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25) - 변화하는 세계미술의 흐름

펜보이 2007. 10. 7. 09:31
 

변화하는 세계미술의 흐름


그 중심에 중국이 있다.

 

신항섭(미술평론가)

 


미술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평면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예견된 일이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정보화시대의 한 특징인지 모른다. 새로운 미술양식이 출현하여 전 세계적으로 파급되는 기간이 3-5년 정도로 보았다. 적어도 20세기말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인터넷이 생활화되기 시작한 21세기로 들어서면서 이러한 기간설정이 무색해지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반대쪽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인 것이다. 그러기에 모든 분야에서 이제 지역간의 시간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욕에서 새로운 형식의 미술이 등장하여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 불과 몇 달 후면 서울에서도 비슷한 작품이 등장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세계가 지구촌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묶어놓은 인터넷은 가히 정보통신의 일대혁명, 아니 인류사회의 대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빠른 정보의 전달은 기존의 생활양식 및 방식은 물론 우리의 사고체계마저 바꾸어놓고 있다. 20세기가 아날로그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진정한 디지털시대인 것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는 그야말로 천지간의 차이에 비유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정보량의 차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속도가 빨라진 것은 고사하고라도 정보량에서 아날로그 개념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폭발적인 확장을 가져온 것이다. 정보량으로 말하자면 CD 하나에 수십 권에 달하는 방대한 백과사전의 내용이 들어갈 정도이다. 그리고 검색시간은 불과 몇 분의 일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추세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속도와 정보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인간의 사고체계도 이러한 방향으로 진화(?)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니다. 공상도 몽상도 아니고 현실이기에 그렇다. 이는 모두 반도체의 등장으로 인한 변화인데, 그 궁극이 무엇이든 간에 이제 인류는 디지털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발길을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단순히 생활의 편리함 때문만은 아니다. 디지털 세계에는 마약과 같은 중독성이 있는 까닭이다. 공상과 몽상을 현실로 만들어주고 있는 디지털의 세계에 환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아날로그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신세대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렇듯이 디지털시대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미술의 경우 되레 아날로그의 개념으로 회귀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20세기 미술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천지개벽이라고 할만한 변화가 있었다. 기존의 순수미학을 버리면서 시작된 20세기 미술의 변화는 정말 정신 못 차릴 지경이었다. 기존의 전통적인 미학개념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으면서 그저 새로운 표현방법, 새로운 재료, 그리고 새로운 조형적인 사고만을 지향함으로써 부단히 변화를 거듭했다. 새로운 미술이 출현하여 그 다음 출현한 새로운 미술에 바통을 넘겨주는 시간은 길어야 10년, 짧게는 3년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오직 새로움만을 추구해온 21세기 현대미술은 후반기로 갈수록 다양한 양식 및 형식을 쏟아내면서 그 변화는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나서 20세기 종반에 이르면서 마침내 변화의 속도는 주춤해졌다. 새로움만을 추구하다가 기진하여 탈진한 상태가 되었는지 모른다. 더 이상 새로운 방법론 및 재료 그리고 조형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간의 지적 능력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제아무리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지라도, 제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기 마련이다. 현대미술이 추구하는 이념이나 미학개념이 아무리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를 앞질러 간다고 해도 그 생산물은 결과적으로 이 지구상의 존재물질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일이다. 즉, 현상계에 존재하는 물질의 경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야말로 현대미술을 무한정한 발전의 개념으로 보는 이들이 부딪치는 벽이다.

미술을 발전의 개념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과학의 발전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매체 또는 매재에 의탁함으로써 발전을 지속시켜 갈 수 있을 따름이기에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불현듯 천재가 나타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대미술이란 것도 어차피 물질을 통해 성립될 수밖에 없다. 시각예술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운명인 것이다. 물질을 이용하지 않으면 그것은 미술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시각예술이 아니다. 미술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시각예술로서의 고유성을 통해 성립되는 까닭이다.

