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산黃鶴山
조정권
내 저 뻐꾸기 울음소리 산 채로
석빙고石氷庫 속에 가둬서 기르다가
백 년 후쯤 산문山門을 열어놓으리라
세상을 등지고 산에서 사는 선승들의 일상적인 삶은 무미건조하게 보인다. 하루 세끼 공양을 하고는 가부좌를 튼 채 그저 벽과 마주하고 선정에 드는 단조로운 구도의 연속이다. 이처럼 지극히 간결한 삶을 선택한 것은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하나의 목표 해탈을 위해서이다. 이 세상에 온 한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떠 안게 되는 탐진치貪䐜癡로부터 홀가분해지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디에서 구속되지 않는 절대자유를 얻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갖 이해관계가 얽힌 속세로부터 단절된 삶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존재를 가능케 한 부모자식간의 인연은 물론이려니와 모든 사회적인 관계 그리고는 마침내 머리카락마저 싹둑 자르고 선방에 은거하는 것이다. 일단 선방에 들게 된 이후로는 일체의 물질적인 탐욕과 육체적인 욕망을 거두고 본능적인 식욕마저 절제하게 된다.
이러한 극한적인 자기절제의 구도행은 심신을 맑게 만든다. 청정한 기운이 몸을 감싸게 된다. 그래서일까, 어쩌다 참다운 선승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찬바람이 감도는 듯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차가운 냉기야말로 속세의 먼지로부터 스스로를 감싸는 보호막이기도 한데, 그런 기운에는 속인의 무른 정신을 청정하게 만드는 약효가 있다. 그 기운은 산의 정기인지도 모른다. 산의 정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사는 까닭이다.
조정권시인의 ‘황학산’은 선승에게서 감지되는 그런 청정한 기운이 감돈다. 그러면서도 마치 절간에서 마시는 석간수 한 모금과 같이 정신까지 맑게 하는 시적인 긴장이 넘친다. 이 시에는 문학의 존재가치를 되씹게 하는 희열이 있다. 극히 간명하면서도 쉬운 언어로 짜여졌음에도 불구하고 내용만큼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형식미가 간명해진 만큼 내용에서도 극도의 시적인 긴장과 함축미가 있기 때문이다.
‘황학산’이라는 제목이 상징하는 의미를 찾기는 어렵다. 널리 알려진 산도 아니다. 이름세가 붙은 명산이 아니다. 그러나 만만치는 않은 산이다. 충청북도 영동군과 경상북도 금릉군 사이에 있는 산으로서 그 높이가 1,111미터에 달하니 얕잡아 볼 일이 아니다. 그렇다. 시인이 한 편의 시를 남길만한 그 무엇이 있는 산이려니 싶다. 그렇더라도 일단 이 시에서 황학산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드러난 의미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석빙고가 있는지 모르겠고, 산문을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 절간이 있음직하다. 물론 한반도에서 이만한 높이의 산 치고 절간을 거느리고 있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으니, 그 또한 특별한 일은 아닌 성싶다.
이 시는 ‘뻐꾸기의 울음소리’로부터 발단한다. 황학산 산 속에서 우는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불현듯 시적인 감흥을 부추겼음직하다. 깊고 고요한 숲 가운데서 우는 뻐꾸기 울음소리는 시골동네 뒷산에서 우는 것과는 그 감흥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깊은 골로 메아리치는 그 공간적인 깊이와 여운은 영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산이 크고 높으면 저절로 고개 숙여지고 숙연해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높은 산 속에 들어서면 까닭 모를 장엄한 분위기와 그로부터 번져 나오는 무거운 기운에 심신이 위축되는 듯한 감정에 젖어든다. 그러기에 큰산에 들어서면 거기에 발붙이고 사는 풀 한 포기며 돌 하나조차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이는 자연현상에 대한 소감이 아니라, 나 또는 인간의 존재가치에 대한 성찰이다. 한마디도 없이 예로부터 그저 묵묵히 존재할 따름이지만 산에는 인간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다. 그 위엄이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을 살아온 존재가 가질 수 있는 무거움이다. 그 무거움이 우리 인간의 발등을 짓누르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와 같은 무거움에서 홀연히 벗어나 산 뻐꾸기의 울음소리를 통해 문득 선승이 득도하듯이 계곡 물처럼 말간 시상과 마주하게 된다.
‘내 저 뻐꾸기 울음소리 산 채로
석빙고 속에 가둬서 기르다가’
‘뻐꾸기 울음소리’가 너무도 낭랑하였음인지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산 채로’ 잡아다가 ‘석빙고 속에 가둬서’ 기르고자 한다. ‘뻐꾸기 울음소리’를 ‘산 채로’ 잡는다는 절묘한 언어의 유희야말로 이 시를 가장 시답게 해 주는 부분이다. 이어지는 ‘석빙고 속에 가둬서’ 기른다는 표현도 시를 한층 매력적으로 만든다. 어디 한 군데도 흠집 낼 수 없을 만큼 감칠맛 나는 시어의 배열과 이미지 구성이 절묘하다. 그런데도 그 시어 및 이미지 속에 은닉된 내용은 의미심장하다. 깊은 철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뻐꾸기 울음소리’를 ‘석빙고 속에 가둬서 기르다가’ ‘백년 후쯤 산문을 열어놓으리라’로 맺는 짤막한 시에는 선가의 구도행 그 신비적인 이미지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뻐꾸기 울음소리’는 선승의 화두일 수 있다. 석빙고는 화두를 끌어안고 선정에 드는 선승의 맑은 정신을 가리키고. 그런가 하면 산문이란 사찰의 바깥문인 일주문이니, 이쯤에서 이 시의 그 전체상이 드러나는 셈이다.
선가의 수도는 여러 방편이 있다. 면벽하고 결가부좌를 튼 채 선정에 드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이고, 장좌불와라든가, 두문불출, 묵언, 고행, 만행 따위가 그것이다. 이 여러 형태의 구도행은 모두 참다운 자각, 즉 견성이라는 하나의 목표에 집중된다. 자기의 본래 모습, 참모습을 본다는 것이야말로 깨우침의 궁극인 것이다.
이 시는 바로 선승이 화두를 안고 평생을 보내는 모습을 이처럼 아름다운 서정적인 이미지 속에 함축하고 있다. 뻐꾸기 울음소리-석빙고-산문이라는 이미지의 연결을 통해 비의로 가득 찬 선승의 구도행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맑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를 읽으면 청정한 산 공기를 마시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 가슴속으로 싸아 하니 번지는 감동은 실로 형언키 어렵다. 이럴 때 시는 응축된 이미지와 내용을 통해 세상을 내다보는 창구가 된다. 우리들 삶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신항섭:미술평론가)
'명시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를 울린 시 (41) - 배가 왔다 (0) | 2007.10.03 |
---|---|
명시감상 (40) - 어느 밤의 누이 (0) | 2007.09.27 |
명시감상 (38) - 하얀 밤 (0) | 2007.09.08 |
명시감상 (37) - 슬픈 식욕 (0) | 2007.09.02 |
나를 울린 시 (36) - 혼자서 붐비다 (0) | 2007.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