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47) - 우울한 축배

펜보이 2007. 12. 4. 22:17
 

우울한 축배


신현림


나를 중심으로 도는 지구는

왜 이렇게 빨리 돌지

우리가 세상에 존재했었나

손닿지 않는 꽃처럼 매개 없는 듯 살다 가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어디에도 없는 사람들 같지

생애는 상실의 필름 한 롤이었나

구불구불 뱀같이 지나가지

그 쓸쓸한 필름 한 롤


불빛 환해도 길을 잃기 일쑤고

여름 축제는 열렸지만

축구공만한 해는 내게 날아오지 않았지


니 멜 왔나 클릭하면 스팸 멜만 잔뜩 정박중이고

꿈꾸던 등대는 물살에 잠겨간다

더는 되돌아올 것도 없이

더는 우릴 묶을 끈도 없이

창 밖엔 흰 머리칼 더미가 휘날려가지


가혹한 세월의 축배

잊어도 기억나도 서글픈 옛 시절에 축배

지루하고 위험한 별거생활에 건배

지치게 하는 것들과 손놓지 못하는

어정쩡한 자신이 몹시 싫은 날


할 수 있는 건 갈 데까지 가보는

절벽까지 피 토하듯 붉게 울어보는 거

또 다른 삶을 그리워하다

거미처럼 새까맣게 타서 죽어가는 거

 


중년에 접어들면 세상을 보는 눈이 점차 달라지게 된다. 어쩌면 인간 삶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터득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자연스러운 변화인지 모른다. 이 때쯤이면 세상이 생각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데 대한 두려움 또는 절망감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빠르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남아있는 삶의 시간을 계산해보게 된다. 이런 자각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올바르게 설정하는 계기를 맞이한다.  이 세상에 잠시 나들이 나왔다가 돌아가는 입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납득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 정도에 이르면 때로는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모든 일이 시니컬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 중년에 이르러 자신의 존재를 지탱해줄 만한 굳건한 그 무엇을 이루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순간에 느끼는 허무의 체적은 더욱 크게 마련이다.

신현림 시인의 “우울한 축배”는 중년이 느끼는 삶에 대한 아픈 진술이다.

불교에서는 세상의 중심은 나 자신이라고 가르친다. 내가 존재함으로써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지, 세상이 존재함으로써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그렇다. 따지고 보면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세상도 함께 소멸하고 만다. 이는 특정 종교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다.  

‘나를 중심으로 도는 지구는/왜 이렇게 빨리 돌지/우리가 세상에 존재했었나/손닿지 않는 꽃처럼 매개 없는 듯 살다 가지만/눈에서 멀어지면 어디에도 없는 사람들 같지/생애는 상실의 필름 한 롤이었나/구불구불 뱀같이 지나가지/그 쓸쓸한 필름 한 롤’

이제껏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믿고 자신감에 넘쳐 살아왔으나 어느 날 문득 시간이 너무 빠르다고 느낀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월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면서 비로소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님을 깨닫는다. 현실을 냉철히 볼 수 있는 지혜가 생긴 중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삶의 유한성을 의식하게 되는 까닭이다.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분주하게 살아오느라 삶의 유한성을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리저리 많은 사람들을 만나 맺은 인연조차도 서로를 떠나고 나면 ‘어디에도 없는 사람들’ 같게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한 생애가 상심으로 채워진, 인화되지 않은 필름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곧게 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마치 뱀처럼 구불구불한 힘겨운 생애를 지나왔다는 쓸쓸한 반추가 있을 따름이다.

‘불빛 환해도 길을 잃기 일쑤고/여름 축제는 열렸지만/축구공만한 해는 내게 날아오지 않았지’

세상이 희망적인 빛으로 넘친다고 한들 이미 삶의 귀착점이 어디인가를 깨닫고 나면 모든 일이 심드렁해져 주의가 산만해지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길을 잃기 일쑤고’ 태양마저도 열기가 식은 듯이 느껴진다. 삶의 열정을 부추기는 태양도 내게 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성한 여름날의 축제, 즉 삶의 절정을 노래하는 시기에도 강렬한 햇살의 뜨거움을 느끼지 못한 채 지나왔다는 쓸쓸한 자각이다.

‘니 멜 왔나 클릭하면 스팸 멜만 잔뜩 정박중이고/꿈꾸던 등대는 물살에 잠겨간다/더는 되돌아올 것도 없이/더는 우릴 묶을 끈도 없이/창 밖엔 흰 머리칼 더미가 휘날려가지’

그래도 혹시나 하여 누군가의 소식을 기다린다. 하지만 기대는 간단히 무너지고 만다.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아름다운 사람을 인도하겠다고 꿈꾸던 등대도 더 이상 쓸모 없이 돼버렸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고 새로운 인연은커녕 그나마 존재하던 ‘우리’의 관계를 지속시킬 만한 연결고리마저 없다. 세월의 무상함을 알리듯 ‘흰 머리칼 더미’만이 휘날리고 있을 뿐이다.

‘가혹한 세월의 축배/잊어도 기억나도 서글픈 옛 시절에 축배/지루하고 위험한 별거생활에 건배/지치게 하는 것들과 손놓지 못하는/어정쩡한 자신이 몹시 싫은 날’

비록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 없고, 꿈같은 시절은 모두 지나고 말았어도 지나간 삶에 그나마 축배를 하고싶어진다는 것인가. 지나간 삶이 그저 꿈에 불과하다고 체념하기에는 그래도 아직은 미련이 남아 있다. 삶이란 정녕 그런 것인지 모른다. 여기에서 ‘축배’나 ‘건배’는 단지 지난날의 기억을 돌이켜 보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는지.

‘할 수 있는 건 갈 데까지 가보는 거/절벽까지 피 토하듯 붉게 울어보는 거/또 다른 삶을 그리워하다/거미처럼 새까맣게 타서 죽어가는 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이란 마지막까지 갈 수밖에 없다. 설령 막다른 골목이 눈앞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것이 인간의 심정이다. 인간의 삶이란 유한한데다가 자의적으로 어떻게 좌지우지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다. 이미 나 자신의 삶이 어떻게 결과하리라는 결말을 빤히 알고 있음에도 그로부터 도망치거나 돌이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삶의 실체가 명백히 드러났다고 해서 절망하고 포기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회적인 삶이므로 절망하거나 포기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럴 바에는 남아 있는 생과 더욱 치열하게 붙어볼 일이다. 그리하여 ‘갈 데까지 가보고’ ‘피 토하듯 붉게 울어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포기하기는커녕 ‘또 다른 삶을 그리워’하면서 ‘거미처럼 새까맣게 타서’ 죽더라도 한 번 해보자는 오기가 발동한다. ‘서글프고’ ‘지치는’ ‘자신이 싫어지는’ 삶이었을지언정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 좀더 의연하겠다는 다짐이다. 이러한 자각과 각성은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한 개인의 성찰이기에 앞서 우리 앞에 다가온 현실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