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적인 운문 (15) - 견과를 깨며 견과를 깨며 신항섭 깜깜한 세상 하나가 요지부동으로 오랜 습속처럼 닫혀 있다 어디서부터 열까 한 번도 연 적이 없는 몸 면도날도 허용치 않는 완벽한 차단 틈이라고는 없다 완고한 어른 같은 꽉 막힌 세상 하나를 안고 밖으로 흘리는 총명한 웃음소리 반짝이는 껍질 온전한 절개란 없다 완전한 해.. 서정적인 운문 2007.10.18
서정적인 운문 (14) - 풀잎의 노래 풀잎의 노래 신항섭 밑동이 어김없이 잘려나간 배추밭 고랑 사이로 간신히 일어서는 풀잎이 저 홀로 달동네 허름한 저녁식탁에 오른다 끼니마다 달그락거리며 쇳소리로 우는 반달 숟가락을 달래고 소반에 눕는 풀잎은 저 홀로 빈 물그릇에 들어가 풀죽이 된다 그러고도 남은 힘으로 기력이 쇠잔한 할.. 서정적인 운문 2007.10.11
서정적인 운문 (13) - 꽃의 희롱 꽃의 희롱 신항섭 꽃이 오라해서 달려갔더니 꽃이 가라 하네 쓸쓸해져 돌아오는데 다시 꽃이 오라 하네 기뻐 달려갔더니 꽃이 도로 가라하네 가고 오는 일이 내 뜻은 아니라지만 꽃 장단에 춤추다보니 서럽디 서럽네 서정적인 운문 2007.10.06
서정적인 운문 (12) - 겨울 숲 우화 겨울 숲 우화 신항섭 이건 비밀인데요 이 숲에선 글쎄 이웃한 나무들끼리 여름내 부벼댔다구요 소낙비 벼락치는 밤에는 가지가 벗겨지도록 부벼댔다구요 그런데 지금은 시치미 딱 떼고 모른척해요 발가벗었으니 부끄러울 테지요 어쩌다 쉬어 가는 산새라도 와서 빈가지 흔들어주어야 .. 서정적인 운문 2007.09.30
서정적인 운문 (11) - 길이 가고 있다 길이 가고 있다 신항섭 길이 가고 있다 낮술에 취해 흔들리며 구부정하니 가고 있다 한 뼘쯤 됨직한 밭뙈기 논배미 허리춤에 차고 가고 있다 나지막한 둔덕이며 야트막한 골짜기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고 있다 엿처럼 늘어져 누운 놀 등지고 힘없이 길이 가고 있다 기우뚱이는 낮 달을 .. 서정적인 운문 2007.09.18
서정적인 운문 (10) - 겨울 숲에서 겨울 숲에서 신항섭 퍼부어도 퍼부어도 끝내 허기질 뿐인 허망한 무게로 눈이 내린다 그리고, 눈조차 버거운 나뭇가지에 심란한 하늘이 얹힌다 그 무게로 기우는 세상 이런 날이면 세상사 분별심 지우는 눈발을 징검다리 삼아 저 숲 너머 산비탈에 꿈처럼 빗겨선 너에게 닿고 싶다 그런들, 힘껏 흔들.. 서정적인 운문 2007.09.17
서정적인 운문 (9) - 가을비 가을비 신항섭 제 철로 오는 비라고 무심히 돌려보내지 마세요 혹여 잠시 잊었다가도 문득 돌이켜 세워 차 한 잔 들려 보내세요 국화 향 축인 그대 입술에 대어 차 한 잔 들려 보내세요 빈 몸으로 왔다해도 떠나고 나면 빈자리가 존재의 그림자가 얼마나 큰지 아실 거예요 그게 곧 그리움이란 걸 아실 .. 서정적인 운문 2007.09.14
서정적인 운문 (8) - 그대의 강 그대의 강 신항섭 그래, 거진 달포면 닿으리라던 그대의 강 마을은 어디인가 온통 뿌연 잿빛 세상 등지고 와 이렇듯 흔들리며 밤으로 밤으로 떠돌고 있다 얼마 전 안개에 갇혀 잠시 머문 이름 모를 강 마을은 빈 마을은 단지 나루터만 홀로 남아있었다 긴 띠를 이루며 물거품만 남아있었다 그래도 그대.. 서정적인 운문 2007.09.11
서정적인 운문 (7) - 세수 세수 신항섭 첫닭이 울기 전 별 아기 요람 밝히는 초롱을 들고 들길로 나선다 지표면 나직이 이슬방울 울리며 뒤따르는, 잠귀 밝은 길섶 요정들 살가운 발자국마다 꿈 깨듯 발아하는 빛의 씨앗 이윽고, 분주히 이슬을 꿰어차는 키 낮은 풀들이 들녘에 안착한 한 무더기 별들을 재우고 나.. 서정적인 운문 2007.09.08
서정적인 운문 (6) - 박꽃 우화 박꽃 우화 신항섭 건너편 초가지붕 너머 삐죽이 솟은 바지랑대 벗겨진 달 속곳 여지없이 드러난 바알간 볼기짝 속 빈 배 쥐어틀어 안고 허연 이 흐드러지게 날리는 서정적인 운문 2007.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