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감상

명화감상 (4) - 로베르 캉팽

펜보이 2008. 2. 28. 23:20
 

        

         1425-35년경, 판 위에 유채, 64.1x63.2cm,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명작명품 세계 순례 - 로베르 캉팽

 

  수태고지


 

 일반적으로  ‘유채화의 선구자’라고 하면 반 아이크형제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이제 바뀌어져야 할지 모른다.  지금껏 ‘프레말의 화가’라고만 불려온 이름없는 플랑드르의 화가가 로베르 캉팽이라는 사실이 거의 굳혀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만일 프레말의 화가가 캉팽인 것이 확실하다면 미술사의 시계로는 캉팽이 반 아이크 형제를 앞선다.  따라서 거의 탓할 데 없는 유채화를 남긴 캉팽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한 것이다.

  ‘프레말의 화가’ 즉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1378-1444)은 초기 플랑드르 회화를 성립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반 데르 아이덴의 스승으로서 반 아이크에 비견되는 화가로 인정될 만큼 뛰어난 사실 묘사와 선명한 색채를 구사, 초기 유채화의 정착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그가 언제부터 유채화를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420-25년 작품으로 알려진 ‘벽난로 앞의 성모상’(런던 국립미술관)이 템페라와 유채를 혼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를 전후해서 유채화의 기법을 숙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프레말의 화가’라는 이름은 프랑크푸르크 시테델미술관 소장품으로, 리에주 근교에 위치한 프레말 수도원에서 가져온 ‘프레말 수도원 제단화’의 이름을 그대로 작가명으로 사용한 데서 비롯된다.  캉팽의 그림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은 몇 점 밖에 없는데, ‘그리스도의 탄생’(디종 보자르미술관), 여기에 소개되는 ‘메로드의 제단화’ 등이 유명하다.

  “受胎告知(수태고지)”는 ‘메로드의 제단화’의 가운데 작품으로 성경을 읽고 있는 마리아에게 천사가 그리스도의 잉태 사실을 알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三連畵(삼연화) 형식의 이 작품에서 오른쪽 패널의 그림에는 요셉이 무언가를 만들고 있고, 왼쪽 그림에는 봉헌자로 보이는 부부가 가운데 그림 쪽을 향해 열린 문 앞에서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처럼 그림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후기 고딕 회화와 다를 바 없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현실에 입각한 치밀하고도 구체적인 사실묘사와 중간색조의 미묘한 변화, 부드럽고 온화하며 명확한 명암처리, 그리고 지나친 점이 있으나 원근법적인 공간 등에서 캉팽 이전의 경향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혁명적인 조형성을 실현하고 있다.

  더구나 이전의 국제화된 양식의 그림이 대부분 귀족적이었다면 이 그림에서는 돌연 평범한 시민의 가정으로 옮겨간다.  그림 속에 묘사되고 있는 소재들, 즉 물그릇을 비롯하여 수건, 백합과 꽃병, 촛대, 의자 등 15세기 플랑드르 보통 가정의 실내 정경임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이들 정물 소재들은 대부분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가령 백합은 마리아의 순결을 말하며, 壁龕(벽감)에 걸린 물그릇과 수건은 마리아에게 바치는 청결한 공물을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불꺼진 벽난로는 요셉의 순결을 상징한다.  뿐더러 일부 학자들은 긴 의자를 천상의 옥좌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시각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림의 정물들은 플랑드르의 평범한 가정의 가구로 보아도 좋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탁자 위의 방금 꺼진 촛불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보다 중요한 것은 원근법에 의한 실제적인 공간이라든가, 명암에 의한 조각적인 표현, 미세하게 처리된 중간색조의 변화 등 조형적인 새로움이다.  특히 현실성을 결정짓는 요건, 즉 ‘무한의 깊이와 안정성, 연속성, 완전성을 갖춘 공간적 세계로 파고드는’ 조형감각은 이전의 누구도 깨닫지 못한 개별적인 세계이다.  더구나 밝고 선명한 이미지의 채색기법은 템페라에서 구하지 못한, 유채라는 새로운 매재를 통한 조형의 혁신이라 할만 하다.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