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명시감상 (38) - 하얀 밤

펜보이 2007. 9. 8. 14:25
 


  하얀 밤


  김여


  망초꽃이 메밀꽃처럼 하얗게 강변 둔치를 뒤덮고 있는 하얀 밤에는 달빛이 모래알처럼 하얗다. 아니 쌀처럼 하얗다. 하얀 밤 망초꽃밭에서 곤히 잠든 하얀 나비 한 마리 하얀 메밀꽃밭의 추억을 꿈꾸는지 알 듯 모를 듯 고이 접은 나래가 조용히 떨리고 있다. 나도 감전된 듯 하얀 찔레꽃덤불 우거진 강변의 추억에 이팔청춘 가시내처럼 가슴이 할랑거린다. 이래서 나는 망초꽃이 메밀꽃밭처럼 하얗게 강변 둔치를 뒤덮고 있는 하얀 밤을 좋아한다. 달빛이 모래알처럼 쌀알처럼 하얀 밤에는 세상의 황사 먼지에 눈병 난 내 마음도 새하얀 세모시 손수건처럼 깨끗이 표백된다. 하얀 밤에는 나도 하얀 나비의 잠에 든다. 세상을 향한 창에는 새하얀 세모시 커튼을 치고서.


  하얀색은 이 세상의 첫 모습인지 모른다. 하얀색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이고 공空이며 침묵이자 순수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검은색은 존재를 시사한다. 비록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유有이고 만滿이며 함정이자 공포이다. 무언가 음험한 것을 내포하고 있는 듯싶은 것도 검은색이다. 검은색에 대응하는 하얀색은 그 자체로만 존재할 뿐 그 무엇도 숨길 수 없다. 낱낱이 명백히 드러나는 세계인 것이다. 하얀색은 검은색보다 한층 강렬하다. 그래서 주변을 밝고 맑고 순수한 세계로 감염시키는 확산의 힘이 강하다. 제아무리 견고한 어둠일지라도 쉽게 해체하고 만다. 하얀색은 물질세계이든 정신의 영역이든 가리지 않는 치유의 영약이다.

  그러면도 순결의 상징이다. 그 어떤 색깔도 섞이지 않는 순백은 순수이자 순결의 땅이다. 이 세상이 애초에 아무 것도 존재치 않았듯이 순백에는 그 자체로 아무 것도 침범하지 않은 순결의 정서가 포진한다. 그처럼 순수하고 순결하며 순정한 세계를 상징하는 하얀색을 보면서 우리는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샤워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온갖 더러움으로부터 그나마 본연의 모습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은 다름 아닌 하얀색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맑디맑은 모습으로 피어나는 하얀 꽃이야말로 하얀색의 선두에 선다. 하얀 꽃에 범접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신성神性이 아닐까. 하얀 꽃에는 그런 영험한 기운이 깃들이고 있다.

  김여정시인의 ‘하얀 밤’은 하얀 꽃의 감염성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웅변한다. 망초꽃은 흔하디 흔한 들꽃이다. 꽃 모양이야 그다지 예쁘지 않더라도 먼발치서 바라보는 꽃들이 정연하게 무리를 이룬 정경은 일품이다. 꽃대를 꼿꼿이 쳐든 채 서 있는 망초꽃 무리는 영락없이 홑이불을 널어놓은 듯해서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는 상황에서는 눈이 다 시릴 지경이다. 꽃 모양 때문에 탐탁치 않게 여기는 이일지라도 멋지게 펼쳐지는 무리 꽃 앞에서는 단박에 고개 숙이고 만다.

  ‘망초꽃이 메밀꽃처럼 하얗게 강변 둔치를 뒤덮고 있는 하얀 밤에는 달빛이 모래알처럼 하얗다. 아니 쌀처럼 하얗다.’

  망초꽃이 메밀꽃이 되고, 달빛이 모래알처럼 쌀처럼 하얗게 되는 변전이야말로 하얀색에 의한 감염의 명백한 증거이다. 하얀색의 감염경로는 이처럼 신비적이고 초월적이다. 현실공간은 물론이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존재방식의 하얀색이 시인의 시야에 걸려든 것은 한강 둔치에 뒤덮여 있는 망초꽃을 통해서이다. 망초꽃-메밀꽃-달빛-모래알-쌀로 이어지는 하얀색의 감염경로는 이성적인 논리의 경계를 허무는 비약이다. 시적인 영감이 망초꽃에 감응하여 연상되는 이미지들이란 이처럼 하얀색 일색이다.

