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24) - 특색 있는 미술관을 기대하며

펜보이 2007. 10. 2. 22:53
 

특색 있는 미술관을 기대하며


신항섭(미술평론가)


 

미술관은 미술품의 무덤이라고 말한다. 이는 죽은 자들의 작품만을 전시하고 있다는 데 대해 비꼬는 투의 표현이다. 아니 실제로 그렇다. 당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하는 현대미술관이 생겨나기 이전까지만 해도 미술관이라고 하면 세상을 떠난 미술가들의 독무대였다. 아무리 명성이 높은 미술가라고 할지라도 생전에는 미술관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미술관이란 철저히 검증된 작가들의 작품만을 전시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어떤 묵계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불붙기 시작한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이 미술의 흐름을 이끌어가면서 새로운 형태의 전시장이 필요하게 되었다. 추상표현주의는 미술관에 걸린 작품들처럼 고상하거나 우아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 오히려 이전의 미술품을 조롱하듯 공격적이고 난폭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더구나 그 작업 속도는 과거의 미술이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빨라졌다. 과거에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몇 주일 또는 몇 달이 걸리는 상황과는 전혀 비교가 안될 정도이다. 단 하루 이틀만에 100호 크기의 대작을 그려내는 상황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이 쏟아내는 작품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졌다. 당연한 일이지만 소수의 화랑에서 이들의 작품을 수용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대형전시공간 건립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당대미술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미술관이 생겨나게 된 것은 이와 같은 현실적인 요구 때문이다.

그리하여 당대의 작가들도 당당히 미술관에서 전시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고, 또 작품이 영구히 소장되는 영광도 누리게 되었다. 미술관은 이제 더 이상 ‘죽은 미술가들의 무덤’이 아니다. 물론 지금도 생존작가에게는 문호를 개방하지 않는 미술관들이 더러 있다. 이런 형태의 미술관들은 대체로 미술관 역사가 오랜 유럽 쪽에 많다. 설혹 전시회의 기회는 제공한다고 할지라도 상설 전시장에 작품을 걸어주지 않는 인색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당대미술을 취급하는 현대미술관은 급속히 증가하게 된다. 역사가 짧은 나라일수록 현대미술관의 건립에 대한 필요성은 더욱 절실한 것이었다. 멋진 현대식 건물은 미술관에 대한 소유욕을 충족시켜 주는 한편 미술품 감상에 대한 갈증을 가장 빨리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구와 필요성에 의해 현대미술관 건립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보편화된 사회현상의 하나가 되었다.

그 중에서 미국과 일본은 그 대표적인 국가이다. 추상표현주의 이후 현대미술을 주도해온 미국으로서는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많은 작가들이 쏟아내는 다양한 형태의 미술품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공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미술관 건립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일본의 경우에는 메이지시대 이후 ‘탈아입구’라는 서구지향적인 정치이념에 따라 앞서가는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과 선호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일본은 이미 19세기말부터 서구미술품 구입에 관심을 기울여 인상파 시대 작품을 비롯하여 그 이후에 전개되는 다양한 현대미술품을 적극적으로 매입하였다. 그리하여 비유럽권 국가 중에서는 서구미술품을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가 됐다.

이처럼 현대미술품을 다량 소유하게 되면서 역시 이들 작품을 소장하고 전시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필요하게 됐다. 1960년 동경올림픽 이후 수출주도의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달러가 넘쳐남에 따라 서구 미술품 수집은 사회적인 현상의 하나가 되었으며, 이는 미술관 건립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로써 일본열도 전역에는 다양한 형태의 현대미술관이 속속 건립되기에 이른다. 현대미술은 이제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확실한 거처를 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적어도 미술사에서 이렇듯이 당대미술이 생산되자마자 곧바로 미술관에 자리를 마련하는 일은 일찍이 없던 일이었다.

아마도 현대미술이 각광을 받게 된 데는 미술품에 대한 투자가치로서의 매력도 한 몫을 했다고 할 수 있지 싶다. 특히 고흐를 비롯한 인상파 시대 작가들의 작품이 천장부지로 치솟는 현상을 보면서 미술품에 대한 투자야말로 확실한 보험이라는 생각이 일반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투자가치가 현대미술관 건립을 부추기는 요인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상상할 수 없는 가격으로 상승할 수 있으리라는 미래의 가치를 기대하며 현대미술품을 선점하려는 것이다. 예측했던 것보다도 훨씬 짧은 기간에 이들의 기대는 현실로 나타났다. 현대미술품의 가격이 각종 경매에서 고공행진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당대 작가들의 현대미술품 수집은 더 이상 예측 불가능한 투자가 아님이 증명이 됐다.

한국에서도 현대미술품 구입과 현대미술관 건립은 예외가 아니다.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대기업의 오너 가족들이 다양한 형태의 현대미술관 건립을 주도하고 있는 추세인 것이다. 아직 미술관 건립 및 운영에 따른 정부의 지원책은 전무한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사립미술관이 증가하고 있다. 이는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반드시 긍정적으로만 볼일은 아닌 듯싶다. 그렇고 그런 미술관들이 난립하는 것이나 아닌지 우려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대기업의 오너 가족들이 운영하는 사립미술관들은 중앙에 몰려 있는 형편인데다 콜렉션의 내용마저 비슷비슷해서 미술관 개개의 특징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은 미술품 구입과정에서 특정 분야 또는 특정미술인의 미술품을 대상으로 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마치 미술품 구입이 구입자의 재력이나 안목을 평가받는 일이라도 되는 듯이 특정장르 및 특정 미술인의 작품에 한정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약삭빠른 일부 상업화랑들의 상술도 한 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에서 건립하는 미술관들은 대체로 고서화를 비롯하여 근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다양한 콜렉션을 가지고 있다. 어느 특정의 장르나 특정의 미술인들 작품에 한정할 수 없다는 공공기관으로서의 성격 때문이다. 다양성이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나 공공미술관들의 콜렉션은 현재로서는 그 내용이 빈약하기 짝이 없다. 미술품 구입에 따른 예산의 절대부족으로 콜렉션의 질적인 수준이 떨어지는 상태인 것이다. 일단 하드웨어만 만들어놓고 소프트웨어는 시간을 두고 채우면 된다는 생각이겠지만 특징 있는 미술관을 만들기에는 힘에 부치는 모습이다.