그 동안 현대미술이라는 미명아래 숨가쁘게 전개되어온 20세기 미술은 자체적인 생산에 한계를 느끼게 되자 주변 예술마저 비엔날레로, 그리고 미술관으로 끌어들였다. 퍼포먼스는 무용이나 연극의 개념이고, 설치는 건축의 개념이며, 비디오아트는 영화의 개념이다. 그리고 캘리그라피는 서예의 개념이요, 그런가 하면 문자언어로 포장되는 평면회화는 문학의 개념이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유행하고 있는 사진작업은 그대로 사진의 개념이다. 또 있다. 다양한 형태의 매체작업들은 컴퓨터나 기계 및 전자장치를 이용하고 있다. 미술인지 과학인지 얼른 분별하기가 쉽지 않은 형태의 작업이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치장하고 화랑과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 정도면 현대미술은 잡식성이자 공룡의 소화력을 가졌다고 할만하다. 무엇이든지 미술관이나 화랑에 가져다 놓으면 미술품이 되는, 기막힌 재주를 가졌다. 그러한 둔갑술도 이제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인간의 지적능력에 의존하는 상상력이라는 것이 고갈되어버린 탓이다. 바닷물로 쓰면 줄어든다고 했던가. 이런 비유가 반드시 타당한 것이 아닐지언정 현대미술의 확장세도 이제는 끝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최근 1-2년 사이에 나타나고 있는 변화 중의 하나는 미술시장을 선도하는 다양한 형태의 아트페어에서 추상이나 비구상 그리고 오브제를 활용하는 입체작업 따위의 이른 바 현대미술의 입지가 크게 좁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만 달리던 현대미술의 쇠퇴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극사실적인 작품이나 형상을 중심으로 하는 구상회화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현대미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던 미술애호가들조차 그림과 마주하면서 이제는 좀더 편안해지고 싶다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그림이 주는 정서적인 안정감을 되찾고 싶다는 욕구에 솔직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기에 현대미술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이라는 생각이다.

그럴 만도 하다. 추상표현주의가 등장한 이래 반세기가 넘도록 형상을 배제한 채 지적조작에 의존하는 추상회화에 너무 오랫동안 매달려 온 셈이다. 그리하여 추상미술에 대한 절대적인 숭배자들조차 염증을 내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추상미술에서 벗어났을 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당연한 얘기지만 추상에 대응하는 구상밖에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추상표현주의가 등장했을 때 이를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은 구상미술 종언을 고했다. 실제로 반세기 동안이라는 긴 세월동안 구상미술은 설자리를 잃었다. 그저 숨만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였다.

그런데 상황이 반전하고 있다. 모든 게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처럼 인간 세상의 일도 그런 모양이다. 정체된 물은 썩게 마련이다. 현대미술이 더 이상 새로운 미학을 만들어내지 못함으로써 부딪친 자기함정이다. 현대미술은 그 위세만큼이나 유명한 작가들을 많이 만들어냈고 시장을 창출했다. 그들의 작품이 인류에게 얼마만한 가치가 있고, 개인에게 어떤 만족감을 주는가 따위는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새로운 형식, 새로운 재료, 새로운 양식을 그럴싸한 새로운 미학으로 치장하여 양산해내고 돈벌이에 급급했다. 미술이 인간의 정서적인 함양을 위해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는지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현대미술을 미술시장으로 끌어들여 상품적인 가치를 만들어내는데 혈안이 되었을 뿐이다.

