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36) - 혼자서 붐비다

펜보이 2007. 8. 26. 12:28
 

 혼자서 붐비다


  정진규


  꽃으로 있을 때까지는

  그래도 한시절 지낼만 했는데

  나의 여름은 언제나 불행하였다

  가을까지 가는 동안 그동안이 늘 숨이 찼다

  나의 들숨과 날숨은

  언제나 고갯턱에 머물렀다

  혼자서는 안돼, 안돼 타일렀으나

  비워둔 틈 하나 없었다

  혼자서 붐볐다

  단물이 고일 틈이 없었다

  풋과일 풋열매로 언제나 거기서 끝이 났다

  나는 한 번도 제 맛을 내 본 적이 없었다

  맛이 덜 들었군,

  모두들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가을이 와도 나는 언제나 그 모양새였다

  시디시었다 떫기만 했다

  나는 한 번도 수확된 적이 없다

  어느 곳간 한 구석 채워 본 적이 없다

  나는 버려졌다

  아주 버려지고 나서야 나는

  평안해 질 수 있다는 걸

  눈발 속에서 차디찬 바람 속에서

  해마다 처음인 듯 깨우쳐 왔다

  늘 하얗게 혼자 남았다

  올해도 그때가 오자면 아직 멀었다

  숨이 차다 넘치는 바다가 목을 조른다

  봄이 오면 또 까맣게 잊고

  나는 슬픈 꽃 한 송이를 정수리에 매달 것이다


  인간의 몸을 받아 가지고 세상에 와서 가장 절망적일 때는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그렇다. 인간의 삶이란 일회적이어서 똑 같은 일을 결코 반복할 수 없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처음 느낌 그대로는 되새김할 수 없다. 슬픈 일이야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더라도, 기쁜 일이야 열 번 백 번인들 싫으랴만, 처음에 맛본 그 기쁨의 두께와 깊이는 딱 한 번뿐이다. 시간을 돌이킬 수 없다는 데 대해 절망감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삶이 실수와 미숙함의 연속이라는데 있다. 실수에 대해 반성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만일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한 번의 실수쯤은 거뜬히 만회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떤 형태의 실수라도 고쳐질 수는 없다. 이는 일회적인 생명체에 부여된 준엄한 법칙이다.

  이를 알면서도 어제와 같은 일을 하면서 오늘 다시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서 이미 불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망각의 기능을 지닌 탓이다. 망각은 인간의 삶의 태도를 항시 원점으로 되돌려 놓는다. 우리가 다른 동물과 다른 인간임을 자각하는 것도 어쩌면 망각을 인정하는데서 비롯되는지 모른다. 어제보다는 나은 오늘, 어제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내일을 다짐하건만 이를 고치기는 정말 힘들다. 모두가 망각 탓이다. 망각은 단순히 기억력만을 둔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정마저 무디게 만든다.

  정진규 시인의 “혼자서 붐비다”는 끝내 미완으로 끝나고 마는 인간 삶, 그 생애를 사계절에 비추어 보고 있다. 꽃이 피고 무성한 잎을 달고 열매를 맺으며 마침내 결실을 맺으면서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만드는 과일나무의 한해살이와 인간의 한해살이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과일나무는 해마다 어김없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새로운 씨앗을 만들어내는데 반해 인간은 그렇지 못해 탈이다.

  ‘꽃으로 있을 때까지는/그래도 한시절 지낼만 했는데/나의 여름은 언제나 불행하였다’

  꽃은 세상에 대한 환희의 메시지이다. 생명체로 태어난 사실을 세상에 알리면서 견실한 열매를 맺겠다는 가장 아름다운 선언인 것이다. 그처럼 아름다운 모습에 세상은 찬탄하고 박수를 보낸다. 그러기에 꽃으로서의 아름다움에 스스로 취하고 만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간은 잠깐이다. 칭송 받는 시간은 아주 짧다. 꽃을 거두고 나면 이제는 푸른 잎을 무성하게 키우고 열매를 알차게 익혀야 한다는 의무가 남겨진다. 그로부터 갑자기 분주해지면서 일꾼이 되어버린 듯한 자신을 불행하게 느끼게 된다.   

