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구상미술의 현재와 전망
신 항 섭(미술평론가)
세계는 지금 새로운 세계질서 개편을 위한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 놓여 있다. 각 국가 간의 이익과 결부된 일체의 무역장벽을 제거하고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새로운 경제 질서로 세계를 통합하자는 것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선진국들이 주장하는 세계화의 개념은 바로 여기로부터 시작된다. 눈부신 정보기술의 발달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 질서란 결과적으로 세계시장을 단일화하는 것이다. 세계시장의 단일화는 금융지배구조의 경제체제를 의미한다. 이러한 개념의 세계화라면 거대금융자본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 경제체제에 의한 세계의 통합 및 단일화는 필연적인 귀결이다. 세계화의 이면적인 진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 세계는 미국이라는 거대 경제 국가를 정점으로 하는 일극체제를 굳힌 상태이다. 그러므로 경제의 세계화는 미국의 뜻대로 이행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치와 문화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과거 동서냉전시대에 한 축으로 자리했던 러시아가 개방 이후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된 시점에서 성공적인 개방정책의 결실로 급속한 경제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있는 중국이 미국에 대응하는 새로운 정치적인 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물론 현재 세계 속에서 중국의 정치적인 입지는 경제성장과 맞물려 있다. 즉 미국이 중국경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현재로서는 중국의 정치적인 대응력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중국은 정치적으로는 미국의 잠재적인 라이벌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의 독주체제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중국이 바로 동북아시아에 자리하고 있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인접하면서 근대화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미쳐왔다. 그러나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체제로 가면서 중국과 한국은 반세기 동안 절연된 상태에 있었다. 중국이 1980년대 초 개방정책을 전개하면서 한국과 다시 밀접한 관계를 지속하게 되었다. 중국의 동북아 무대로의 정치적인 복귀 및 급속한 경제적인 성장은 이 지역 세력 균형에 새로운 변수가 생기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급변하는 변화의 물결 속에서 한국과 같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실질적인 독립이 불가능한 경우 어떻게 세계화의 물결에 대응할 것인가. 그렇다. 이렇듯이 세계화가 한국의 선진국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진대, 생존전략으로서 어떤 대응책이 있어야 한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야는 문화예술뿐이다. 다시 말해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전통예술 및 문화에 대한 민족적인 자각이라는 역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세계화의 과정에서 민족주의는 필연적인 선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제 및 정치 군사력 등에서 독립적인 위상이 불가능한 현 상태에서는 민족적인 정서와 관련된 전통 문화 예술에 대한 재인식과 그에 따른 행동은 필연적인 일이다. 어쩌면 전통문화 예술이야말로 세계화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 독립적인 민족 및 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인지 모른다.
세계화가 예정대로 성공을 거둔다면 미국이 모든 면에서 세계를 완전히 지배하는 상황이 올지 모른다. 경제적인 예속은 궁극적으로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예속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세계 모든 나라는 미국에의 종속적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거대 자본을 바탕으로 한 미국의 대중문화가 세계 젊은이들을 열광시키고 있는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미국의 대중문화가 무서운 기세로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형태의 세계문화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막강한 경제력의 산물이다. 미국의 대중문화의 예가 아니더라도 금력이 문화 예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세계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을 포함한 중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한자와 불교 및 유교적인 전통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서적인 유사성이 많다. 이러한 공통성은 서구의 이성에 바탕을 둔 합리주의에 대응할 수 있는, 자연과의 친화적인 삶을 이상으로 여기는 동양적인 가치를 통해 서로 간에 결속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서구중심의 세계질서에 대응하면서 동양의 문화적인 전통을 이어갈 수 있는 통일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 길만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문화의 종속화를 막을 수 있는 대안이다. 문화적인 전통을 살려나가야 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오직 민족의 영원성을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동양 삼국 즉,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구상미술은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는가.
