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5년, 캔버스에 유채, 180x241 cm, 브뤼셀 왕립미술관
명작 명품 세계 순례 - 야곱 요르단스
‘豊穰(풍양)의 寓意(우의)’
17세기 플랑드르는 회화의 황금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크 회화 양식의 정수로 꼽히는 루벤스를 정점으로 그의 제자 반 다이크, 그리고 동료인 요르단스라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플랑드르의 3대 화가’라고 부르는 데서도 그 비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안트워프 태생인 야곱 요르단스(1593-1678)는 의심할 수 없는 타고난 재능의 화가였음에 분명하지만 만일 루벤스가 없었다면 과연 그만한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좀처럼 떨치지 못한다. 루벤스는 요르단스가 끝내 벗어날 수 없을 만큼 큰 그림자였다. 직접 배우지는 않았어도 그의 작품세계 도처에서 그 영향이 감지되고 있기에 그렇다.
요르단스의 스승 아담 반 노르트는 당시 안트베르펜의 영향력 있는 화가였다. 하지만 요르단스는 루벤스가 두각을 나타내자 거기에 쉽사리 감화되고 만다. 1615년 스승으로부터 독립하고 이듬해 스승의 장녀와 결혼한 요르단스는 그로부터 6년 뒤 안트베르펜 화가 조합장으로 선출된다. 그의 초기 작품은 루벤스의 초기 양식을 따르는 형태였다. 그런가 하면 당시 곳곳에서 유행하던 카라바지오의 화풍에 감염된 흔적도 보인다. 그가 그림을 시작할 무렵에는 역사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도 예외없이 신화화, 우의화, 종교화, 초상화, 장식화 등 을 섭렵하면서 입지를 넓혀 가게 된다.
루벤스가 죽은 뒤 안트베르펜의 실질적인 일인자가 된 그는 더욱 의욕적으로 작업, 농민 풍속화라는 분야를 통해 비로소 독자성을 실현한다. 그가 개성을 발휘한 농민 풍속화는 粗野(조야)하고 토속적인 인상이 강하다. 농민들의 축제 및 축연을 소재로 하는 그림이 많은 것도 인물들의 야성적인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의 기쁨을 만끽하며 향락적인 분위기에 들떠 있는 시민들의 숨김없는 감정을 훑어내는 감각적인 터치는 시각적인 즐거움으로 넘친다.
이처럼 인물 해석에서 이탈리아적인 이상미와 다른 표현을 하게 된 것은 아마도 유학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실제로 인물들의 표정이나 자세는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쏟아내는 인물들의 모습에서는 토속적이고 민족적인 성향의 체취가 강하게 풍길 따름이다. 이러한 경향은 루벤스가 죽은 후 더욱 드드러진다. 루벤스와 분명한 선을 그으려는 작가적인 자존심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豊穰(풍양)의 寓意(우의)’는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기의 작품으로 그만의 조형적인 감각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복잡한 구성이며, 도무지 조심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활기차고 역동적인 인물들의 표정 및 자세와 그로부터 야기되는 현실적인 분위기는 바로크 회화의 전형이다.
과실의 여신 포모나(뒷모습의 누드)를 중심으로 양의 하체를 가진 사티로스와 님프 등이 한데 어우러져 풍요로운 결실을 감사하며 신에게 공물을 봉헌하는 정경인데, 의도적으로 등돌린 여체의 구도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등을 돌림으로써 포모나가 차지하는 화면 비중이 커지는 시각적인 효과를 노린 것은 아니었을까. 만일 다른 인물들처럼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면 구성적인 긴장감이 한층 느슨해졌으리라. 실제로 등과 허리, 둔부 그리고 하체 가득히 쏟아지는 풍요의 빛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이다. 현실 상황을 읽듯이 명료하게 그리로 사실적으로 서술하는 그의 묘사력은 달관이다. 어디 한군데도 미진함이 없는 정확한 표현력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바로크 회화의 중심으로 밀어 넣고 있다. 왼쪽 상단의 과일과 채소는 다른 화가에 의해 그려진 것이 아닐까 하는 시각도 있다. (미술평론가 신항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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