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46) - 풍경

펜보이 2007. 11. 26. 08:41

 풍경


 김형영

 


 한여름 숲이 흔들리나니

 바람은 향기 묻혀

 오고 가노라.


 더위 취한 나무들 늘어져 골면

 산새 들새 까불대며

 자장노래 부르노라.


 사는 일이 즐거운 건

 이들뿐인가

 나 그 곁에 누워

 풍경이 되고지고.


현실적인 모든 일들을 잊은 채 홀연히 자연과 마주하고 보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새삼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게 된다. 그런데 일상적인 시선으로 마주하는 자연은 아무런 규칙도 없이 그저 무질서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 무질서함 속에 아름다움을 이끌어내는 질서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온갖 형태의 물상이 뒤섞여 있어 혼잡스러운 자연에도 어떤 일정한 규칙이 적용되고 있기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혼돈 속에도 어떤 규칙성이 존재한다는 카오스이론이 적용될 듯 싶은데, 그 일정한 규칙이 다름 아닌 질서이다. 우리가 자연을 보면서 아름답게 느끼는 것은 그 빛나는 생명력 때문이 아닐까.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게 부여되는 생명력이야말로 혼잡스러운 자연을 하나로 통합하는 질서이자, 아름다움의 실체인 것이다.

꽃은 아름답다. 나무도 아름답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동물이 다 아름답다. 가까이 보면 하나 하나 저마다의 고유한 형태미, 즉 필연적인 아름다움으로 치장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 아름다움의 본질은 생명력이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그 찬연한 생명력을 통해 아름다운 형태미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아름다운 존재들이 함께 하는 자연은 저절로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연경치, 즉 풍경을 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록 바라보이는 것은 산과 물과 나무와 하늘과 구름 따위의 개략적인 형태에 불과할지라도 이들이 서로 조화를 이룸으로써 선경이 되는 것이다.

김형영 시인의 “풍경”은 생의 환희로 빛나는 아름다운 자연풍경의 그 속내를 들여다보고 있는 작품이다. 그가 들여다보고 있는 자연의 속내는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투시해 들어가는 곳에 위치한다. 시각적인 이해의 공간 너머에 존재하는 자연의 진실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자연의 일부가 아닌, 관자로서의 객관적인 존재가 된다. 스스로 자연과 유리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동안은 관자의 입장에 머물 수밖에 없다. 마치 남의 일을 보듯이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자연을 관찰하는 것이다.

‘한여름 숲이 흔들리나니/바람은 향기 묻혀/오고 가노라.’

숲이 흔들리는 것은 순전히 바람 때문이다. 한여름이 아니더라도 바람은 걸핏하면 가지를 흔들고 잎새를 쑤석인다. 그러나 바람은 습관처럼 무심히 숲을 흔드는 것이 아니다. 바람은 향기를 묻혀 나르는 일을 하느라 숲을 흔들 뿐이다. 향기를 이리저리 나르는 소통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자연에는 이런 저런 향기로 넘친다. 꽃만이 향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숲 속의 나뭇잎과 들풀 하나에도 고유의 향기가 있다. 따지고 보면 온 세상의 것들이 향기를 가지고 있다. 그 향기를 묻혀 이곳저곳에 흩뿌리고 다님으로써 자연 속에 함께 하는 온갖 생물들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며 세상이 참으로 아름다운 곳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그저 할 일 없이 숲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향기를 실어 나르는 배달부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여름 숲은 생의 절정기를 의미한다. 온통 푸름으로 가득 찬 대자연의 무성한 생명력을 환기시기에 가장 적절한 계절이다. 그 숲에는 인간의 지적 이해력이나 감각으로 알 수 없는 신비한 자연현상이 무수히 일어난다. 따라서 생명력으로 충만한 숲 속으로 잠입해야만 시각적인 이해를 넘는 자연의 그 실체 및 진실을 목도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래야만 한여름 숲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속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자연으로부터 시인 자신의 존재를 제외시킨 채 객관적인 시선에 의한 진지한 관찰로써 얻어지는 진실이다. 바람은 비록 숲처럼 생명력을 얻은 존재가 아닐지언정 자연물상의 감각을 일깨워주는 한편 자연의 아름다움을 거드는 물리적인 관계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더위 취한 나무들 늘어져 골면/산새 들새 까불대며/자장노래 부르노라.’

한여름 더위에 지친 나무들이 축 늘어진 채 곤하게 낮잠에 빠져들면 산새 들새들이 이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까불대며 자장가를 부른다. ‘더위에 취한 나무들 늘어져 골면’이라는 구절은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모습이다. 이는 이미 정해진 자연의 이치에 거역하지 않고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자연물상의 존재방식이다. 지친 나무를 재우기 위해 자장노래를 부르는 새들의 존재는 더불어 사는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를 보여준다. 나무와 새들이 분별없이 조화를 이루는 자연의 생리를 깨우치는 순간이다. 나무들과 새들이 격의 없이 한 통속이 되는 이와 같은 정경은 마치 더위에 지쳐 늘어진 채 낮잠에 빠져든 아이와 그 옆에서 자장가를 불러주는 할머니를 연상시킨다. 시인은 순간적으로 나무들과 새들을 의인화함으로써 인간과 동격의 존재들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는 일이 즐거운 건/이들뿐인가/나 그 곁에 누워/풍경이 되고지고.’

까불대며 자장노래 부르는 산새 들새들의 모습을 통해 불현듯 시인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있다. 세파에 시달리는 자신의 삶이 비교되는 것이다. 즐거운 일이라고는 없는 각박한 현실적인 삶에 치여 주눅든 자신의 모습이 비쳐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무런 근심 없이 더위에 지쳐 늘어져 곤한 잠에 빠져든 나무들을 상대로 자장노래를 부르며 까불대는 들새 산새들이 상대적으로 부럽기만 하다. 그리하니, 세상사 모든 근심을 잊고 그저 나무들처럼 누워 들새 산새들의 자장노래를 들으며 곤한 잠에 빠져드는 한가로운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과 일체가 되는 삶에 자족하고 싶다는 얘기다.

여기에서 시인은 인간 삶이란 결과적으로 숲 속의 나무들이나 새들만도 못하다는 현실과 마주친다. 역설적으로 인생사가 얼마나 고단한가를 말하고 싶은지 모른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름다운 자연풍경의 일부가 되는 것이 낳겠다는 심사이다. 수채화처럼 맑게 들여다보이는 시이지만 그 안쪽에는 이렇듯이 삶에 대한 깊은 상심이 자리하고 있다.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