먼저 중국미술계를 보자. 중국에서 유화는 유럽화가들에 의해 청나라 말기부터 소개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20세기 초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 체류했던 작가들의 귀국과 때를 같이하여 본격화되기에 이른다. 1920-30년대 유럽 유학파들이 돌아와 학교에 자리 잡으면서 서양미술 기법 및 이론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당시에는 사실주의 기법을 비롯하여 인상주의 기법이 주류를 이루었다. 따라서 1940년대까지 사실주의 및 인상주의 회화뿐이었고 일부 야수파 기법의 작품도 출현한다. 그러다가 1950-6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련과의 관계가 밀접해지자 모스크바 및 상트 페떼르부르그 아카데미로 유학을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들 러시아내 아카데미는 서구유럽의 미술아카데미 교육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철저한 인체소묘 등 전통적인 기본기 교육에 충실하고 있었다. 구소련 아카데미에서 돌아온 작가들은 사회주의 이념에 따른 혁명 및 노동의 찬양이 일색인 이른 바 사회주의리얼리즘이 요구하는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렇듯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1980년대 초 개방하기 이전까지 중국 유화의 전체적인 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다가 개방화 물결을 타기 시작하면서 예술가들에게 점진적인 표현의 자유가 인정됨으로써 개인적인 이념이나 취향에 따른 작업이 묵시적으로 허용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부 작가들의 해외여행과 서구 현대미술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 가능해지자 추상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1990년대의 10년은 중국미술에서 가장 눈부신 변혁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처럼 짧은 기간 안에 지난 20세기의 100년 동안에 이룩해 놓은 서구미술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는 상황에서 풀려나자 온갖 경향의 미술이 일시에 중국화단을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발 빠른 서구 화랑들과 콜렉터들이 재능 있는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경향의 현대적인 작업에 관심을 갖고 수집하는 사례가 생기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일부 작가들은 서구 미술계로 진출하는 행운을 잡기도 한다. 아울러 1990년대 초반에는 해외 화교들 사이에서 중국내 서양화 작가들의 그림 수집 열풍이 불어 일부 작가들에게 기대하지 않은 부를 안겨주었다.
중국의 미술계는 지금 혼란스러운 양상이다. 추상회화가 이미 보편화되고 있는 가운데 설치미술은 물론이요, 하이테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현양식이 공존하고 있다. 지금 중국 미술은 직접적인 체제비판이 아니라면 그 어떤 형태의 표현에도 제한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극소수의 용감한 작가들은 은유 상징 암시 따위의 표현기법으로 체제 비판적인 작품도 내놓고 있다.
그런데 중국 미술계에서 주목할 만한 하나의 현상은 추상회화를 포함하여 서구의 현대적인 미술이 과연 희망적인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는 작가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체험한 서구 현대미술이 결국은 모방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기반성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반성은 중국이 무엇인가 하는 이른바 정체성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수천 년의 독자적인 미술양식을 가지고 있는 중국이 과연 그것이 아무리 시대적인 산물이라고 할지라도 서구 현대미술을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자기성찰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현대 중국의 현대미술은 실험적인 서구 현대미술에 신념을 가지고 있는 진보적인 성향의 작가들과 전통적인 표현양식을 추구하고 있는 작가들이 공존을 모색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중국작가들 대다수는 오랜 중국의 문화적인 전통 속에서 모든 문제의 해법을 찾아낸다는 분위기이다. 다시 말해 이웃 한국처럼 서구미술의 무비판적인 실험장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중국 구상미술계에서도 이러한 생각이 지배적이다. 중국 구상미술은 한마디로 무한한 가능성의 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구 현대미술을 받아들이는 시기가 늦었다는 사실이야말로 21세기를 맞이하는 중국 구상미술로서는 오히려 다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아카데미 교육에 충실해온 사실이 결과적으로 21세기 중국 구상미술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리라는 사실이다. 서구미술계가 추상 미술 이후 아카데미교육을 외면함으로써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중국에서는 소련과 마찬가지로 아카데미교육에 충실함으로서 변화하는 세계미술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된 셈이다. 즉, 아무리 시대에 따라 미적 감각이 바뀔지라도 예술성이라는 본연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 중국미술계는 기초가 견실한 작가들을 배출함으로써 서구현대미술이 부딪치고 있는 한계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대안이 되리라는 얘기다.
이러한 시각은 한국과도 인접하고 있는 유럽국가의 일원인 러시아 미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러시아 역시 사회주의 시절 전통적인 아카데미교육에 철저함으로써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어두운 시대를 벗어나 새로운 표현의 바다로 뛰어든 1980년대 말 개방 이후 현대미술에서 가속도가 붙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아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미술 자원(작가)의 보고로 주목받고 있다. 러시아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에 취해 온갖 현대미술이 난무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그러다가 90년대 후반기로 넘어가면서 1910대부터 193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세계 추상미술의 선도적인 역할을 했던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전통을 잇자는 자각이 싹트면서 서구현대미술과는 차별화의 길을 걷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이렇듯 아방가르드에 대한 애정은 정체성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기도 하다. 비록 1930년대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어두운 시대를 살아왔지만 그러한 역사적인 비극을 탓하기 전에 러시아인의 정서를 반영한 진정한 러시아미술을 회복하자는 자기성찰의 결과인 것이다.
