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예술포럼 <미술>
대한민국 문화예술명품 국제브랜드화 전략
신항섭(미술평론가)
국제질서가 국방력 중심에서 경제력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국방력이 지배하던 동서냉전시대가 끝난 뒤 세계는 가장 안정된 평화의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물론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국가 및 민족 간의 대립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거시적인 관점의 국제질서는 시장경제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경제중심의 패턴으로 옮겨가고 있다. 따라서 경제력이 국가경쟁력의 척도가 되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이처럼 경제력이 새로운 형태의 국제질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시대에서 국가의 이미지 및 비전은 아주 중요하다. 국제무역은 단순히 기업들의 경쟁이 아니라 국가 간의 경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가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국가의 이미지를 상품화하는 새로운 형태의 무역방식이 요구되는 시대인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비전이 명료하고 국가의 이미지가 좋아야만 무한경쟁체제의 무역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이와 같은 국제적인 질서에 따른 여건변화는 새삼 미술의 중요성을 되돌아보게 한다. 시각예술로서의 미술은 국가이미지를 개선하고 또 선전하는데 효과적이다. 대중적인 친화력이 높은 미술을 잘 활용하면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국가적인 이미지를 높일 수 있다. 문화예술을 통해 국가적인 이미지가 좋아지면 상품수출의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상품판매에 앞서 문화예술이 국가이미지를 개선하는 첨병역할을 한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미술은 무역전쟁에서 보이지 않는 첨병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수준 높은 미술작품이 국가적인 이미지와 결부된다는 것은 미술사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위대한 화가들의 경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피카소’하면 곧 스페인이 떠오르고, ‘세잔느’는 프랑스, ‘렘브란트’와 ‘고흐’는 네덜란드, ‘레핀’은 러시아, ‘워홀’은 미국을 연상케 된다. 이는 곧 위대한 화가, 위대한 예술이 국가이미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실례의 하나이다. 국제적인 성가를 지닌 미술가를 배출함으로써 국가이미지가 사람들의 뇌리 속에 자연스럽게 각인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예술가 개인의 가치가 때로는 국가이미지보다 더 높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눈으로 한국을 보자. 한국을 상징하는 미술가는 누구인가. 생각할 필요조차 없이 비디오아트를 창시한 백남준이다. 백남준이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외국무대에서 활동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백남준이 미국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한국인이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그는 엄연히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인의 핏줄을 지니고 있는 토종 한국인이다. 백남준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백남준 개인이 이룩한 예술적인 성취는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장르의 창시자로서 세계미술사의 지평을 넓혔다는 데 있다. 비디오아트를 미술로 편입시킨 데 대한 그의 공로는 그 어떤 찬사로도 부족하다. 세계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백남준의 존재만으로도 한국의 현대미술 수준은 저절로 상승한다.
국가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백남준의 존재는 한국의 상징적인 인물일 수 있다. 그의 예술적인 천재성이 전자문명사회를 가장 명쾌하게 집약한 새로운 형태의 조형개념을 제시함과 동시에 과학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은 놀랄만한 일이다. 어쩌면 21세기 IT산업의 선두주자 대열에서 선전하고 있는 한국의 전자과학을 얘기할 때, 백남준이라는 창조적인 예술가의 존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이렇듯이 백남준이 이룩한 놀라운 예술적인 성취, 즉 비디오아트야말로 다름 아닌 한국의 국가브랜드나 다름없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는 한국의 국가이미지를 세계에 알리는 데 첨병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백남준과 함께 국가브랜드로서 활용할 수 있는 화가는 한국의 민속 및 무속을 강렬한 원색적인 이미지로 용해시킨 박생광을 비롯하여, 세련된 색채 및 조형감각으로 한국적인 정서를 추상 및 반추상적인 이미지로 요약해낸 김환기, 선과 점이라는 조형적인 기본 요소를 동양철학에 접목시켜 현대적인 이미지로 재해석해낸 이우환, 한지를 이용하여 만든 다면입방체를 집적하여 평면과 입체를 교묘히 결합하는 전광영, 그리고 한지 위에 유채로 모필의 형태를 극렬히 묘사함으로써 동서양의 정서를 교직한 이정웅 등이 국가브랜드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화가들이다.
