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 (13) - 서세옥

펜보이 2007. 9. 28. 23:20

 

 

                   

 

    산정 서세옥의 작품세계


  현대적인 수묵화의 거미줄

 

   신항섭(미술평론가)


 

세계는 지금 문화적인 유사성이나 지리적인 여건 또는 생존을 위한 이해관계로 블록화하고 있다. 이는 세계화를 기조로 하는 무역자유화라는 무한경쟁체제가 만들어내는 산물이다. 다시 말해 거대금융자본에 흡수 통합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실력을 갖추어야 하는데, 군소 국가들로서는 가당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블록화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연합이 대표적인 경우이고 아세안이라든가, 북미, 그리고 남미국가들이 블록화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는 세계무역전쟁의 서막에 불과한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군소 국가와 민족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고유의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문화전쟁에 승부수를 던지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국력이 약하다고 할지라도 우수한 문화, 선진한 문화는 어떤 경우에라도 그 존재성을 침해당하지 않는다. 현대에 와서 문화의 힘은 국력과 비례한다고 하지만 국력이 약하더라도 영향력 있는 우수한 문화는 살아남을 수 있다. 고유의 문화야말로 국가와 민족을 존립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산정 서세옥의 작품을 보면서 새삼 한국미술의 정체성 또는 존재성은 과연 무엇인가를 자문하고 된다. 산정의 작품 앞에서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한마디로 산정의 작품은 이전의 어떤 작가들과도 확연히 구별되는 바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미술의 미래를 위한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서구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그의 작업과 유사한 경우를 찾아볼 수 없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그는 분명히 하나의 새로운 미술형식을 만들어냈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존재성은 흔들리지 않는다. 더구나 그의 작품은 한국미술의 정체성이 무엇이냐를 묻는 질문 앞에서 하나의 본보기로서 제시될 수 있다.

 

 

수묵이라는 재료는 모필 그리고 종이와 함께 중국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이들 재료와 도구를 이용하는 수묵화는 필연적으로 중국에서 생성된 것이다. 그러기에 이들 재료 및 도구를 사용하고 그 표현양식을 따르는 한국에서 중국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표현양식이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들법하다.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재료와 도구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예술이라는 창작행위에 필요한 보조적인 수단으로서 기능할 뿐, 예술성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창작행위란 어디까지나 예술가의 주체적인 의지에 맡겨지는 것이다.

재료와 도구만을 놓고 보자면 산정의 수묵화는 당연히 중국에 빚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산정이 이루어 놓은 수묵의 세계는 결코 중국작가들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의 수묵화가 현대화의 길을 걷게 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산정이 이룩한 길을 우회하거나 회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중국에서 수묵의 현대화라는 말이 거론될 경우 어떤 식으로든지 산정은 극복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이는 산정의 창의적인 발상 또는 지적인 탐색을 통해 구현한 현대적인 조형세계는 수묵의 현대화가 가는 길목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의 현대적인 수묵화 작가들에게서도 이와 같은 현상을 목도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스스로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산정의 그늘을 결코 피해갈 수 없기에 그렇다. 거꾸로 말하면 한국의 현대수묵화 작가들이 자신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간에 산정의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그 만큼 산정의 작품세계는 수묵의 현대화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수묵이 현대화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형태의 해체 및 재구성 또는 형태의 함축 및 단순화라는 조형어법을 수용하는 과정에는 어김없이 산정이 존재하기에 그렇다.

 

 

무엇보다도 산정은 선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수묵화에서 선은 서체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진다. 모필이라는 도구는 한자를 쓰기 위해 개발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한자는 형태의 함축이고 압축이자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표의문자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형태의 압축하고 함축하며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선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러기에 선은 형태의 최소공약수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어떤 식으로든지 물상의 형태를 표현하자면 선이 없으면 안 된다.

산정은 형태를 압축하고 함축하며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이미지 묘사기법, 즉 형태의 최소공약수를 선에서 찾아낸 것이다. 물론 전통적인 문인화에서는 더러 아주 간결한 선에 의해 이루어지는 형태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태는 구체적이다. 형태의 단순화이고 압축이지만 상징적인 지경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산정의 작품은 문인화의 선과도 엄연히 구별된다. 달리 말하면 선으로 이루어진 형태를 본다기보다는 선 자체의 아름다움을 주시하려는지 모른다.

