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31) - 성 담론 시편 - 거시기 & 머시기 6

펜보이 2007. 8. 8. 13:46
 

  성 담론 시편

  -거시기 & 머시기 6


  윤금


  물에 빠진 건 건져줘도 계집에 빠진 것 못 건진다?

  봄 한철 이슥하도록 늦바람 감투거리에

  줄초상 맞은 산벚꽃 눈발 뿌리네, 눈물 뿌리네.


  지구상의 자연계를 이루는 생명체는 대다수가 암수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교접에 의해 그 種종을 이어간다. 말하자면 암수의 교접은 생명체의 지속 및 번식을 위한 생명활동의 하나인 것이다. 종족번식을 위한 암수의 교접에는 동식물 구분이 없다. 단지 직접적인 행위이냐, 간접적인 방식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결과적으로는 암수가 생명의 씨앗을 주고받음으로써 생명체를 이어가는 것이다. 이는 생물체로서 아름다운 지구상에 살 수 있도록 특혜를 부여한 조물주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의무이다.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며, 짐승들이 뛰어 놀며, 물고기가 자유롭게 헤엄치는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은 어쩌면 존귀한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본능적인 행위인지 모른다. 꽃이 현란한 색깔로 치장하는 것도, 새가 아름다운 목청을 가다듬는 것도, 짐승이 힘을 과시하는 것도 짝짓기를 유도하는 행위이다. 즉 상대의 관심을 유도하여 번식의 본능을 일깨움으로써 교접에 응하게 하기 위한 행위인 셈이다. 동식물의 일생이라는 것도 가만히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생식의 과정일 따름이다. 따라서 생식능력이 약해지거나 소멸되면 생명력 또한 그 시한을 다하게 된다.

  우리는 티브이를 통해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동식물의 교접이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한 행위인가를 깨닫는다. 동식물의 교접 그 중심에는 보이지 않는 생명의 끈이 마치 질긴 심줄처럼 박혀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만들어 놓은 기막힌 생명의 동력장치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보는 암수 짝짓기 과정은 목숨을 내걸 만큼 치열하다.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본능으로서의 짝짓기는 새삼 생명의 신비와 존엄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다. 이는 성스러운 생명의 순환을 위한 의식이다.

  그러나 시선을 돌려 인간에게 향하면 암수 교접이 반드시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다. 인간사회는 여타 동식물과 달리 도덕과 윤리 그리고 법률을 만들어 개인의 성적인 욕구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적인 욕구 및 그 행위란 도덕적인 시각에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어야 하고 또 은밀한 것이어야 한다. 성적인 행위를 다른 이에게 들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지켜지지 않으면 비도덕적인 인간, 인격 파탄으로 치부하고 만다. 그런가 하면 사회에서 인정한 부부관계가 아닌, 남남끼리의 교접은 그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부도덕할 뿐더러 비윤리적인 사건이 된다. 그리하여 이를 타인들이 알게 되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인간으로 낙인찍히고 만다. 이렇듯이 인간의 개인적인 성적인 욕구 및 그 행위를 제한하는 것은 공동체로서의 사회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인간의 성욕을 억제하려는 본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인간의 성적인 욕구란 여타 동물들처럼 단순히 종족번식만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데 그 이유가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경우 남녀 교접은 종족번식을 위한 본능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성적인 쾌락을 위한 수단이라는 혐의가 짙은 형편이다. 만일 개개인의 성적인 쾌락을 방임한다면 사회적인 질서가 무너져 인간의 삶 자체가 존속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성적인 욕구와 행위는 자율적으로 통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윤금초 시인의 ‘성 담론 시편’-거시기&머시기6-은 바로 인간의 성적인 쾌락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시인은 성적인 쾌락에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밀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인간의 성적인 쾌락 그 자체의 이미지만을 붙들고자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사회적인 잣대가 적용되기는 마찬가지다. 사회적인 시각을 통해 남녀의 관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물에 빠진 건 건져줘도 계집에 빠진 것 못 건진다?’

  이처럼 처음부터 사회적인 속설을 인용함으로써 일단 객관적인 관점으로 접근한다. 남자가 바람이 나서 한 번 계집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물에 빠진 상황으로 비유하는 사회적인 관념을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객관화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반드시 거기에 동의할 수는 없다는 뜻으로 물음표를 던진다. 이는 상황반전을 의식한 복선이다. 그렇다. 물음표는 사회적인 인식으로서의 속설을 인정하거나 또는 부정할 수 있는 이중적인 장치이다.

  ‘봄 한철 이슥하도록 늦바람 감투거리에’

  봄은 여인의 계절이라고 한다. 남쪽나라의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얼어붙었던 땅이 풀리자 겨우내 숨죽여 지내던 생명의 기운이 일시에 뻗쳐난다. 그리고는 땅속의 씨앗이 터지고 나뭇가지에서는 새순이 고개를 내밀며 나비들이 꼬치에서 깨어난다. 봄바람은 생명의 기운을 약동케 하는 효험이 있는 까닭이다. 인간이라고 다를 리 없다. 봄바람에 먼저 반응하는 것은 여성들이다. 치맛자락을 들척이는 봄바람에 그만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안절부절 못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슥하도록 늦바람’ 빠진 것은 여성임을 시사한다. 물론 여자의 봄바람이 일방적인 것일 수는 없다. 배후에 당연히 남자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감투거리’는 여성상위 체위를 가리키는 것이니 만치 여성이 능동적인 입장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줄초상 맞은 산벚꽃 눈발 뿌리네, 눈물 뿌리네.’

  산 벚꽃이 눈발처럼 휘날리는 이미지를 초상이 줄줄이 이어지는 상황에 빗댄 표현이다. ‘줄초상’이라는 용어는 자연적이라거나 우연적인 결과가 아닌, 어떤 보이지 않는 존재 및 상황에 의해 벌어지는 사건의 연속을 시사한다. 이를 통해 연상되는 ‘감투거리’는 산 벚나무를 흔들어대서 꽃잎이 눈발처럼 날리는 상황으로 표현된다. 봄철 이슥한 밤에 벌어지는 남녀의 질탕한 사랑놀이를 은유하는, ‘눈발’ 같은 ‘산벚꽃’의 이미지는 모든 형태의 불순한 상상을 지극히 아름다운 서정적인 이미지로 승화시키는 기막힌 묘수이다. 이야말로 시가 지닌 감칠맛 나는 언어의 유희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리고, 희열이 극에 달하면 눈물이 된다던가......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