특히 지방 공공미술관의 경우 그 지역의 특성에 맞는 콜렉션과 운영방식이 필요한데 아직은 초기여서 그런지 특색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지역 공공미술관은 그 지역 출신의 미술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하는 운영방식을 도입함으로써 특색 있는 지역미술관으로서의 성격을 갖추어가야 한다. 만일 작가의 지명도만을 의식하여 작품을 구입하게 된다면 지방 공공미술관으로서의 성격을 만들어 갈 수 없다. 서양미술의 경우 도입한지 1세기도 채 안됐지만 미술사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지방 공공미술관은커녕 근대미술관이 없는 탓인지 모른다.

반면에 대기업의 오너 가족이 건립 운영하는 개인미술관들은 대체로 현대미술품 중심의 콜렉션으로 가고 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데, 개인적인 취미수준에 머물거나 투자가치 정도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교적 손쉽게 구입할 수 있다는 점도 한 몫을 한다. 그러나 아무리 개인적인 취향 및 투자가치로서 미술관을 건립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이왕이면 목표 및 성격이 뚜렷해야 한다. 미술관이란 공공기관이나 개인에 상관없이 일단 사회적인 공익성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개인적인 취미생활로 시작된 경우라고 할지라도 미술관이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시점에서는 공익성이 따르게 된다. 단순히 개인적인 소유물로서의 범위를 넘어서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보면 공공미술관이든 사설미술관이든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일이다. 그런데 시각을 달리하면 성격이 분명치 않은 사설미술관이 많이 생기는 것은 바람직한 일만은 아니다. 가령 미술사적으로 정리되지 않는 잡탕식 콜렉션은 아무리 그 숫자가 많다고 할지라도 교육적인 효과는 크지 않다. 미술관이란 어떤 식으로든지 미술품만을 모아놓고 전시를 하면 된다는 식이 돼서는 곤란하다. 여기에다 보고 싶은 사람만 와서 보라는 식이 돼서는 더더욱 안 된다.

미술관이란 직간접적인 교육의 장소이다. 미술사적인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된 미술관에서는 미술품을 보는 것만으로 훌륭한 미술사 공부가 된다. 반면에 미술사적인 관점을 무시한 미술관에서는 감상자에게 혼란스러움만을 가중시킨다. 물론 작은 규모의 사설미술관에서는 대형 공공미술관의 내용을 따라갈 수는 없는 일이어서 미술사적인 전시형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하더라고 전체가 아니라 어느 한 부분에 집중하게 되면 나름대로 미술사적인 가치를 지닌 미술관으로서의 모양을 갖출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안목과 분명한 목적의식이다. 적어도 한 두 점이 아니라 수백 점 이상의 작품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미술관 설립이나 그에 준한 어떤 목적을 가지게 마련이다. 이럴 때는 무언가 특색을 가져야만 한다. 가령 미술사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어느 특정 미술인의 작품만을 집중적으로 수집한다던가, 아니면 어떤 특정 장르 및 특정양식에 한정하는 식으로 범위를 좁혀야 한다. 그래야만 비록 미술관의 규모가 작다고 할지라도 그 존재가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특정인이나 특정 장르에 집중하는 콜렉션은 광범위한 콜렉션보다 오히려 성공할 확률이 높다. 작품의 희소성으로 승부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어떤 유행을 따르거나 경쟁적인 심리에서 여러 콜렉터들이 특정 미술인 및 특정 양식의 작품만을 선호하는 형태의 콜렉션은 결과적으로 특색 없는 미술관이 난립하는 현상을 초래할 공산이 크다. 그래서는 많은 돈들이고 고생한 보람이 반감되고 만다. 미술관 건립의 명분이 희석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우려가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사설미술관 건립을 꿈꾸는 일부 한국의 콜렉터들은 미니멀리즘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현대미술만을 선호하는 경향이라고 한다. 사실이 그렇다면 성격이 유사한 미술관들이 많아질 수 있다는 것인데, 시비를 걸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유사한 성격의 미술관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앙지역에 여러 개 생기는 것은 박수를 칠 만은 아닌 것이다.

바람직한 일은 다양한 성격을 지닌 미술관들이 많이 생기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획일적이고 천편일률적이기보다는 다양하고 개성적인 쪽이 좋다. 외국의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대상으로 삼는 것도 좋으나, 우리의 미술 중에서 특정 장르만을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특색 있는 미술관을 만드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예를 들자면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경향의 작품만을 모아놓은 미술관이 생긴다면 무한한 꿈과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청소년들에게는 훌륭한 교육적인 공간이 될 것이다.

무릇 미술관이란 그런 것이어야 한다. 미술관의 사회적인 기능이란 측면에서 볼 때 일반 시민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을 때 그 참다운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한 두 번 찾는 것으로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미술관은 생명력이 약하다. 아무리 콜렉션이 좋다고 할지라도 감상자에게 무언가 영감을 주고 위안이 되며 아름다운 꿈을 심어줄 수 없다면 살아 있는 미술관으로서의 기능을 다할 수 없는 것이다.


<월간 "아트코리아" 2004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