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아트페어 ‘아트 마네지 2002’에 다녀와서
러시아의 겨울추위는 역시 매서웠다. 지난 해 12월초 모스크바 날씨는 연일 수은주를 영하 10도 이하로 끌어내리면서 적지 않은 동사자를 발생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스코비치들은 추위에는 이골이 난지 누구 하나 춥다는 기색도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간간이 눈이 내리는 가운데 바람마저 불어 체감온도는 족히 영하 20도 정도는 되련만 건축현장의 노동자들도 일손을 멈추지 않는다. 러시아의 겨울은 역시 추워야 제 맛이라던가. 그렇다. 2-3년 전 같은 시기의 모스크바는 아침을 제외하고는 영상기온이 계속됐다. 그래서인지 몸이 둔하고 머리가 개운치 않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추위에 잔뜩 대비했건만 그런 준비가 무색해지자 몸과 마음은 긴장이 풀어져 날씨에 적응하기가 어려웠었다. 겨울은 추워야 한다. 모스크바의 겨울이라면 더욱 그렇다. 다행이 다시 찾은 이번에는 본연의 겨울추위에 대응하면서 러시아특유의 정서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겨울은 바깥기온이 차면 찰수록 상대적으로 옥내 기온은 높아진다. 무슨 얘기인가. 난방으로 온도를 높인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러시아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추운 겨울을 지혜롭게 보내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 러시아의 겨울은 무척 길다. 그리고 겨울밤은 몹시 길다. 동지 때가 되면 낮 시간은 스물 네 시간 중에서 불과 그 사 분의 일인 여섯 시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옥외보다는 옥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길게 마련이다. 이처럼 긴 밤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필시 옥내문화가 발전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러시아가 모든 예술분야에서 세계 정상의 수준에 올라서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다. 날씨와 풍토가 만들어낸 결과인 셈이다.
이를 실증하기라도 하듯 지난 해 12월6일부터 13일까지 모스크바 마네지(황제의 말 조련장)에서 열린 ‘아트 마네지 200’은 개막식부터 끝날 때까지 연일 대만원이었다. 한국에서 열리는 화랑협회전이나 다양한 형태의 국제적인 아트페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특히 6일 오후 5시부터 시작된 개막식 행사에는 수천 평에 달하는 전시장 가득히 사람들로 붐비는 나머지 발을 옮기기조차 쉽지 않아 그림을 감상하기가 힘겨울 정도였다. 한마디로 러시아가 예술분야에서 세계 정상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저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1999년과 2000년에도 참가한 일이 있는 필자에게는 이런 광경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미술관을 비롯하여 영화 음악회 연극 등 각종 공연예술에는 항상 애호가들로 넘친다. 마네지가 열리고 있는 기간 중에 모스크바 강변에 위치한 트레차코프미술관 분관이 있는 중앙예술가의 집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역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곳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예술애호가들의 물결을 목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러시아에서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정경의 하나이다. 예술감상이 생활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러시아예술을 세계 정상으로 키우는 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트마네지나 중앙예술가의 집에서 이루어지는 미술품 거래는 생각보다 저조한 편이었다. 이는 러시아경제 사정이 그리 좋지 않다는 점을 반증한다. 중요 산유국이자 에너지 수출국인 러시아는 최근 수년간 고유가에 힘입어 4%대의 실질성장을 이어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국민들의 실생활에서 경제성장을 피부로 느끼기는 아직 이른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세계 대도시 가운데 4위라는 고물가에 시달리고 있는 모스크바의 상황으로서는 더욱 그렇다.
마네지는 국제 미술견본시장을 표방하는, 동구권에서는 유일한 아트페어이다. 이번이 일곱 번째인데 갈수록 외국화랑들의 참여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이는 역시 판매와 직결된 문제로서 비단 마네지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미국이나 구라파 아트페어들도 비슷한 상황인 것이다. 미술품 판매가 시원치 않다는 것은 세계경제 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네지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는 느낌이었다. 이번에 참가한 외국화랑은 독일, 스페인, 한국에서 모두 4개 화랑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아트마네지가 외국화랑들에게 전혀 매력을 주지 못하는 아트페어임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외국화랑들이 참가하는데 따른 유리한 조건을 전혀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부스사용료와 카탈로그 제작비는 제쳐놓고라도 항공료 및 체재비를 건지기도 힘들만큼 판매가 부진한 것이다.
2000년 전시회만 하더라도 외국화랑에게는 지정호텔의 숙박비 할인, 그리고 참가화랑에게 아에로플로트항공의 티켓 2매와 세관통과 수속 및 작품 운반 등의 실질적인 혜택을 주었다. 이는 아트마네지를 국제적인 아트페어로 격상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보는데, 이번에는 이러한 혜택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지정호텔에서도 예약이나 해 줄뿐 일반화되다시피 한 할인혜택도 만들어주지 못할 정도였다. 그 속사정은 알 길이 없으나 주최측의 능력부족으로밖에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래서는 국제적인 아트페어가 되겠다는 기대는 난망이다.
2년 전만 하더라도 페레스트로이카 이전에 러시아 연방이었다가 독립한 주변의 독립국가연합 국가들의 참여도가 높았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오늘 독립국가연합 국가들이 전혀 참가하지 않았다. 이는 기대와는 달리 실속 없는 아트페어라는 판단 때문인지 모른다. 실제로 인접한 국가들이라고 할지라도 부스사용료와 체재비 그리고 작품 운반비 따위를 계산하면 적어도 4천-5천 달러 정도 소요된다. 이에 반해 판매가 부진하면 최소한의 경비조차 건지지 못하게 된다. 이런 결과가 반복되다보면 아무리 명분을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인 참가는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번과 같이 외국화랑들에게 아무런 혜택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국내행사로 전락하고 말 것은 자명하다.
