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감상

명화감상 (6) - 아니발레 카라치

펜보이 2008. 3. 22. 12:39
 

                                 

                                1592년, 캔버스에 유채, 401x226cm, 파리 루브르미술관

 

  명작명품 세계순례 - 아니발레 카라치

 

 “성 루카의 성모 ”    


  전대미문의 저 화려했던 르네상스 회화의 영화도 매너리즘의 출현과 함께 마침내 종언을 고하게 된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영광은 곧 이탈리아 회화의 위대한 승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17세기 이탈리아 화가들은 바로크라는 새로운 양식을 통해 르네상스의 전통을 이으려고 한다.  여기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볼로냐파 화가들이었다.  이들은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르네상스 회화를 절충한 듯한 새로운 표현형식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매개 역할을 한다.  볼로냐 지방의 카라치 일가 즉, 로도비코 카라치를 중심으로 그의 사촌인 아고스티노와 아니발레 형제에 의해 이른바 절충주의라는 르네상스 회화의 새로운 해석이 기초가 되어 이탈리아 바로크 회화의 기틀을 확립하게 되는 것이다.

  카라치 일가 중에서 아니발레 카라치(1560-1609)는 막내이면서도 명성에서는 형들을 능가한다.  그보다 다섯 살 위인 사촌형 로도비코에 의해 재능이 일깨워진 아니발레는 철저한 사실주의에 대한 이해를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다.  이러한 시각은 파르마파의 대가 코레지오의 화풍에 심취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일 라파엘로는 그의 내부에 또하나의 스승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면서도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두 화가의 장점을 고루 받아들이는데 주저치 않았다.

  그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595년 파르네제 추기경의 초청으로 로마에 가서 파르네제궁 천장화를 제작하게 된 이후였다.  2년에 걸쳐 완성된 ‘헤라클레스의 이야기’의 성공적인 제작에 힘입어 다시 갈레리아 장식이 맡겨졌는데 이때는 두 형과 함께 작업했다.  그는 이미 볼로냐라는 지방도시의 작가가 아니었다.  벽화에 관한 한 당대에는 그를 능가할만한 작가가 없을 만큼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17-18세기에 그의 벽화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이을만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는 볼로냐에 있는 동안 형들과 미술학원인 아카데미 데이 인카미나티를 창설하여 회화의 역사를 비롯하여 이론, 실기, 해부학, 원근법 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론에 너무 철저하여 시대감각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일부의 비판이 따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레지오의 후기 양식을 받아들여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바로크 회화의 출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그의 공로는 어떠한 비판에도 퇴색하지 않는다.  특히 힘찬 구도와 따스한 색조의 제단화와 대규모의 천장화에서 보여주는 장려하고도 공상적인 화면 구성은 그의 명성을 한껏 부채질한다.

  “성 루카의 성모”는 작가적인 역량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로마에 진출하기 전에 제작된 이 작품은 현실과 이상을 조합한 특이한 공간 구성을 통해 환상적인 이미지를 추구한, 작가적인 상상력이 돋보인다.  볼로냐에서 활동한 시기에 완성된 그의 작품세계는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코레지오를 중심에 세우는 북이탈리아 회화의 전통과 결부된 자유로움과 대담한 표현으로 압축된다.  고전적인 엄격함을 견지하는 가운데 인물에 부여하는 고대조각의 이미지는 그의 또 다른 특징으로 파악된다.  성 루카를 전면에 배치하고 성 카타리나를 뒤쪽으로 둠으로써 공간적 구성의 틀을 다진 뒤, 화면 상단에 성모자상을 얹어 미묘한 공간감을 이끌어내는 자유로운 발상이 인상적이다.  이처럼 현실과 이상이 하나의 공간에 자리함에도 불안정하지 않은 것은 견고한 구성과 전체적인 이미지를 통일시키는 화면 장악력의 소산이다.  무엇보다도 인물들의 동적인 표현과 풍부한 공간감 그리고 밝고 따스한 색조는 초기 바로크 장식화의 한 표본을 보는 듯하다. <미술평론가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