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45) - 다양화의 길로 가는 한국미술

펜보이 2010. 3. 17. 10:18

미술신문 칼럼

 

다양화의 길로 가는 한국미술

 

신항섭(미술평론가)

 

남녘으로부터는 꽃소식이 연이어 올라오고 있다. 제주도를 시작으로 남쪽 섬들을 거쳐 육지로 거침없이 북상하는 꽃소식은 유난히 추웠던 지난겨울 탓인지 반갑기 그지없다. 서울에서도 양지에 뿌리를 내린 산수유는 벌써부터 꽃망울을 노랗게 물들이며 힘껏 터뜨릴 날을 고대하고 있다. 겨울 뒤에 오는 봄맞이는 부산스러울수록 좋다. 그러기에 온천지를 갖가지 꽃들로 수놓으며 한바탕 흐드러지게 꽃 잔치를 벌이는 것이리라. 꽃 잔치는 그 종류가 많을수록 시각적인 즐거움을 커질 수밖에 없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는 옛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다. 근래 봄날 꽃 잔치는 갖가지 화려한 색깔과 모양을 뽐내는 외래종의 증가로 더욱 풍성해졌다. 그래서 세상이 더욱 밝아지고 있다는 인상이다.

보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 다름 아닌 시각예술로서의 미술이다. 그러기에 가능하다면 다채롭고 풍성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이 이상적일 수도 있다. 기존의 표현양식이나 형식을 따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조형성을 추구하는 것이 창작의 윤리성이기에 그렇다. 기존의 조형적인 질서를 깨뜨리고 무언가 새로운 조형적인 언어 및 어법을 강구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작활동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미술계는 오랜 동안 전통적인 표현양식이나 특정의 방법론 및 화풍에 안주하는 분위기였다. 그러기에 창의적인 발상이나 도전의식이 팽배한 작품을 보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 전통회화의 경우에는 전래의 화법에 안주하거나 스승의 화풍을 답습하는 도제방식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미술대학에서조차 학교마다 특정의 미술사조만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듯싶은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작품만 보면 어느 학교 출신인지를 알 수 있을 정도라는 얘기가 나돈다. 이는 대학미술교육이 교수중심의 획일적이고 피동적이며 일방적으로 일관해 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바꾸어 말해 창의성을 부추기는 미술교육을 외면해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화단은 아주 단조로운 미술지형을 보여줄 뿐이었다. 전통회화의 경우에는 문인화를 포함하여 관념산수와 실경산수, 채색화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이 범위를 벗어나는 작품을 찾아보기 힘들다. 더불어 서구미학과의 접목을 통해 추상이나 비구상 작업 등 일련의 실험미술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폭은 역시 지극히 협소하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양식만으로 한국 전통미술의 전체를 수렴할 수 있는 지경이니까 말이다.

물론 서양에서 유입된 미술도 이러한 양상으로부터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구상회화의 경우에는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 인상주의가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간혹 초현실주의 정도가 간간히 모습을 드러낼 따름이다. 추상회화에서는 좀 더 다양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 역시 특정의 표현양식 및 형식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역시 대학교육의 획일화와 무관하지 않다. 미술대학마다 교수의 성향에 따라 특정의 표현양식이나 방법론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았다. 적어도 특정 양식을 따르라고 강요는 하지 않을지언정, 무언가 색다른 표현, 기발한 아이디어가 진작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저 교수의 화풍을 좇거나 지시를 따라야만 학점관리에 유리하다는 안일한 사고가 만연했다.

이런 학교분위기는 발랄한 청년기의 열정과 창의성을 심각히 저해하기 마련이다. 즉 조형적인 상상력을 빈곤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창의성을 장려하지 않는 미술교육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한국미술계 전반이 전통에 안주하거나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처럼 협소한 시각에 갇힌 미술교육으로는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창의적인 조형세계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고무시킬 수 없다. 자신도 모르게 타성에 젖거나 고정관념에 얽매임으로써 자유로운 조형세계를 유영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우리의 경우와 달리 이웃 일본은 너무도 다양한 미술양식 및 형식이 존재한다. 누가 뭐라고 하던지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작업이라면 표현양식이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뜻을 펼치는 일본화단의 분위기야말로 창작의 본령이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게 해준다. 전통적인 표현양식만 하더라도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보이는 사실에 의탁하여 재현성을 강조하는 작업을 포함하여 추상과 반추상, 그리고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이며 만화적인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몇 가지 표현양식으로는 분별할 수 없을 만큼 그 폭이 넓다. 따라서 일본의 미술지형은 다양하고 다채로워 일본작가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타의에 의해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를 견지함은 물론이려니와 오직 자신의 신념에 의지할 따름인 것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미술계의 지형도 크게 변하고 있다.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2000년대 이전과는 완연히 다른 양상이다. 그 동안 한국미술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인물화였다. 사실주의나 인상주의 화풍에서 인물화는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재현적인 미술에서 인물화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그림을 배우는 과정에서 인체소묘는 가장 기본적인 기술이기 때문이다.

