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27) - 회화의 복원

펜보이 2007. 10. 28. 21:29
 

회화의 복원

 

신항섭(미술평론가)

 

 

상당 부분 전자과학의 발달과 병행해 온 현대미술은 세기말에 이른 지금 전진일변도의 상황에서 멈칫 정체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속도를 미덕으로 여긴 나머지 부단히 발전적이고 진보적인 행동양식을 갖지 않으면 안 되었던 현대미술이 이 시점에서 정체 국면을 맞이하고 있음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통적인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항상 첨단의 왕국 건설만을 장담해온 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아이디어와 과학의 발달에 크게 의존해온 현대미술의 입장으로서는 이미 예견된 결말에 이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미술이 감성의 산물에서 지적인 산물로 그 모습을 바꾸는데 심혈을 기울인 현대미술의 독단이 부른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미술을 과학과 결부시킴으로써 지적인 이해를 필요로 하는 현대미술이 이 순간 인간의 지적인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아울러 과학이 지속적으로 발달하지 않는 한 현대미술은 더 이상 부단한 자기변신의 신기루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비관적인 견해에 정면으로 맞서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현대미술의 공과를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대미술이 작가들로부터 손의 기능을 빼앗아 가고 말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무엇인가 대답을 해야만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전통적인 미술의 표현방식이었던 ‘만들고, 그리는’ 가장 원초적이고도 순수한 행위를 값싼 노동으로 전락시킨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2차 대전 이후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하기 시작한 추상표현주의의 대두와 함께 회화는 현대미술이라는 미명 아래 전통적인 묘사방식을 버리도록 강요당했다. 따라서 오랜 숙련을 필요로 하는 ‘손의 기능’이 차지했던 자리가 ‘아이디어’로 대체되고 말았다. 20세기 후반의 현대미술에서 전통적인 조형의 개념은 전혀 중요시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현대미술이 자기혁신의 논리를 계속해서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잃어버린 세기말에 와서 형태와 형체의 의미를 되살리려고 하는 움직임이 다름 아닌 현대미술의 내부에서 시작되고 있다. 이른바 ‘형상으로의 회귀’로 함축되는 이와 같은 움직임은 21세기 미술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단서가 된다.

한마디로 ‘평면에의 복귀’라고도 할 수 있는 형상으로의 회귀는 ‘그리기’라는 문제와 결부된다는 점에서 21세기 회화를 예견하는 중요한 가늠자가 될 수 있다. 그 동안 현대회화는 전통적인 조형개념을 부정함으로써 그 표현영역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었다. 평면조건을 무시하고도 회화는 얼마든지 다른 얼굴로 존재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회화에서 볼 때 현대회화는 비회화적이었다.  캔버스를 버리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고, 조각과 분별할 수 없는 표현까지를 용인했다.

이 상황에서 전통적인 회화는 일루전이라는 구습의 창고 속에 처박히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전통적인 회화는 완고하였다. 시대의 흐름, 즉 시대감각을 외면한 채 전통적인 가치만을 고수하려고 했다. 새로운 미술의 환경에 대해 냉담하거나 아예 외면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새로운 흐름에 저항하였다. 현대회화는 자신들이 쌓아놓은 영역을 뛰어넘어 전혀 새로운 개념의 조형왕국을 건설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후반 미술환경에서 전통적인 회화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현대미술, 현대회화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그들의 마당에 전통적인 회화에 대한 논의의 기회마저 허용치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회화는 자연히 역사의 전면으로부터 그 모습을 감추는 운명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세기말에 이른 지금은 어떤가. 현대미술의 항구적인 윤리관으로 확신했던 속도와 부단한 발전 및 진보는 영원한 것이 아님을 자각함으로써 평면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있다. 어쩌면 ‘형상으로의 회귀’라는 논리는 현대회화가 지속적인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인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형상으로의 회귀’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형상으로의 회귀’는 현대미술이 존속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이다. 다시 말해 전통적인 가치관으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현대미술의 존재가 단순히 새로운 조형개념의 제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미술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어떠한 경우에라도 절대로 과거와 타협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설령 인상파 회화가 그를 능가하는 그 어떠한 새로운 조형개념의 출현도 불허하며 절대적인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라도 현대회화의 시각으로는 이미 과거의 일일 따름이다. 현대회화는 우리가 오늘을 살고 있듯이 엄연히 살아있는 현재의 그리고 현장의 미술인 것이다. 현대회화가 전통적인 미에 대한 하나의 가치기준인 감동을 외면한다고 해도 이 시대의 감성 및 의식을 반영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현대회화가 전통적인 가치인 ‘그리기(描寫)’ 즉 ‘손의 기능’을 외면했다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현대회화는 감동을 아주 낮은 자리로 밀어냈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 현대회화가 ‘형상으로의 복귀’를 타진하는 것은 명분에 불과하다. 현대회화는 여전히 감동 따위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회화의 관심은 단지 어떻게 하면 전통적인 가치에 대항하면서 그 존재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데 있을 뿐이다.