1950년대 말에 제작된 ‘점의 변주’ ‘선의 변주’라는 명제를 가진 일련의 연작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형태와 무관하게 단지 점과 선의 이미지만을 종이 위에 나열하는 식이었다. 이는 점과 선에 대한 최초의 의문이었다. 형태와 무관하게 점과 선이 종이 위에 놓여 있을 때 어떤 이미지로 떠오는지 지켜보자는 심사였는지 모른다. 이와 같은 새로운 시각 또는 새로운 관점에서 응시하게 된 점과 선은 산정의 조형세계를 이루는 근간이 된다.

 

              

  

이는 자신만의 미적 감각에 의해 만들어지는 점과 선의 순수태에 대한 관심인지 모른다. 그렇다. 산정의 작품을 보면 형태미도 간과할 수 없지만, 그보다는 모필에 의해 이루어지는 선의 아름다움에 매혹된다. 모필과 먹과 종이가 만남으로써 이루어지는 선의 아름다움이 산정에 의해 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까닭이다. 산수화 또는 문인화에서 쓰이는 이전의 선들은 언제나 형태를 묘사하는데 바쳐졌다. 그러기에 선 자체의 의지를 보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형태를 떠나 선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추상언어가 수묵의 세계에 들어와 집을 짓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가만히 돌이켜 보면 형태를 떠난 선의 아름다움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형태를 떠나 존재하는 선의 아름다움은 한자 서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추사 김정희의 글씨에서 볼 수 있는 파격적인 획은 단순히 서체에만 복종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선의 자율적인 특성을 살리면서 선 자체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의식하고 있다. 추사의 선은 문자언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전달이라는 본래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위해 기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시하고 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서체가 글자를 형용하고 있을지라도 구체적인 형태를 설명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추사체와 같이 형태를 지시하고 있지 않은 서체의 획은 독립적인 선으로서의 요건을 충족시킨다. 한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서체는 형태가 없는 문자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한자는 글자이기 전에 기호 또는 부호라는 상징적인 언어로 보일 것이다. 따라서 기호나 부호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에게 서체는 단지 추상적인 이미지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설령 한자가 형태를 내포하고 있는 상형문자라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형태의 그림자를 본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선이 가지고 있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에 시선을 돌리게 되면 그로부터 전혀 새로운 미적인 세계가 열린다는 사실을 깨닫기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렇듯이 형태를 떠난 선의 아름다움은 서체에 이미 존재했었다. 그러나 한자의 서체에서 볼 수 있는 선은 자의적인 해석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 약속된 기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한자의 서체는 선으로서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구현했다고 할 수 없다. 추사체의 파격적인 획이 도달한 조형적인 아름다움은 새로운 시각의 산물임에 분명하지만 그 선은 한자라는 서체에 얽매어 있다. 서체를 떠나 독립적인 조형공간을 확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비해 산정의 선은 한자의 서체와도 구별되는 바가 있을 뿐더러 문인화나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형사의 개념과도 다르다. 그 이유는 산정의 선은 한자의 서체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산정의 선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그림, 즉 조형적인 세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물론 산정의 선은 본질적으로 한자 서체에 연원한다.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한학을 수학하는 과정에서 서체를 익혔기 때문이다. 서화동원론이 아니더라도 서체를 익히면서 이미 선의 요결을 터득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인들이 전문적인 그림수업을 하지 않고도 문인화가 가능한 것은 한자의 서체를 익히는 동안 형태에 대한 이해를 선행하기 때문이다. 즉, 한자 자체가 형태를 내포하는 상형문자로 되어 있기에 그렇다. 한자 서체에 능숙하게 되면 거기에 형태를 얹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문인화란 대체로 물상의 개략적인 형태로 완결되는 까닭이다.

 

                     

 

 이처럼 산정이 찾아낸 선은 어쩌면 한자 서체를 통해 터득한, 형태의 골격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형태를 완전히 배제한 순수추상의 세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구체적인 형태를 배제하되 그로부터 형태를 유추하고 복원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현실적으로는 비구상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 보다 근접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형태를 지향하지 않을지언정 형태 자체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작품이든지 거기에는 점과 선이 존재하고 점과 선을 역추적하면 어떤 형태에 도달하게 된다. 현상계에 존재하는 어떤 형태에 근거한다고 보면 산정의 선은 지적 조작의 세계도 아니다.