러시아 구상회화는 러시아적인 조형개념, 즉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전통을 이어가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따라서 서구에서 풍미했던 갖가지 현대적인 조형어법을 일부 받아들이면서도 러시아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 새로운 조형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러시아 구상미술은 서유럽 및 미국의 현대적인 구상미술과는 다른 형식을 보여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러시아라는 대자연과 거기에서 살고 있는 러시아인의 삶의 방식을 주시하는 일이다. 이러한 자각은 미술이란 그것이 어떠한 양식 및 형식을 따르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배태한 풍토와 민족적인 정서에 의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 구상미술은 어디까지 와 있는가. 일본은 명치시대 말엽부터 이미 서구로 가서 서양미술을 공부했다. 사실주의가 끝나고 바르비종파에 이어 인상주의가 태동하고 있는 시기와 때를 같이하여 유학한 양화 1세대들은 일본으로 돌아와 학교와 학원 그리고 개인 화실에서 서양화 기법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문부성에서도 적극적으로 교과과정을 서구식으로 개편하는 등 이른바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적인 국가가 되겠다는 정책에 적극 호응한다.
그로부터 일본 양화는 거의 서구미술의 변화와 속도를 같이해 왔다. 하지만 일본의 현대미술은 모노파라는 동양사상에 기초한 독자적인 미술양식을 만들어내는 등 1960-70년대를 지나면서 점차 아시아적인 문화 전통에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런 한편으로는 젊은 급진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서구 현대미술을 재빨리 소개하고 또 받아들이는 민첩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한 현대미술의 빠른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구상미술은 작가 개개인의 창의성 및 취향에 따라 보다 넓은 세계를 지향하게 된다. 단적으로 말해 다양성을 하나의 특징으로 하는 구상미술이 전개되기에 이른 것이다. 사실주의로부터 인상주의 포비즘 큐비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 19세기말부터 20세기말에 이르는 과정에서 생겨난 온갖 형태의 미술양식이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다. 그만큼 일본 구상미술은 풍요롭다. 어느 미술양식이 우월하다는 식의 편협한 시각은 일본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일본미술 풍토는 무엇이든지 수용하고 또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 신식미술이니 구식미술이니 하는 따위의 분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병자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 다양성의 사회가 바로 일본 구상미술계의 참모습이다.
1백년 이상의 서양화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일본의 구상미술은 그 사이에 일본적이라는 양식적인 특징을 만들어내게 되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표현양식과 재료는 분명 서구에서 유입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1백 년 동안 일본적인 정서에 융화시킴으로써 서구의 미술과는 또 다른 형태의 미술양식으로 그 모양을 바꾸어낸 것이다. 일본화가 한국과 중국의 채색화에서 영향 받아 일본적인 독특한 정서를 가미한 독자적인 미술양식으로 변화시켰듯이 서양화 또한 일본적인 미술로 서서히 그 모양을 바꾸어가고 있는 것이다.
기교적인 높은 완성도와 치밀함 그리고 중간색조의 미묘한 변화를 즐기는 일본화의 한 특징이 서양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화 되어 가는 서양화의 모양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외래문화를 토착화시키는 일본인 특유의 정서에 의한 결과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렇다. 일본인은 외래문화를 배척하거나 맹목적으로 복제하지 않고 그 장점을 받아들여 일본적인 정서로 용해시킴으로써 일본화 하는 것이다. 나쁘게 말하자면 모방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보면 철저한 모방에서 재창조로 결말을 짓는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어차피 문화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문화는 다른 민족적인 정서와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문화로 모양을 바꾸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생물과 같은 문화의 한 속성이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변화해 간다는 뜻이다. 일본인에게는 바로 그러한 독자적인 문화의 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본 구상미술은 서구 어느 나라와도 분명히 구별되는 어떠한 특징을 실현하고 있다. 아직 그러한 특징을 하나의 명칭으로 요약하기는 어려운 단계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일본 서양화는 일본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독자적인 정서로 채워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상에서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듯이 한국을 제외한 중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까지 자국의 전통문화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전통문화는 이제 단순히 민족적인 정서의 발현이라는 소박한 입장에서 벗어나 민족의 정체성 및 민족의 미래까지도 책임져야하는 시대적인 요청 앞에 놓여 있다. 한 민족의 예술은 민족적인 정서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민족의 생존은 독자적인 전통문화와 결부되어 있다. 지구가 하나의 촌락 개념으로 통합되어 가는 현실에서 민족의 존재성 및 정체성 그리고 생존은 전통문화를 통해서 보장받을 수 있을 따름이다. 국제화 또는 세계화는 한국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한국은 단지 세계화를 위한 하나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지나치게 비관적인 자기비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는 보이지 않는 세계화의 본질적인 얼굴이다. 세계화를 아무리 낙관적으로 볼지라도 한국은 주인공이 아니라 고작해야 그 주변의 역할에 그치고 말 것이다. 세계화의 중심이 된다는 것은 단지 한국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전통문화의 중요성은 바로 민족의 생존문제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미술 또한 전통문화라는 차원에서 이해되고 또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러시아, 중국, 일본의 미술현장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미래지향적인 이들 인접 국가의 미술활동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그들이 민족적이고 전통적인 정서에 시선을 돌리고 있는 이유는 세계화의 길에서 독자적인 생존의 길을 모색하는데 있다.
<2000년10월 목우회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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