여기에는 세계미술을 주도하려는 미국의 전략이 있었다. 2차 대전과 더불어 군수산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미국이 세계경제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문화예술활동에 좋은 환경을 제공할 수 있었다. 파리를 중심으로 한 유럽은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경제가 파탄이 난 상황이었다. 이에 비하면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은 미국본토는 유럽과 달리 군수산업의 호황으로 오히려 경제재건의 기반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돈이 움직이는 곳에서 문화예술의 부흥이 있다는 사실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이 미국을 단숨에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만든 요인이다. 유럽의 유명한 화가들이 전쟁을 피해 대거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일시에 일류화가 집단이 생기고, 이들이 새로운 미술운동에 불을 지피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이 지금 다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상황이야 2차 대전 직후와는 많이 다르지만 돈이 움직이는 곳으로 문화예술 축이 이동하고 있는 현상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어쩌면 구상미술이 다시 힘을 얻기 시작하고 있는 것도 경제대국을 꿈꾸는 중국의 등장에서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는지도 모른다. 세계가 중국 붐에 휩쓸리고 있는 현실로 미루어 그런 가정은 설득력이 있다.

미래학자들은 현재와 같은 발전속도라면 20-30년 후에는 중국의 경제력이 미국과 대등한 수준에 오를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와 같은 희망적인 전망이 현실화되었고 가정했을 때 중국은 당연히 미국에 대응하는 또 다른 축으로서의 세계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낙관적인 예측을 가능케 하는 데는 두 가지 근거가 있다. 그 하나는 이미 말한 경제대국이 되었을 때 문화예술의 부흥은 그에 따른 부수적인 성과이다. 굳이 문화예술에 대한 진흥책을 쓰지 않더라도 경제가 활성화됨으로써 문화예술에 대한 새로운 수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리하여 돈이 모이는 곳, 즉 중국에 세계문화예술이 집중화되는 현상이 일어날 것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또 다른 하나는 중국은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도 잘 보존되고 있는 유구한 문화적인 전통과 그를 떠받치는 예술인구의 저변이 튼튼하다는 점이다. 서구문명에 대응하는 동양문명의 중심지로서의 오랜 경험과 자부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시각은 창작의 원동력이다. 중국은 모든 면에서 그럴만한 능력과 여건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주목할 일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동구권 국가들을 제외한 서구유럽이나 미국이 현대미술 일변도로 가고 있을 때 중국은 아카데미즘 미술교육을 장려했다. 사회주의 국가로서 사회주의리얼리즘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아카데미즘 교육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따라서 아카데미즘 교육은 재능 있는 화가들을 양산해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사회주의 시절에는 이들의 재능이 단순히 사회주의 이념을 위해 바쳐졌으나, 개방 이후 확대된 표현의 자유를 통해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본연의 자세를 회복하고 있다. 개별적인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이들의 진지한 노력은 당연히 구상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소수의 화가들은 추상작업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을지라도 단순한 서구추상미학의 추종이 아니라, 견실한 사실적인 소묘력을 바탕으로 하는 작가적인 역량에다 중국의 전통미를 접목하는 형태의 중국적인 추상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오늘 각종 비엔날레나 아트페어에서 중국작가들의 활약은 괄목할만하다. 세계미술계가 중국미술의 잠재력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이는 경제적인 성장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충분히 납득할만한 실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이다. 지난해 말 북경 중국미술관에서 열린(중국의 대표적인 작가들이 망라된) 중국유화전은 중국미술의 현주소를 가늠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였다. 10년만에 열리는 전시회라는 점에서 그 상징성과 무게는 압박감을 느낄 정도였다. 이 전시회를 보면서 어쩌면 지금 세계미술계가 구상으로 회귀하고 있는 데는 중국미술로부터의 자극도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케 했다.

오늘의 중국구상미술은 이전의 서구미술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당연한 일이지만 중국의 오랜 문화적인 전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장구한 역사를 통해 이룩한 수준 높은 문화예술을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현대미술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보더라도 중국의 구상미술의 수준은 결코 부정될 수 없을 정도이다. 구상과 추상, 전통과 현대의 이분법적인 비교개념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시간 한국미술의 시침은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가. 여전히 서구일변도인가. 이제 중국으로 시침을 돌려야 할 때이다. 미래의 한국미술은 중국을 논외하고서는 설자리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4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세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