  ‘하얀 밤 망초꽃밭에서 곤히 잠든 하얀 나비 한 마리 하얀 메밀꽃밭의 추억을 꿈꾸는지 알 듯 모를 듯 고이 접은 나래가 조용히 떨리고 있다.’

  이제 망초꽃의 이미지는 하얀 나비로 옮겨진다. 망초꽃밭 속에서 곤히 잠든 하얀 나비는 하얀 꽃을 찾아 옮겨왔다. 하얀 망초꽃에 묻힌 채 잠든 하얀 나비는 하얀 메밀꽃밭을 꿈꾼다. 하얀 나비는 하얀 꽃을 찾아 이동하다가 그만 자신도 모르게 망초꽃이 무리 지어 있는 강변 둔치까지 오고 말았다. 그리고 망초꽃의 일부가 되어 곤히 잠들어 있다. 그렇지만 하얀 나비는 하얀 메밀꽃밭의 추억을 꿈꾼다. 하얀 망초꽃 속에서 하얀 메밀꽃밭을 꿈꾸는 하얀 나비는 하얀색에 그저 속수무책 감염되고만 것이었다.

  ‘나도 감전된 듯 하얀 찔레꽃덤불 우거진 강변의 추억에 이팔청춘 가시내처럼 가슴이 할랑거린다’

  하얀 나비가 하얀색에 감염되어 멀리 하얀 메밀꽃밭을 떠나 강변 둔치 하얀 망초꽃 무리에 섞이고 말았듯이 시인 또한 하얀 망초꽃을 보면서 찔레꽃덤불의 추억에 가슴이 뛰는 이팔청춘 가시내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이팔청춘 가시내처럼 가슴이 할랑거리는’이 만들어내는 상큼한 이미지는 이 시의 절정이다. 이런 시어와 만나면 시를 읽는 일로 행복에 겨워진다. 시인에게도 하얀색에 이끌릴 수밖에 없는 추억이 있다. 시인이 하얀색에 포획될 수밖에 없는 것은 하얀 찔레꽃덤불에 관련한 추억 탓이다. 하얀 찔레꽃덤불 우거진 강변의 추억이 ‘망초꽃이 하얗게 뒤덮고 있는 강변 둔치’에 오버랩되는 것이다. 하얀색은 그것이 꽃이든 모래이든 쌀이든 부단한 연상작용을 일으키면서 세상을 온통 하얗게 감염시키고 만다.

  ‘이래서 나는 망초꽃이 메밀꽃밭처럼 하얗게 강변 둔치를 뒤덮고 있는 하얀 밤을 좋아한다.’

  망초꽃-메밀꽃-달빛-모래알-쌀로 연상되는 하얀색의 감염성은 드디어 하얀 밤으로 전이된다. 망초꽃이 하얗게 뒤덮인 강변 둔치를 좋아하는 이유는 하얀 ‘찔레꽃덤불 우거진 강변의 추억’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하얀 망초꽃이 뒤덮인 강변 둔치는 추억을 되살리면서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것이다. 하얀 꽃만 보아도 절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팔청춘 가시내의 순수한 꿈을 되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달빛이 모래알처럼 쌀알처럼 하얀 밤에는 세상의 황사 먼지에 눈병 난 내 마음도 새하얀  세모시 손수건처럼 깨끗이 표백된다.’

  이제 이팔청춘 가시내가 아닌, 세상의 먼지에도 쉽게 눈병이 나고 마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도 ‘달빛이 하얀 밤에는’ ‘눈병 난 마음도’ 말끔해진다. 하얀 달빛이 세상을 그리 탈색시키는 것이다. 마치 ‘세모시 손수건’처럼 세상은 물론 마음마저도 하얗게 표백된다. 하얀 망초꽃으로 시작되는 하얀색의 시각여행은 시인의 상상과 추억의 공간을 통과하면서 마침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통일한다.

  ‘하얀 밤에는 나도 하얀 나비의 잠에 든다. 세상을 향한 창에는 새하얀 세모시 커튼을 치고서.’

  하얀 세상에 대한 꿈은 환상이 아니다. 하얀색은 현실과 꿈을 일체화한다. 현실은 꿈으로 이어진다. ‘세상을 향한 창’마저 ‘새하얀 세모시 커튼’을 침으로써 하얀색은 마침내 세상을 온통 하얗게 물들인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하얀색의 세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얀 나비의 잠에 드는 것은 하얀 세상에 대한 꿈의 종결이다.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