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울린 시 (48) - 비가 悲歌 유석우 어둔 새벽에만 눈 부비며 찾았던 내 사랑, 서편 하늘 멀리 사위어 초승달로 떠 있다. 어쩌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에 눈뜨는 시기야말로 한 생명체로서의 자기존재에 대해 진정한 기쁨을 맛보는 시간이리리라. 다시 말해 사랑의 설렘을 느낄 수 있는 생명체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 명시감상 2008.01.02
나를 울린 시 (47) - 우울한 축배 우울한 축배 신현림 나를 중심으로 도는 지구는 왜 이렇게 빨리 돌지 우리가 세상에 존재했었나 손닿지 않는 꽃처럼 매개 없는 듯 살다 가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어디에도 없는 사람들 같지 생애는 상실의 필름 한 롤이었나 구불구불 뱀같이 지나가지 그 쓸쓸한 필름 한 롤 불빛 환해도 길을 잃기 일쑤.. 명시감상 2007.12.04
나를 울린 시 (46) - 풍경 풍경 김형영 한여름 숲이 흔들리나니 바람은 향기 묻혀 오고 가노라. 더위 취한 나무들 늘어져 골면 산새 들새 까불대며 자장노래 부르노라. 사는 일이 즐거운 건 이들뿐인가 나 그 곁에 누워 풍경이 되고지고. 현실적인 모든 일들을 잊은 채 홀연히 자연과 마주하고 보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 명시감상 2007.11.26
나를 울린 시 (45) - 다시, 학동 다시, 학동 정일근 이 바다에서 처음 시詩를 썼다, 푸른 스무 살 나는 조국祖國으로 가는 전사戰士가 되고 싶었지만 길은 끊어지고, 꺾어져 피 흘리는 상처를 감추며 세상의 끝을 찾아 숨어 들어간 학동 학동 바다는 사람 사는 마당이었다 부르지 않아도 먼저 달려와 안기던 바다 사람과 한 몸이 되어 .. 명시감상 2007.11.13
명시감상 (44) - 산수유꽃이 필 때마다 산수유꽃이 필 때마다 함동선 둥둥둥 둥둥둥 북소리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을 찾아 산수유꽃이 필 때마다 나비가 되었는데 그 사람 알던 이도 떠나고 또 떠나고 연초록 잎이 아가의 손처럼 커가는데 갸름한 얼굴 둥근 눈썹 아래로 뜬 눈 다문 입 깊이 파인 보조개가 낮게 드리운 구름 속에 나타났다가 .. 명시감상 2007.11.02
나를 울린 시 (43) - 살구나무꽃 그늘 아래에서 살구나무꽃 그늘 아래에서 송찬호 아아 그 꽃 그늘 아래서 그댈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다시 보세 다시 만나세 그땐 재 넘어 꽃가마 타고 오겠다더니 이게 웬일인가 늙은 나무 아래 구부리고 앉아 살구꽃등(燈) 몇 점 팔고 있으니 그 옛날 우린 꽃 꺾어 술잔 세어가며 놀았지 꽃이 질 땐 금개구리가 밤.. 명시감상 2007.10.22
나를 울린 시 (41) - 통도사 땡감 하나 통도사 땡감 하나 최영철 노스님 한 분 석가와 같은 날로 입적 잡아놓고 그날 아침저녁 공양 잘 하시고 절마당도 두어 번 말끔하게 쓸어놓으시고 서산 해 넘어가자 문턱 하나 넘어 이승에서 저승으로 자리를 옮기신다 고무줄 하나 당기고 있다가 탁 놓아버리듯 훌쩍 떨어져 내린 못난 땡감 하나 뭇 새.. 명시감상 2007.10.13
나를 울린 시 (41) - 배가 왔다 배가 왔다 전동균 비 그친 11월 저녁 살아 있는 것들의 뼈가 다 만져질 듯한 어스름 고요 속으로 배가 왔다 수많은 길들이 흩어져 사라지는 내 속의 빈 들판과 그 들판 끝에 홀로 서 있는 등 굽은 큰 나무와 낡은 신발을 끌며 떠오르는 별빛의 전언(傳言)을 싣고 배는, 이 세상에 처음 온 듯이 소리도 없.. 명시감상 2007.10.03
명시감상 (40) - 어느 밤의 누이 어느 밤의 누이 이수익 한 고단한 삶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혼곤하게 잠들어 있다. 밤 깊은 귀가길, 어둠 속에 전철은 흔들리고 건조한 머리칼 해쓱하게 야윈 얼굴이 어쩌면 중년의 내 누이만 같은데, 여인은 오늘 밤 우리의 동행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어깨 위로 슬픈 제 체중을 맡긴 채 넋을 잃.. 명시감상 2007.09.27
명시감상 (39) - 황학산 황학산黃鶴山 조정권 내 저 뻐꾸기 울음소리 산 채로 석빙고石氷庫 속에 가둬서 기르다가 백 년 후쯤 산문山門을 열어놓으리라 세상을 등지고 산에서 사는 선승들의 일상적인 삶은 무미건조하게 보인다. 하루 세끼 공양을 하고는 가부좌를 튼 채 그저 벽과 마주하고 선정에 드는 단조로운 구도의 연.. 명시감상 2007.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