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33) - 떠도는 자의 노래

펜보이 2007. 8. 14. 11:47
 

  떠도는 자의 노래


  신경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어느 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서 사는 시간이 참으로 짧다고 느낀다. 그리고 짧은 만큼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가도 깨닫게 된다. 그러니 다른 동물이 아닌, 인간의 몸을 받아 가지고 이 세상에 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러나 생각해 보라. 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해서 과연 내가 진정 이 세상의 주인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잠시 인간의 몸을 빌어 쓰는 나그네일 뿐이다. 인간에게는 현실세계 이전의 저 세상이 있고, 뿐더러 현실세계 이후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 굳이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삶이 이전의 세상도 없고, 다음 세상도 없이, 이 세상으로 끝난다고 하면 얼마나 막연할 것인가. 그 막연함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모든 게 또 얼마나 싱겁고 허무할 것인가. 이전의 세상이 어떠했고, 다음의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제쳐놓고라도 축복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현재의 삶이 이대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허망한 일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현실적인 삶이 고달픈 이들은 이 세상은 고통의 연속일 뿐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나면 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곳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삶 자체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는 이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특히 젊은이들은 삶의 의미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모든 일에 자신감이 넘칠 뿐더러 희망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자신감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희박해진다. 그러면서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세상을 돌아보게 될 뿐만 아니라, 삶 자체에서 무언가 남다른 의미를 찾으려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산다는 것이 단순히 현실적인 즐거움이나 고통만을 느끼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부딪치는 현실적인 문제만이 삶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신경림 시인의 “떠도는 자의 노래”는 이 세상을 살만큼 산 이만이 가질 수 있는 감회이다. 다시 말해 기쁜 일 슬픈 일을 충분히 경험함으로써 인생의 무게 그 의미를 숙고할 수 있는 이의 자아성찰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놓여 있는 현실을 본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삶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를 제외한 채 세상을 담담히 바라볼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과의 온갖 인연을 끊고 종교에 귀의한 이들 정도가 아닐까.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이러한 자각은 소유를 삶의 수단 또는 목적으로 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바쁘게 살아오다가 문득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을 때 손에 쥐고 있던 ‘무엇인가를’ 어딘가에 ‘놓고 온 것 같다’거나 또한 어딘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은 그만한 삶의 연륜이 가르쳐주는 자각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놓고 왔고, 누군가를 버리고 왔다는 자각이 있기까지의 시간적인 공백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무엇인가를 놓고 오고’ ‘누군가를 버리고 올’만큼 경황없이 살아온 이의 삶의 정황은 어떤 것일까. 자신의 존재를 잊게 할 정도로 바빴거나 긴박한 어떤 상황 속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 시간 속에서 일어난 공간의 상황은 시의 주체가 되는 이의 개인적인 문제일 수도, 사회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어떤 상황이었거나 간에 ‘무엇’과 ‘누군가’를 자신의 삶 속에서 제외시켰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자신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열심히 살아왔다든지, 아니면 어떤 문제에 깊이 사로잡힌 나머지 자신의 존재를 망각할 수밖에 없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어느 순간 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엇’이 손에 없고 ‘누군가’가 옆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기차를 타고’ 찾아 나선다. 자신에게 일어난 신변의 일들이 수습되어 제정신으로 돌아왔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행동은 비로소 온전한 일상으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외진 별정우체국’과 ‘어느 삭막한 간이역’은 바로 현실적인 삶으로부터 유리된 시간 및 공간의 거리를 의미한다. 그러한 거리를 이을 수 있는 것은 기억이고 자각이다. 기억과 자각이 있음으로써 시간 및 공간의 거리를 이을 수 있는 것이다. 기억과 자각은 현실적인 복귀를 위한 행동을 유도한다. 또한 그에 응하여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좁은 골목’과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시간과 공백을 메우려는 의식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외진 별정우체국’과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서 ‘골목’과 ‘저잣거리’로 바뀐 상황변화는 돌이킬 수 없는,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시간과 공간이 결코 인위적으로 메워질 수 없음을 뜻한다.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잊어버렸거나 잃어버린 ‘무엇’과 ‘누군가’를 찾아 나섰다가 곧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는다. 지나간 시간 및 공간은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실적인 시간 및 공간개념을 떠나 이전의 세상과 이후의 세상으로 시선을 확장시킨다.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이미 ‘무엇’을 놓고 왔을지도 모르는데 새삼 현실에서 일어난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린 ‘무엇’을 찾겠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얘기다. 현실적인 삶이 이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저 세상으로 이어지는 바에는 현실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놓고 왔거나 버리고 온 것은, 되풀이되는 인간 삶의 여정을 말해주는 한 징후일 따름일 수도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현실적인 삶은 어차피 완전할 수 없다. 이전 세상의 삶이 그러했듯이 불완전한 현재의 삶은 그 연장일 따름이며, 다음 세상의 삶 또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완전한 삶이었음을 인식한다는 것은 반성하는 인간의 태도이다. 반성하는 태도야말로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인간 삶이란 이처럼 자기반성을 통해 존재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반성은 나이가 차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생에 대한 부단한 의미부여 및 그 노력의 한 결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