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신문 칼럼
미술시장에 닥친 혹독한 추위
신항섭(미술평론가)
지난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겨울이 오기 전 기상대에서는 따뜻한 겨울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겨울이 닥치고 보니 맹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그렇지 않아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국민경제가 더욱 어려워진 탓에 생활이 힘든 이들로서는 유난히 춥고 긴 겨울이 되었다. 추위를 느끼는 체감온도는 가진 이보다 못 가진 이가 훨씬 더 낮기 마련이다. 그래서 없는 이들에게 겨울은 가장 힘든 계절이다.
미술계만 해도 그렇다. 미술인들에게 지나간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매섭고 차가운 시절로 기억될지 모른다. 아마도 뼛속깊이 파고드는 추위가 무엇인지 실감했으리라. 대다수의 미술인들은 아무리 어렵다 해도 최근처럼 미술시장이 꽁꽁 얼어붙은 일은 없었다고 입을 모은다. 미술경기가 나쁜데다가 날씨마저 차가워 체감경기는 더욱 냉랭하게 느끼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미술인들이 겪는 어려움은 단순한 미술경기가 나쁘다는데 대한 반응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인 생활고와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화랑가 풍경을 보면 좋은 전시회를 기획해도 작품이 팔리기는커녕 전문 콜렉터들은 물론이요, 미술애호가들의 발길조차 뜸해졌다. 예년 같으면 겨울이라고 해도 볼 만한 전시회에는 관람객들이 그럭저럭 심심치 않게 이어졌건만, 최근에는 애호가들의 발길마저 뚝 끊겼다. 아무리 세계경제 탓이라고 하지만, 미술계가 이처럼 깊은 침체 국면에 빠져든 예가 있었던가싶으리만치 힘겹다.
물론 세계적인 경기침체 탓도 있으나 이전과 달리 미술시장이 변하고 있는 현실상황에서 비롯된 어려움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오랜 동안 이어져 온 상업화랑 중심의 미술시장 구조가 옥션과 아트페어로 확장되면서 화랑가가 겪는 불황 체감지수는 더욱 높을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지난 반세기 동안 미술시장은 상업화랑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옥션과 다양한 아트페어가 미술시장에 등장하면서 상업화랑의 기능을 잠식하는 형편이다.
그렇다. 한국미술시장은 서구미술시장과 마찬가지로 옥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시장질서로 개편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콜렉터들이 옥션으로 몰림에 따라 화랑의 역할을 자연히 축소되는 추세에 있는 것이다. 어쩌면 투자목적으로 미술품을 구입하는 이들에게는 옥션은 화랑보다 더 매력적인 시장일 수 있다. 환금성에서 화랑보다 앞서는 까닭이다. 콜렉터들이 옥션에 더 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환금성과 무관하지 않다.
상업화랑은 옥션에 비해 환금성 면에서 뒤진다. 갑자기 현금이 급해서 작품을 가지고 나가더라도 팔 곳이 마땅치 않다. 구입한 화랑에 가지고 나가도 마찬가지다. 팔 때와 팔고 난 뒤의 반응이 전혀 다르다. 실제로 IMF 때 중소기업이나 전문직, 그리고 일반 미술애호가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 그 동안 수집한 미술품을 가지고 나와 현금을 마련하려고 했지만 팔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구입한 화랑에 가서 구입가격의 절반까지 내려서라도 팔고자 했으나 현금을 손에 쥘 수 없었다.
물론 국가경제가 부도직전이어서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형편인데 미술품을 되사들일 화랑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콜렉터 당사자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낭패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작품을 보며 즐기다가 세월이 지나면 어느 땐가는 좋은 가격에 되팔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가격의 높낮이를 떠나 얼마간이라도 현금을 마련할 수 없는 미술품이란 한낱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경험한 콜렉터로서는 상업화랑은 오직 미술품은 파는 곳으로밖에 인식될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화랑이 미술품을 일방적으로 팔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에 따라 구입하기도 한다. 다만 화랑 자체가 영세하다보니 아무 때나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IMF 때와 같은 상황에서는 화랑의 역할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게 되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미술품을 구입하는 콜렉터의 입장에서 볼 때 최소한의 환금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상업화랑에서 그림을 구입하는 데 망설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상업화랑이 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고 해결할 수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옥션이다. 옥션은 불특정 다수의 콜렉터를 대상으로 미술품을 파는, 철저한 대리판매시장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보면 상업화랑이 상실한 판매기능을 대행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고 보면 상업화랑의 기능 그 절반을 옥션이 가져간 셈이 된다. 따라서 그 동안 미술품 판로가 없어 난감해 하던 콜렉터들에게 옥션은 매력적인 시장일 수밖에 없다. 오랜 동안 상업화랑이 장악하던 한국미술시장에서 옥션이 등장, 단기간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저간의 사정에 연유한다.