박생광은 구체적인 형태묘사에 치우친 전통적인 채색화의 형식에서 탈피하여 해체와 재해석 그리고 구성이라는 방법을 통해 한국의 민속적이고 무속적인 제재를 선명히 부각시키고 있다. 강렬한 발색의 원색으로 상징되는 색채이미지는 음양오행사상에 근거하는 오방정색을 따른다. 원색적인 색채이미지는 다혈질적이고 진취적인 한국인의 성정을 반영하듯이 잠재된 욕망의 분출을 자극한다. 원색적인 색채이미지 속에 녹아든 생명의 기운을 확산시키면서 한국인의 의식 속에 침윤된 무속적인 흥취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독특한 색채배열 및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초월한 치밀한 복합구성은 현대회화로서의 요건을 충족시킨다.
김환기는 초기에는 인물, 항아리, 달, 매화, 새 등을 간결한 선과 평면적인 색채로 요약한 모던한 구상작품이었다. 유채화임에도 간명한 문인화적인 조형개념을 도입, 농후한 한국적인 정서의 발현이라는 평가였다. 그러다가 점차 형태를 소거한 순수추상으로 진입하여 점과 선과 색채에 의한 평면구성으로 변화하면서 종국에는 점의 집합이 만들어낸 서정적인 순수추상으로 압축된다. 간결한 선과 농익은 색채가 조합해낸 세련된 조형미는 서구의 작가들에게서 볼 수 없는 동양적인 정서 및 정신세계를 반영한다. 무엇보다도 시각적인 아름다움 너머에 존재하는 정관적인 동양정신의 아름다움을 세련된 조형미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우환은 점과 선이라는 조형적인 기본 요소를 조형언어로 채택함으로써 현대회화의 영역으로 가뿐히 진입했다. 이는 동양철학, 즉 음양사상을 골격으로 하는 새로운 개념의 미학적인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천지가 요변하는 우주현상도 점 하나가 움직임으로써 시작된다는 원리에서 출발, 캔버스에 가공하지 않은 순수한 형태의 점이나 선을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하얀 캔버스에 들어서는 점이나 선은 그 자체로 완전한 조형언어로서 동양적인 사유의 흔적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의 작품은 정련된 현대미학의 핵심을 가장 심플하면서도 명료한 이미지로 구현하고 있다.
전광영은 한지를 사용하는 전통적인 목판본의 서책을 이용하여 크고 작은 다면입방체를 만든 다음, 이를 치밀하게 조립하는 방식으로 물체의 집적에 의한 장엄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연출한다. 사각평면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극복하면서 시각적인 이미지를 무한공간으로 확장할 수 있는 조형어법은 획기적인 발상이다. 크고 작은 무수한 다면입방체에 리듬과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집적체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시각적인 질서는 가히 충격적이다. 색채 및 형태가 아닌, 특정의 물체가 집적하여 이룩한 정연한 질서의 미학은 형태를 기반으로 하는 일루전과는 또 다른 조형미의 발현이다.
이정웅은 수묵화의 도구인 모필, 즉 동양회화의 붓을 표현대상으로 채택하고 있다. 여기에서 붓은 단순한 그림의 소재라는 입장에서 벗어나 수묵으로 형태를 형용하는, 행위의 주체로서의 입장으로 바뀐다. 따라서 붓의 행위 그 흔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모필의 무한한 표현력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캔버스 대신에 한지를 소지로 설정함으로써 서구적인 조형개념과는 다른 입장임을 천명한다. 실제로 한지 위에 놓이는 극렬한 묘사의 모필과 선명하고 호쾌한 수묵의 흔적은 동적인 이미지와 정적인 이미지의 동거라는 기묘한 관계를 설명하는데 부족하지 않다. 동양의 정신성을 서구적인 형태미학 위에 꽃 피운 강렬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인상적이다.