산정의 선이 만들어내는 형상은 자연과 인간의 이미지로 요약된다. 막연한 상상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리고 단순히 조형적인 아름다움만을 의식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어디까지나 물상의 형태 또는 그 그림자를 통해 선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려는 입장이다. 산정이 지향하는 선은 자연에 대한 인상이고 인간에 대한 탐구의 결과로서 제시된다. 하지만 재현적인 방식과는 엄연히 다르다. 물상에 대한 관찰로 이루어지는 묘사방식이 아니다.

산정에게 자연과 인간은 사유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다시 말해 관념적인 이해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면서 그 관념이 현상계로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은 직관에 따른다. 이때 자연의 이미지는 일상적인 생활을 통한 경험의 축적으로 이미 마음속에 그 형태적인 가치가 결정된 상태이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대상과 직접 마주함으로써 일어나는 현실적인 감정 반응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느 면에서 감정의 동요는 철저히 억제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감정을 통제함으로써 고요한 관념의 세계로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과정은 관념의 세계에서 던져주는 직관적인 이미지를 받아쓰는 형식이 된다. 직관적인 이미지는 전체나 본질을 파악한 연후에 일어날 수 있는 형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필경 극도로 단순화되거나 함축적인 이미지로 제시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산정의 작업을 보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최소한의 이미지로 단순화되고 있다. 최소한의 이미지는 때로 구체적인 형태를 유추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원시적인 기호나 부호의 단계에서 머무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만일 산정의 작품에서 명제가 없다면 현상계의 어떤 물상의 이미지를 연상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물론 산정의 작품은 현상계의 어떤 물상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할지라도 굳이 그 형태적인 가치와 연관성을 지을 필요는 없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산정의 작품은 형태 또는 형상이 문제가 아니라, 선이 지어낼 수 있는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기에 그렇다.

1950년대말에서 1970년대의 작품에서는 선보다는 점에 대한 집중적인 탐구가 있었다. 이는 조형적인 요소에서 그 첫째 과제인 점에 대한 고찰이라고 볼 수 있다. 선의 미학을 탐구하기 전에 점에 대한 의문부터 해결해야 된다는 자각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점이 다른 점으로 이동함으로써 선이 만들어지는 수학적인 정의가 아니더라도 점은 그림에서 선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조형적인 요소이다.

 

 

점과 선에 대한 탐구는 과연 그림에서 독자적인 공간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발단한다. 일련의 ‘점의 변주’ ‘선의 변주’ 연작은 형태 이전의 순수한 점과 선 그 자체만으로도 독립적인 그림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점에 대한 탐구는 ‘비명’ ‘장생’ ‘즐거운 비’ ‘구름이 모여드는 공간’ ‘구름이 흩어지는 공간’ 따위의 작품으로 이어지면서 자연의 이미지를 점만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여기에서 산정은 점이나 선이 종이라는 평면공간 위에 어떻게 놓여야 하는지 그 방법론을 주시하고 있다. 이는 공간, 즉 여백과의 관계를 통해 점이 수학적인 의미를 뛰어넘는 조형적인 가치를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검증이라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산정의 점과 선에 대한 탐구 또는 탐색은 수묵화로서는 전혀 새로운 발상이었다. 수묵화에서 점과 선은 항상 형태의 근본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주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점과 선을 문인화 또는 산수화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순수한 의미에서의 점과 선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든지 그림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확인토록 한 것이다. 여기에는 추상표현주의라는 서구의 현대미학이 크게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바꾸어 말하면 서구현대미학을 통해 수묵화의 점과 선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기능과 역할을 회복시켜 준 셈이다.

 

      

 

이는 전통의 굴레에 갇혀 있던 수묵화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의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산정은 결과적으로 수묵화가 추상세계로 진입하는데 그 선도적인 위치에  서는 계기를 마련했고, 오늘까지 그 위상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정은 ‘점의 변주’ ‘선의 변주’ 연작 이외에는 순수추상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았다. 작품 명제가 말하고 있듯이 그의 작품은 언제나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심 및 탐색이라는 분명한 입장으로 일관해 왔다. 형태를 떠난 순수추상의 세계보다는 현상계에 존재하는 물상에 대한 부단한 관심과 애정을 보내는 것이 보다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겼는지 모른다. 의식세계, 또는 감정세계에 의존해서는 자칫 조형적인 논거가 궁색해질 우려도 있거니와 일관성을 가지기도 어렵다는 점을 고려한 선택인지 모른다.