전통적인 회화의 입장에서 보면 자칫 자기들의 승리라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기’ 즉 ‘손의 기능’을 아주 하찮은 것으로 치부하며 의기양양하게 깃발을 세워든 채 끝없이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데 혈안이었던 현대회화가 꼬리를 접고 슬그머니 자신들의 영역으로 되돌아 왔으니 말이다. 전통회화가 오랫동안 누려온 영광의 땅을 현대회화에 급속히 잠식당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영원한 제국의 달콤한 꿈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재현적인 표현은 미술이 존재하는 한 영속되리라는 자기신앙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새로운 시대 감각을 받아들이는데 무관심했던 것이다. 물론 전통적인 회화는 회화가 존재하는 한 살아남을 것이다. 그 주도적인 위치에서 밀려날 뿐 생명력을 크게 손상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통회화는 과거와 똑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실지를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통회화가 구각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을 때 현대회화는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와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 및 생활감정을 반영하는 것을 생존의 전술로 채택했다. 그것이 설령 이해할 수 없는 전혀 난해한 언어의 조합일지언정 복잡하고 다양한 현대사회의 산물임을 역설하는 것으로써 존재의 필연성을 설득시킬 수 있었다. 사실 고도로 전문화되고 있는 현대 사회체제 속에서 미술가가 그 사회를 직시하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하다. 적어도 예술가라면 그 사회의 일원으로서 거기에 응답할 의무가 있다. 현대회화가 난해한 언어를 채택했으면서도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사회적인 요구를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회화가 절대적인 지지를 획득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가치 평가라는 문제에서는 여전히 유보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현대회화의 윤리성인 시대감각의 반영을 인정하면서도 전통회화에 너무 길들여진 탓인지, 아니면 현대회화의 그 난해한 언어와 친숙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든지 간에 현대회화의 조형개념을 전면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실패했다. 현대회화는 대중성을 기치로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상징, 기호, 은유, 암시 등의 내적 언어 기술법 속에 그 모습을 감춤으로써 현대인의 시야로부터 스스로 사라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엄연한 실재로서 화랑에서 또는 미술관에서 그 존재를 역설하는 데도 사람들은 실체가 없는 환영만을 볼 따름이었다.

이제 현대회화는 자체의 모순에 의해서건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해서건 속도와 발전의 개념만으로는 현대인을 더 이상 현혹시킬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시대감각을 선도해 왔다는 자부심이야말로 자기함정이 아니었을까. 예술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궁극적인 것이 무엇인지 살피는 데 소홀했다는 자기반성이 없는 한 현대회화의 운명은 전통회화의 길을 답습할 수밖에 없으리라.  

전통회화의 ‘그리기’는 회화의 기반이자 영속적인 언어의 기술법이 틀림없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재현적’인 ‘그리기’는 부단히 계속될 것이다. 어느 면에서 조형언어인 ‘그리기’는 문자언어보다도 더 강력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조형언어인 ‘그리기’만큼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언어가 어디 또 있을까. 더구나 ‘그리기’는 단순한 언어전달 체계에만 그 기능이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기’를 통해 이해되는 언어는 시각적인 설득력이 강한 것은 차치하고 감동을 야기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해되는 것 이외에 보고 느끼게 함으로써 감동과 만나는 길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전통회화는 ‘그리기’를 그 기반으로 한다. ‘그리기’는 손의 기능으로써 충족된다. 손의 기능은 단순한 눈의 심부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손의 기능이 자유로워짐으로써 동시에 사물을 보는 시각이 명확해진다. 일체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일으키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미를 생산해내는데 필요한 조화, 균제, 비례, 통일 등에 대한 감각을 이해하고 숙지하게 된다.  회화에서 이러한 감각을 익하지 않고서야 어찌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현대회화에서 감동적인 요소가 약한 것도 이러한 미적요소를 등한시한 결과라는 데 대해 어떻게 반론할 것인가.

전통회화가 본래적인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회화적인 습속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현대라는 시제의 의미를 새겨 넣어야 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전통회화가 역사의 전면에서 물러났던 원인도 따지고 보면 현대라는 시제를 의식하지 못한 채 과거의 영광에만 안주한 탓이었다. 현대라는 시제를 전통회화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시대의식과 밀착하는 일이다. 시대를 통찰하여 시대를 밝히는 시대의 눈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회화가 아무리 인간 정서적인 고양을 위한 감동을 그 밑천으로 삼는다고 해도 예술의 사회적인 기능을 외면할 수는 없다.

예술가가 사회를 인식하는 태도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물론 전통적인 회화의 가치 중의 하나인 순수미를 목적으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순수미를 해석하는 방법에서도 역시 현대라는 시제를 떠나서는 안 된다. 그 자신의 생활공간을 포함하여 그 자신이 놓여 있는 시대상황을 읽는 일이 필요하다. 회화란 결과적으로 자기 이외의 타자와의 소통을 매개로 하여 존재가치를 획득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이러한 시각에서라면 전통적인 회화는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전통회화는 현대회화가 형상언어를 새롭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해서 거기에 대항할 이유는 없다. 회화의 얼굴이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할뿐더러 무궁무진하다. 예술에서의 개성 또는 독자성이라는 것은 해석의 문제인 것이다. 세상과 사물을 어떠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느냐가 관건이라는 얘기다. 해석이라는 숙제만 풀게되면 누구나, 아니 전통회화냐 현대회화냐를 떠나 영원의 가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현대회화가 다시 ‘그리기’를 필요로 하는 형상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것이 비록 현상으로부터의 탈출의 수단이라고 할지라도 ‘그리기’가 주는 의미를 재음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일이 전통회화와의 화해를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현대회화는 또 다른 방법으로 진보 또는 발전을 모색하리라고 보는 까닭이다. 현대회화가 형상을 돌아보는 것은 단지 ‘속도’를 늦춘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현대회화의 강점은 전통회화와 달리 자기모순을 극복하는데 주저치 않는 적응력 및 대응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회화가 고유의 가치를 보전하면서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바로 시대적인 흐름을 정확히 읽고 거기에 응답할 수 있는 적응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월간 '아트코리아' 1998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