이상의 몇 작가의 작품은 국가브랜드의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조형적인 특징을 갖추고 있다. 다시 말해 이전의 작가들이 탐색해내지 못한 독창적인 조형언어 및 어법을 수립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에 나타나는 이미지의 선명성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깊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요인이다. 한두 번 보는 것만으로도 기억될 수 있는 이미지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적인 정체성을 살리면서도 동양적인 사상 및 철학 그리고 전통적인 가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국가브랜드로서 활용할 소지가 많다.
이처럼 한국적인 정신 및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국가와 민족을 초월해 순수한 미술작품으로서의 호감도, 즉 보편적인 조형언어로서의 가치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행히도 이들의 작품은 보편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미지가 복잡하지 않고 선명하다. 더구나 난해하지 않은 친근한 언어로 되어 있다. 전광영의 작품처럼 추상적인 이미지의 경우에도 결코 복잡하다거나 조잡하지 않고 다만 명석하고 명쾌하다. 극렬한 사실묘사의 이정웅의 작품 또한 진부하다거나 구태의연하지 않고 오히려 현대적인 느낌이 강하다. 이우환의 경우에도 극단적일 만큼 심플한 이미지임에도 결코 허전하지 않은 것은 내적인 울림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들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국가브랜드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는 몇 가지 요구사항이 있다. 첫째, 조형적으로 독창적이어야 한다. 어느 곳에서도 본 일이 없는 진정한 창작이어야 한다. 둘째, 이미지가 선명해야 한다. 즉 형태로든 색채로든 작품과 마주치는 순간, 시선을 떼지 못할 만큼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심플해야 한다. 강인한 인상을 남기려면 가능한 한 간단명료한 이미지가 효과적이다. 넷째, 한국적인 정체성이 담겨야 한다. 한국적인 정서 및 전통적인 가치를 반영, 한국을 연상할 수 있는 이미지여야 한다.
위에 예시한 작가들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네 가지 조건에 합당하다. 그렇다면 이들 작품을 어떤 방법으로 국가브랜드에 활용할 것인가. 우선은 이들 작가의 작품에 대한 국제적인 인지도를 높여야 한다. 즉, 다양한 형태의 정부 및 민간 채널을 통해 외국 유수의 미술관 전시를 추진해야 한다. 또한 국제적인 비엔날레와 아트페어를 통해 지속적으로 이들의 작품을 노출시켜야 한다. 해외 아트페어의 경우에는 비용을 들여 특별전이나 대형부스를 마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물론 이러한 방법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소요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는 국가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한 선투자라고 할 수 있다. 경제력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의 경우, 위대한 예술가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타고난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마당을 마련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달리 말하면 천재는 만들어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위에 예시한 작가들이 국제적인 성가를 얻기 위해서는 치밀한 계획 아래 국가적인 차원의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단순히 작품의 상품적인 가치를 높이는 일뿐만 아니라, 한국예술가의 우수한 예술적인 자질을 널리 알리는 일에 투자를 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한국을 상징하는 스타작가를 만들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국제사회에 노출 빈도가 높은 한국의 유명상품의 이미지로 사용하는 일이다. 가령 자국항공기라든가, 자동차 및 TV, 패션, 휴대전화기, 그리고 관광상품의 개발 등 다양한 상품의 이미지로 활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인지도를 높여갈 수 있다. 그리하여 이들 작품의 국제적인 인지도가 높아지면 상품의 예술적인 이미지 또한 높아질 수 있는 것이다.
< 이 글은 2009년 9월18일 강원도 춘천 산토리니에서 열리는 한국문화예술포럼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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