‘가을까지 가는 동안 그동안이 늘 숨이 찼다/나의 들숨과 날숨은/언제나 고갯턱에 머물렀다’

  열매를 알차게 익혀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가지에 살을 붙여 튼튼히 만들어야 한다. 그러자면 영양분을 힘차게 빨아올려 가지와 열매에 쉬지 않고 골고루 공급해야 하다. 그러다 보니 늘 숨가쁘기만 하다.

  ‘혼자서는 안돼, 안돼 타일렀으나/비워둔 틈 하나 없었다/혼자서 붐볐다’

  그저 바쁘다보니 주변을 돌아볼 겨를도 없다. 세상살이가 오직 자신만의 것인 양 언제나 빡빡한 일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일에 중독된 듯한 모습이다. 그러니 언제나 바쁠 수밖에 없다.

  ‘단물이 고일 틈이 없었다/풋과일 풋열매로 언제나 거기서 끝이 났다/나는 한 번도 제 맛을 내 본 적이 없다/맛이 덜 들었군,/모두들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단지 한 가지 일, 즉 열매와 가지에 영양을 실어 나르는 데만 몰두한 나머지 그늘에 잠긴 열매에게 햇살을 틔워주는 일도 몰랐다. 알찬 열매는 햇빛 영양소 산소 따위가 필요한데도 그저 열심히 영양소만 길어 올리면 되는 줄 알았다. 더불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는 해마다 같았다. 맛이 들 수 없었다. 그저 분주하기만 했지 익히는 방법을 모른 탓이다. 맛이 없는 열매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맛이 없으면 그 씨앗 또한 부실하기 마련이다.

  ‘모두들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가을이 와도 나는 언제나 그 모양새였다/시디시었다 떫기만 했다/ 나는 한번도 수확된 적이 없다/어느 곳간 한 구석 채워 본 적이 없다’

  그토록 열심히 한 여름을 보냈건만 가을이 돼도 수확되지 않는다. 시고 떫기만 해서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는 까닭이다. 세상은 그처럼 무심한 것이다. 세상은 오직 필요한 것만 원하기 마련이어서 아무리 노력한들 그만한 값어치를 생산해 내지 못하면 헛수고일 따름이다. 그러니 열매로서의 용도가 없다. 그러고 나서 또 깨닫는다. 헛농사를 지은 것이다. 스스로 필요치 않은 존재를 만든 것이다. 이러한 자각은 늘 자조로 남을 뿐이다.

  ‘나는 버려졌다/아주 버려지고 나서야 나는/평안해 질 수 있다는 걸/눈발 속에서 차디찬 바람 속에서/해마다 처음인 듯 깨우쳐 왔다’

  마침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려지고 말았다. 그토록 열심히 알찬 열매를 맺고자 혼자 부지런떨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출을 내지 못한 채 버려지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쓸모 없는 존재가 되고 나서 비로소 평안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와 같은 깨달음이 처음은 아니다. 해마다 반복되고 있다. 모든 기대를 버렸을 때, 그리고 마음속에 욕심을 담아두지 않음으로써 평안해짐을 느끼는 것이다.

  ‘늘 하얗게 혼자 남았다/올해도 그때가 오자면 아직 멀었다/숨이 차다 넘치는 바다가 목을 조른다’

  그렇다. 혼자서 열심히 일한 대가는 모두 하얗게 묻혀버린다. 형체가 간 곳 없이 지워진다. 하지만 혹독한 추위에 떨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는 다시 꽃 피는 봄에 대한 기대가 싹튼다.

  ‘봄이 오면 또 까맣게 잊고/나는 슬픈 꽃 한 송이를 정수리에 매달 것이다’

  망각이란 이런 것이다. 자신을 속이고, 스스로가 속으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 모양이다. 헛농사를 지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은 채 다시 새로운 열매를 맺기 위해 봄이 되면 분주히 꽃을 피우게 된다. 결과적으로 수확도 못할 열매를 키우는 데 또 열중하게 될 것이다. ‘슬픈 꽃 한 송이’는 이처럼 소출이 없는 상황을 전제로 하는 쓸쓸한 자각을 암시한다.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