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34) - 애가

펜보이 2007. 8. 18. 08:12
 

  애가


  이창대


  그대 떠난 마음의 빈 자리

  아플지라도

  숨막히는 이별은 말하지 않으리.

  여기로 불어오는 바람

  서러웁고

  저기서 울리는 종소리

  외로와도

  가만히 견디며 들으리라

  커다란 즐거움은 아픔 뒤에 오는 것.

  흐르는 강가에 가슴은 설레어도

  말하지 않으리라 이별의 뜻을.

  그대 떠난 마음의 빈 자리

  아플지라도

  나에게 잠들게 하라

  너의 그림자를.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아픔은 겪은 자만이 안다. 이별을 겪어보지 않고서는 그 아픔이 어떠한지 알 수 없다. 나 아닌 타인의 이별은 제삼자에게는 전혀 실감나지 않는 일이다. 그러기에 타자의 이별은 미화되기 일쑤이다. 그 이별이 어떤 형태의 아픔을 동반하고 있던지 간에 아름다워 보인다. 별처럼 나로부터 멀리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그렇고, 내 감정의 경계를 넘어서는 문제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당사자들의 아픔은 필설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세상이 무너지는 그런 절망적인 것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내고 난 후의 그 절망은 존재이유 자체에 대한 회의로 남을 수도 있다. 그런데 다행한 일은 그처럼 죽을 듯이 가슴 아픈 이별을 당하고도 대개는 시간이 흐르면서 망각의 그늘에 잠기게 된다. 일단 망각의 그늘에 들어서면 이별의 아픔도 서서히 퇴색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가슴속에서 화석이 되든지 아니면 개인적인 전설이 되고 만다.

  이별은 단순히 헤어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별은 완전한 절연이 아니오, 망각만도 아니다. 이별은 또 다른 형태의 생산적인 감정의 산물일 수도 있다. 이별을 통해 비로소 슬픔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아픔을 극복하는 비결을 터득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슬픔은 이별의 아픔을 치유하는 영약이다. 이별은 슬퍼함으로써 치유되는 것이다. 만일 슬픔을 느끼지 않는 이별이라면 거기에는 분노만이 자리할 것이다. 그 분노를 삭일 수 있는 약이 바로 슬픔인 것이다.

  이창대 시인의 ‘애가’는 글자 그대로 슬픔의 노래이다. 슬픔을 노래한다니 무슨 일인가. 이별을 슬픔으로 치유하듯이 슬픔을 노래로 삭이려는 것이다. 노래의 본질은 기쁨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흥얼거리는 생명의 리듬이다. 그러기에 노래는 마땅히 기쁨의 표현이어야 하건만 때로는 슬픔의 표출이기도 한다. 아픔을 슬픔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노래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슬픔의 노래 그 본질은 아픔이다. ‘애가’는 이별의 아픔을 슬픔으로 치유하려는 노래인 셈이다.

  ‘그대가 떠난 마음의 빈 자리/아플지라도/숨막히는 이별은 말하지 않으리’

  사랑하는 이가 떠남으로써 마음은 텅 비고 만다. 비어 있는 마음의 자리는 그만큼 사랑하는 이가 차지한 공간이 컸음을 반증한다. 그 마음 자리가 아플지라도 숨막히게 하는 이별은 말하지 않겠다고 한다. 아무리 빈 마음 자리가 아플지언정 ‘이별’을 현실화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이별은 정녕 헤어지는 것이다. ‘이별’은 결코 만남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미 삶의 모든 의미 그 끝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라도 이별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숨막히는 이별’은 삶의 의미 모두를 거두어가 버리는 절망적인 상황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 설령 헤어지는 일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실을 더 이상 확인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그 절망감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로 불어오는 바람/서러웁고/저기서 울리는 종소리/외로와도/가만히 견디며 들으리라’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난 뒤 그 허전함과 슬픔은 누가 달래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별이라는 것이 단순히 사랑하는 이와의 문제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이별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바람이 불어와도 슬픔이 밀려든다. 세상사 모든 게 오직 슬픔뿐이다. 어디 바람뿐인가. 저 만치서 울리는 종소리조차 새삼 외롭기만 하다. 이전에는 아름답게 들리던 종소리가 돌연 외로움을 가중시키는 존재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그 외로움을 가져오는 종소리를 ‘가만히 견디며’ 듣겠다고 다짐한다. 어느새 이별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는 것인가.

  ‘커다란 즐거움은 아픔 뒤에 오는 것./흐르는 강가에 가슴은 설레어도/말하지 않으리라 이별의 뜻을’

  이별을 현실로 받아들임으로써 이별의 아픔은 어느새 과거가 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별은 즐거움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인가. ‘커다란 즐거움은 아픔 뒤에 오는 것’이라는 역설은 또 무슨 궤변인가. 이별의 아픔 뒤에 무슨 ‘커다란 즐거움’이 있다는 것인가. 그리고 ‘흐르는 강가에 가슴이 설레는’ 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처럼 돌연한 분위기의 반전을 도무지 갈피 잡을 수 없다. 그러나 ‘말하지 않으리라 이별의 뜻을’이라는 구절에서 어떤 숨겨진 의미가 은근히 드러난다.

  여기에서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이 그 자체로 모든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커다란 즐거움’과 ‘이별의 뜻’ 사이에는 이별이 남기고 간 무엇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그대 떠난 마음의 빈 자리/아플지라도/나에게 잠들게 하라/너의 그림자를.’

  그대가 나로부터 떠남으로써 숨막히도록 가슴 아프지만 그 이별이 완전한 망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아름다운 추억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로부터 모든 것을 거두어 가지는 말아달라는 얘기다. ‘너의 그림자’만이라도 ‘나에게 잠들게 하면’ ‘아픔 뒤에 오는’ ‘즐거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떠나보내는 자에게는 결코 완전한 헤어짐이 아닌 셈이다. 어떤 연유에서건 헤어져야 하지만 너를 완전히 떠나보내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함으로써 이별은 마음의 상처이기 전에 새로운 기쁨일 수도 있다. ‘너의 그림자’만이라도 나에게 존재함으로써 이별은 슬픔으로만 막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네가 비록 내 곁을 떠났을지라도 ‘너의 그림자’를 간직함으로써 너는 언제까지나 내 마음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할 수 있게 된다.

  짐짓, 사랑하는 이들의 이별은 이런 것이어야 한다. 이별 그 자체는 아픔이고 슬픔일지라도 이별이 있기 전에 있었던 사랑은 진정 아름다운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잊은 채 이별을 아픔과 슬픔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될 일이다. 시인은 이별의 슬픔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진정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별의 아픔과 슬픔이란 결과적으로 사랑이 만들어낸 부산물일 따름이다.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