기가 쉽지 않다. 100년은 무병장수해야 채울 수 있는 시간이다. 대개는 길어야 70-80년 남짓에 그친다. 이는 거역할 수 없는 일이다. 눈부신 의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주어지는 수명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늙는다는 사실도 받아들이지 못할뿐더러 죽는다는 사실은 더욱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예외적인 존재는 없다. 이 세상에 오는 모습은 누구나 같다. 그러나 가는 모습은 저마다 다르다. 가야 할 길을 알고 때가 되면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 인간다운 모습이다. 이 세상에 올 때처럼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놓아버린 채 홀가분하게 이 세상을 떠나는 모습은 아름답다. 몸도 잠시 빌려쓴 것일 뿐, 본시 내 것이 아니었다는 자각이야말로 세상과 결별하는 걸음을 가볍게 만드는 요인이다.

  어쩌면 아름답게 떠나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한지 모른다.

  이영식 시인의 “낮달”은 이 세상과의 이별연습을 하는 노인들의 모습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아름답게 보이지만 왠지 바람 든 무처럼 힘없는 모습이 쓸쓸하기만 하다. 적당히 감상적이게 만드는 것이다. 햇빛에 바랜 낮달의 그 무기력한 모습이 황혼을 눈앞에 둔 노인들의 모습에 겹쳐지면서 쓸쓸한 풍경을 지어내는 까닭이다. 그 목적지가 어디든지 누구에게나 떠난다는 일은 공연히 허전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다. 존재의 부재는 공허함을 남겨놓게 마련이다.

  ‘거울 속보다 고요한 날/양지바른 블록 담 아래/노인들이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저 있을 법한 일상적인 정경이다. 바람도 없이 햇살이 따사로운 날 블록 담 아래서 사진을 찍고 있는 노인들의 모습은 새삼스럽지 않다.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 그저 그런 풍경이기 때문이다.

  ‘빈 부대자루처럼 접힌 몸/번갈아 의자에 부렸다 세우며/명함판 사진을 찍습니다’

  여기에 이르면 별안간 일상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빈 부대자루처럼 접힌 몸’이라는 구절도 그렇거니와 ‘번갈아 의자에 부렸다 세우며’라는 대목에서는 예사로운 감정을 훌쩍 뛰어넘고 만다.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빈 부대자루의 그 허망한 무력감에 비유되는 노인의 모습을 통해 허무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허무가 절망적인 상황으로 전이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희극적인 쪽에 가깝다. 그 ‘빈 부대자루’가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모양은 희극적이다. 의자에 앉는 모습이 너무도 힘이 없어 등에 지고 있던 물건을 떨구듯이 ‘부리는’ 모양으로 비치는 것이다. 그러면서 명함판 사진을 찍고 있으니, 애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괜한 웃음을 흘리게 된다. 그 상황이 정말 재미있어서 나오는 웃음이 아님은 말할 나위도 없다.

  사진을 찍는 일은 대체로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하는 일이다. 언젠가는 아름다운 젊은 시절의 모습을 잃게 마련이니, 그 아름다움을 정지된 화상으로나마 붙잡아 놓았다가 훗날 내게도 아름다운 날이 있었노라고 추억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노인들이 사진을 찍는 목적은 다른 데 있다. 미구에 올 이 세상과의 이별을 위한 준비로 사진을 찍는 것이다.

  ‘햇발 참말 좋아/잎새들 초록초록 혀를 내미는데/이승의 끝자리, 마지막/그 밤을 지킬 모습이라니!’

  그렇다. 어느 때 별안간 닥칠지도 모를 죽음을 대비해 저물어 가는 황혼의 모습을 남기고자 사진을 찍는 셈이다. 거기에 흥이 있을 리 없다. 이미 젊음은 꽃처럼 지고, 주름만이 남겨진 모습이기에 그저 의무처럼 여기고 있을 따름이다. 그 옆에서 철없는 몸짓으로 조롱하듯 ‘초록초록 혀를 내미는’ 잎새들에 비하면 얼마나 남루한가. 더구나 ‘이승의 끝자리’ 즉 주검을 대신하는 모습으로 쓰일 사진을 찍는 일이야말로 기막힌 웃음거리가 아닌가. 그런 준비를 위해 사진을 찍는 노인들의 모습에는 허전한 긴 해 그림자가 깃들일 따름이다.

  ‘얼굴은 오래된 놋쇠 빛이 되고/끊었던 담배에 손이 자꾸 가는데/주름 활짝 펴 웃으라는/빵모자 사진사의 주문에/덩굴장미만 벙긋벙긋 피어나는/날도 억수 좋은 날’

  이미 색깔을 잃고 ‘놋쇠 빛’으로 변한 얼굴로 ‘끊었던 담배에 손이 자꾸 가는’것은 그 상황이 도무지 어색하기만 해서이다. 하나도 즐겁지 않은데도 ‘주름 활짝 펴 웃으라는’ ‘빵모자 사진사의 주문’이 마음이 편치 않아서이다. 그래도 남겨야 될 사진이기에 ‘사진사의 주문’에 따라야만 하는 심사가 애처롭기만 하다. 이런 노인들의 심중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그저 ‘벙긋벙긋 피어나는’ 덩굴장미의 심보가 밉지 않은 것은 또 왜인가. 노인들의 희극적인 모습을 지켜보면서 제 자랑하듯이 활짝활짝 피어나는 덩굴장미의 그 철없음을 누가 탓할 것인가. 존재가치가 다하면 차지했던 자리를 물려주고, 그 자리를 새로운 존재가 차지하는 것은 생명의 순환이라는 자연의 준엄한 법칙이다. 그 법칙을 누가 거부할 것인가.

  ‘영정(影幀)처럼 떠 있는 돛배 하나/늙은 복사나무 가지에 걸립니다’

  이를 힘없이 내려다보던 낮달이 영정처럼 보이다가, 마침내는 늙은 복사나무 가지에 걸리는 돛배의 이미지로 변환하는 이 시는 젊음과 늙음을 교차시키면서 인생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움트는 나뭇잎들의 힘찬 생명의 기상과 거기에 대비되는, 죽음을 앞둔 노인들의 이승과의 작별을 준비하는 사진찍기는 희극적이면서도 어느 순간 엄숙한 분위기로 몰아가다. 영정을 위한 사진찍기는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킬 따름이다. 노인들은 거기에 동조하면서도 도대체 즐거울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죽음을 준비하는 일에 그처럼 순연히 복종하는 노인들의 모습은 장엄해야 하건만 이미 그런 정서를 이끌만한 힘조차 없다.

  이는 이미 희극이 아니라 비극이다. 겉으로는 사진사의 주문에 따르면서도 이 세상과 헤어질 일을 생각하면 얼마나 비장할 것인가. 그럼에도 이 시는 그런 비장함을 숨긴 채 아주 경쾌한 시선으로 노인들을 바라본다. 아니, 아주 서정적인 이미지로 물들이고 있다. ‘복사나무 가지에 걸리는 돛배’는 차라리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시인에게는 이런 능청스러움이 있다. 이 또한 시가 주는 묘미가 아니랴.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