그런데 옥션이 활성화되면서 한 가지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옥션에 단기투자자본이 몰리면서 미술품 가격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일부 특정작가가 급부상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중견작가가 어느 날 갑자기 경매에서 고가에 낙찰되는가 싶더니 연이어 가격이 상승하면서 하루아침에 유명작가가 되는 것이다.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할 때 가격이 상승하는 것이 시장원리라고는 하지만, 일반 미술시장에서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젊은 작가가 급상승하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작고작가의 경우라면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작품가격이 적정하게 형성되어 있어 문제가 없다. 문제는 현역작가의 경우이다. 옥션에 출품되는 일 자체만으로도 시장가치가 있다고 인식되어 있는 한국적인 현실에서는 어떤 특정작가가 부각되는 일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즉 특정 작가의 작품을 꾸준히 경매에 올리게 되면 콜렉터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자연스럽게 그 작가의 작품을 매집하는 현상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미술시장의 입장에서 볼 때 스타 작가가 출현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스타 작가가 미술품 가격을 끌어올리게 되고, 수집가들이 합류하면서 미술시장이 활성화될 수 있는 까닭이다. 실제로 지난 몇 년 동안 미술시장이 옥션을 중심으로 활황이었을 때 소수의 신예 및 중견작가들의 가격이 급등했다. 그 가운데 일부 작가의 작품은 돈이 있어도 구입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미술품 가격이 급등하다보니, 단기자금이 미술계로 몰려드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인기작가 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도 관심을 갖는 분위기가 확산되어 미술시장 전반이 일시적으로 활성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주식시장과 마찬가지로 옥션에 단기자금이 들어오게 되면 활황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단기급등에 따른 경계심리가 작동하게 마련이고, 너무 가격이 올라갔다 싶으면 투자에 주저하게 된다. 옥션의 생리상 정점을 쳤다싶으면 순식간에 매기가 끊어지게 되고 그에 따른 가격급락은 필연적인 수순이다. 지금 미술계의 불황은 이런 상황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세계적인 금융위기 한파가 주범인 듯싶으나 한국미술시장은 옥션을 중심으로 한, 화려한 잔치가 끝난 후유증일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미술시장의 불황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미술시장의 움직임을 보면 대략 10년 주기로 활황과 불황이 교차하는 그래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즉 미술시장은 10년을 주기로 한 차례 활황이 오면, 그 다음에는 다시 불황이 꼬리를 무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10년 주기로 보자면 5년은 활황이고 5년은 불황인 셈인데, 실제로 미술품 가격이 상승하고 판매가 증가하여 활황이라고 체감하는 기간은 길어야 2-3년에 불과하다. 나머지 7-8년은 불황이라고 느끼는 기간인데, 최근의 미술경기불황은 세계금융위기와 더불어 진행되는 현상이어서 더욱 심각하게 느껴질 뿐이다. 10년 주기설이 맞는다면 2-3년 후가 되면 다시 서서히 미술경기가 활황국면으로 접어들리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옥션은 보다 다양한 미술품을 거래할 수 있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미술품뿐만 아니라, 그밖에 다양한 수집품을 판매할 수 있다. 미술품 판매가 부진하면 다른 물품으로 불황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그러기에 현대미술 판매가 부진하면 고미술로 시장을 이끌어갈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마이너 옥션에서 고미술 판매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가 이를 뒷받침한다. 현대미술이 약화되면 고미술이 강세를 유지하게 되고, 고미술이 약화되면 현대미술이 강세를 타는 것이다. 항상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야 하는 옥션의 입장으로서는 이와 같은 시장의 흐름을 선도한다고 볼 수 있다.
세계경제가 아직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한국경제는 G20 가운데 가장 먼저 경기회복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고 한다.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고 해도 문화예술계까지 그 영향이 미치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지만, 내년 겨울은 그래도 지난겨울처럼 혹독한 추위는 피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맹추위도 가고 남녘에서는 꽃소식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미술신문 제434호(2010년 2월)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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