점과 선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든지 변주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자연과 인간을 중심으로 한 현상계에 시선을 고정시킨 것은 현상계를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으로 보았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추측은 ‘사람들’ 연작 이전의 자연현상 및 자연풍경을 대상으로 한 작품들이 뒷받침한다. ‘산’ ‘우물’ ‘잠자는 새’ ‘산’ 따위의 명제가 시사하듯이 자연풍경 및 자연현상을 극단적으로 간결하게 요약하고 함축하고 있다. 점과 선이라는 지극히 간소한 조형언어로도 자연의 이미지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산정은 ‘사람들’ 연작을 시작한다. ‘사람들’이란 명제는 순수한 우리말인데, 이는 ‘인간’이라는 한자어와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인간이라는 한자어는 어쩐지 학문적인 용어이거나 관념적인 이미지를 지칭하는 듯싶은 느낌이다. 이에 비해 ‘사람들’이라는 용어는 무언가 피가 통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듯한 현실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그렇다. ‘사람들’이라는 용어는 관념 속의 존재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살아 있다는 현실성과 결부된다. 동적인 존재의 이미지가 강조되는 것이다.

산정이 ‘사람들’ 연작을 시작한 동기는 바로 정지해 있는 존재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동적인 존재로서의 가치를 중시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머리와 팔다리 그리고 몸통으로 이루어진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상 중에서 가장 풍부한 자기표현력을 가지고 있다. 머리와 팔다리 그리고 몸통으로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낸다. 어디 그 뿐인가. 얼굴 표정으로는 내면적인 세계인 희로애락의 감정표현을 능숙하게 구사한다. 언어가 아니더라도 단지 신체만으로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자기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산정은 바로 이와 같은 풍부한 자기표현력을 지닌 ‘사람’을 대상으로 선정한 것이다. ‘사람들’ 연작은 달리 표현하면 ‘사람들 변주’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점과 선으로 다양한 변주를 모색했던 산정이고 보면 ‘사람들’ 연작을 변주의 개념으로 접근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람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능력은 물론이고, 사람과 사람이 이합집산하면서 이루어내는 리듬은 그 어떤 표현대상보다도 아름답고도 생동감이 넘친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움직이면서 만들어내는 질서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리듬이야말로 그 어떤 대상보다도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매스게임이나 리듬체조 또는 군무 따위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 하나 하나가 모여 집단을 이루면서 어떤 정해진 규칙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그 동적인 아름다움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산정은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본 것이다.

산정은 사람이 지어낼 수 있는 다채로운 표현력을 다양한 시각으로 풀어낸다. 조형의 변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느 면에서 현대회화의 속성 중에서 조형적인 변주야말로 가장 중요한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천변만화의 표정과 몸짓으로 스스로룰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지어내는 리듬이 조형적으로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실증하려는 것이다. 산정의 작품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이미지의 연속성이다. 연속무늬를 연상시키는 이미지의 연속성은 다름 아닌 인간만의 세계를 의미한다. 인간과 동물이 전혀 다른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그 연속적인 행위를 통해 지적인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산정은 세상에 대해 할 말이 많다. 그러나 말을 아끼고 있다. 아니, 하고 싶은 말을 작품을 통해 전하고 있다. 작품에다 투사시키는 산정의 말은 예술적인 이상과 일치한다. 산정이 탐색해온 수묵의 여행, 즉 수묵의 현대적인 어법은 어떤 경우에라도 그 출발점에 위치한다. 산정을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않거나 상관없이 적어도 수묵의 현대화라는 숙제 앞에서는 누구도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산정은 수묵의 현대화를 통해 자신을 중심에 둔 채 커다란 거미줄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 거미줄 중심에서 내다보는 세상은 결코 거미줄을 벗어날 수 없다. 이는 단지 산정 개인적인 시각의 범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산정이 말을 아끼는 진정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누가 부처님의 손인가를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2006년 월간 '아트코리아'>                                                               

 


'명작의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작의 길 (15) - 김경렬  (0) 2007.10.08
명작의 길 (14) - 이왈종  (0) 2007.10.04
명작의 길 (12) - 정우범  (0) 2007.09.24
명작의 길 (11) - 박용인  (0) 2007.09.15
명작의 길 (10) - 민경갑  (0) 2007.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