이번 한국에서는 월간 미술시대가 참가했다. 김은하 김영신 김은숙 최혜숙 김일해 홍정희 조혜숙 강은성 등 모두 8명의 작가가 2점씩 출품하였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한 점이 판매되는 데 그쳤을망정 구입문의는 예상외로 많았다. 한국에서 판매되는 가격보다 조금 낮추어 국제적인 수준의 가격으로 내놓았는데 역시 이 점이 주효했던 모양이다. 이전에 참가했을 때는 한국에서 판매되는 가격으로 책정, 구입문의가 극히 적었던 사실과 비교할 때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적절한 가격을 제시하면 외국작가들이라고 해서 크게 불리하지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양적인 정서가 담긴 한국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오히려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은 모스크바 미술애호가들의 안목이 국제적인 감각을 갖추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가격이 낮으면서도 작품 수준이 높은 젊은 작가들이 참가한다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도 적지 않은 소득이다. 2년전 호주 멜보른에 살고 있는 김덕희는 아트마네지에서 소품을 매진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던 기억이 새로웠다. 그의 경우 작품의 내용이나 수준이 국제무대에서 통용될 수 있는 데다가 적절한 가격을 제시함으로써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는 향후 한국작가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하나의 좋은 선례이다.
출품작가들은 아트페어 참가와 함께 러시아미술관 순례 그리고 페테르부르그를 비롯하여 파블로프스크, 푸시킨시, 블라디미르, 수즈달 등지로 스케치여행을 일정에 넣었다. 가는 곳마다 하루에 한 두 차례씩 눈발이 날려 겨울러시아 여행이 주는 멋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다. 특히 트레차코프미술관(분관을 포함), 러시아미술관에서 본 러시아미술을 통해 유럽이나 미국과는 또 다른 조형적인 특징을 보면서 자신들의 작품활동을 위한 에너지를 얻는 기회로 삼았다. 또한 전시기간 중에 때마침 푸시킨미술관 분관에서 러시아가 소장하고 있는 마티스의 데생전을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은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이번 아트마네지에서 나타난 뚜렷한 특징의 하나는 이전과는 달리 평면회화 일색이었다는 점이다. 이전의 경우에는 설치 입체 사진 비디오 따위의 작업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으나, 이번에는 평면 이외에는 전무하다고 할 정도였다. 주최측에서 마련한 아트마네지의 이미지작업과 관련한 설치작업이 하나 있었을 따름이다. 더구나 세계현대미술계의 흐름의 하나인 사진작업이 전무했다는 사실은 아트페어의 미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순수추상도 그 숫자가 극히 적었다. 물론 순수추상 작품 중에서 새로운 이미지나 방법론을 제시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어디서 보았음직한 그런 형식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추상에서 새로움이 없다면 그것은 추상작가들이 폄하하는 구상보다도 훨씬 지루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상은 20세기 초 세계 현대미술을 리드한 아방가르드 전통을 가진 러시아라는 특수한 사정을 감안할 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러시아미술은 서구현대미술을 좇아가는데 열중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추상미술은 물론이려니와 한참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사진작업조차 순식간에 쇠퇴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트마네지만의 일은 아니었다. 수많은 형태의 개인전 및 그룹전이 열리고 있는 중앙예술가의 집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아방가르드 전통을 가진 러시아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고 판단한다면 성급한 일일까. 이번 아트마네지와 중앙예술가의 집의 작품들에 한정해서 볼 경우 이러한 판단 이외에는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러시아미술은 이제 새로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지 모른다. 아니, 이미 갈 길에 대한 방향이 확실하게 설정되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러시아아방가르드에 대한 향수 또는 믿음을 통해 보자면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으리라는 생각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눈길을 끈 드미트리 이코니코프, 라리사 나우모바, 블라드미르 가보조 등의 작품은 한결같이 러시아아방가르드의 조형적인 특징 및 정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처럼 자국의 문화적인 전통 및 예술적인 정서 그리고 조형적인 특징을 되돌아보는 것은 이제 세계적인 추세라는 느낌이다. 세계화가 진전되고 있는 마당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화적인 반란인 셈이다. 아니, 이는 필연적인 결과인지 모른다. 정치 경제 군사 면에서 열세인 국가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고유의 문화적인 전통 및 그 가치를 재생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가 이루어지면 전통적인 문화 및 예술을 통해서만이 민족의 존재성을 확인해갈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관점에 서면 문화대국인 러시아가 무작정 세계현대미술을 좇아가던 무분별한 태도를 바꾸어 자국의 전통미술에 관심을 돌리게 된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그리고 이번 아트마네지에서는 처음으로 중국출신의 조우브라더즈가 독일 발터비숍갤러리를 통해 출품, 눈길을 끌었다. 형제화가로서 국제무대에 잘 알려진 조우브라더즈는 전시장 중심에 가장 넓은 부스를 차지, 전시 하루 전에 현장작업으로 30여미터에 달하는 추상작품을 전시하는 한편 벽면 한 쪽에는 소품들로 채웠으나 판매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록 판매 면에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세계 어느 전시회에서나 중국작가들이 득세하고 있는 현실을 이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신항섭)
<2003년 월간'미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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