서구미술에서 인체소묘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인체소묘를 통해 묘사기술과 더불어 무엇보다 중요한 비례감각을 터득하는 것이다. 비례감각이야말로 형태의 변형 및 왜곡에서 가장 중요한 조형적인 요소이다. 또한 동적인 존재로서의 인체소묘에 익숙해짐으로써 그 무슨 소재든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기술 및 감각을 갖추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미술교육은 대학입시를 위한 석고데생만으로 소묘교육이 끝나고 만다. 대학에서 소묘교육은 학교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거의 무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기에 미술대학을 마치고도 비례가 맞는 인물화를 제대로 그릴 수 없는 반쪽 화가가 되고 만다. 이는 한국미술이 안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이다. 한국미술에 다양성이 부족한 근본적인 원인 또한 다름 아닌 인물화의 취약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2000년대에 접어들어 대학에 교수평가제도가 도입되면서 교수중심의 일방적인 교육방식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제는 대다수의 미술대학이 학생 개개인의 창의성을 고무하고 진작시키는 방향으로 개선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학생 개개인의 의지에 따르는 자율성을 중시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이와 같은 교육방식의 개선은 미술현장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최근 극사실적인 회화라든지 인물화를 제재로 한 작업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추세가 변화를 실감케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미술대학을 제외하고는 대학에서 인체소묘 수업을 강화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자신의 취향이나 재능 그리고 조형적인 이념과 상관없이 교수의 화풍 또는 이념을 따라야 했던 이전과 달리 스스로의 재능에 의해 인물화를 택하는 경우가 크게 늘고 있는 듯싶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극히 일부 미술대학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인체소묘를 중요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적지 않은 미술대학이 새삼 인체소묘의 중요성을 되돌아보는 상황으로 점차 바뀌고 있다. 일부 미술대학은 인체소묘 강좌를 신설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어쩌면 최근 한국화단에 인물화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은 중국현대미술의 영향도 그 하나의 원인으로 꼽을 수 있는지 모른다. 중국현대미술은 인물을 제재로 하는 경우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기에 그렇다. 인물의 형태를 변형하거나 왜곡시키는 방법으로 풍자적이고 해학적이며 은유적인 내용을 담는 중국현대미술을 보면서 젊은 작가들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자극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근 구상회화 전시회에서 간혹 정확한 인체소묘에 바탕을 둔 인물화가 눈에 띈다. 이들 인물화는 러시아 및 동구권 그리고 중국 등에서 배운 아카데미학파의 영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부터 러시아로 유학을 떠난 일단의 작가들의 숫자가 적지 않은데, 이들이 그 중심에 있다. 아직 대세를 주도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인체해부학에 근거한 정확한 인물화에 대한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최근 각종 아트페어를 포함하여 미술관이나 화랑의 기획전 그리고 군소 그룹전을 보면 2000년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기발한 아이디어를 적용한 신선한 작업이 급증하고 있다. 특히 20-30대의 신세대 작가들의 작품은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재료의 다양성, 방법의 새로움, 폭 넓은 제재 등 그 어느 나라 현대미술보다도 폭이 넓다. 이제야말로 타고난 미적 감수성 및 손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즉 조형적인 상상력이라는 점에서 절대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무대가 열려 있다는 생각이다.

이들 신세대 작가들의 인물을 제재로 하는 일련의 새로운 경향의 작품은 아카데믹한 정확한 형태미보다는 내용 중심으로 전개된다. 즉, 부분적인 형태의 왜곡이나 변형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주력하는 것이다. 더러는 비례를 무시한 듯싶은 작업도 없지 않으나 아이디어 또는 내용을 소화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어쨌든지 젊은 세대들에 의해 전개되는 새로운 형식의 인물화는 한국화단의 지평을 넓히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기반으로 하여 한국미술은 보다 다채롭고 풍요로운 진정한 르네상스시대에 돌입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미술신문 제435호(2010년 3월10일자)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