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 (12) - 정우범

펜보이 2007. 9. 24. 10:49

 

 

          

 

 

 정우범의 수채화

 

 아름다운 색채언어로 노래하는 서정시

 

  신항섭(미술평론가)


  그림을 배우는 데는 길이 있지만 독창적인 세계를 만드는 일에는 길이 없다.  다시 말해  창조적인 조형세계를 추구하는 일은 누가 일러주어 될 일이 아니라 결국 혼자만의 문제라는 뜻이다.  어쩌면 배운 사실을 잊어버리는 그 순간부터 독창적인 세계가 열리는지 모른다.  배운다는 것은 기정사실, 고정관념에 길들여지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우범이 일반적인 수채화의 이미지를 떨쳐버릴 수 있었던 것도 배우는 과정에서 익힌 전통적인 수채화 기법과 완전히 절연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의 수채화는 이미 독창적인 세계로 들어가 있다.  물론 표현기법에서 부분적으로는 다른 작가와 유사한 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시각에서 보면 다른 작가와 확연히 구별되는 세계를 확립하고 있다.

‘그린다’는, 즉 ‘묘사한다’는 일반적인 방식과는 사뭇 다른 추상적인 표현기법이야말로 그의 작업을 별개의 조형세계로 이끄는 요인이다.

  그의 작업은 처음부터 정해진 형태를 추적해 들어가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형태를 의식하지 않은 채 작업하는 순간에 반응하는 미적 감성이 지시하는 대로 추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간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형태를 찾아내면서 작업을 마친다.  작업하는 순간의 미적 감성을 자유롭게 방치하다가 불현듯이 형상을 의식했다는 식이다.  이처럼 그는 작업방식에서 역순의 논리를 채택하고 있다.

  그에게 소재 및 대상의 형태는 항상 최종적인 문제이다.  이미 마음속에 그려진 상이 있을지라도 거기에 매이지 않고 일단은 표현하는 그 순간의 흥취에 이끌린다.  따라서 색채를 선택하고 배합하며 종이 위에 그 색채를 배열하는데 심취한다.  이 과정에서 색채간의 대비는 물론이요, 조화, 통일을 염두에 둔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직 형태는 의식하지 않는다.  어쩌면 작업의 대부분은 색채 포름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기에 그림의 어느 부분을 보더라도 색채 포름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형태 이전에 색채 포름의 대비, 조화, 통일만으로도 시각적인 즐거움이 크다는 사실을 실증하려는 듯한 태도이다.

 

          

 

  그의 작업에서 순수한 색채 포름은 형태를 의식하지 않음으로써 추상적이다.  그의 작업은 전체적인 시각에서 보면 구상이지만 작업과정은 오히려 추상에 한층 가깝다.  구체적인 형태를 전제로 하는 작업이 아닌 것이다.  물론 소재 및 대상이 실재하는 것들이고, 그러한 형태가 그림 속에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거기에서 현실적인 공간감은 무시된다.  단지 소재 및 대상의 형태만을 볼 수 있을 뿐, 명암 원근 따위의 재현적인 작업이 갖추어야 할 조형적인 기본조건에 개의치 않는 듯한 인상이다.   

  그가 다루는 소재 및 대상은 일반적인 시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소재 및 대상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인 문제 또는 역사적인 문제 등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말은 아니다.  이전의 작업 중 운주사의 불탑 및 불상을 비롯하여 선암사, 낙안읍성 등 역사적인 유물 또는 유적을 집중적으로 다룬 것은 역사인식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그의 관심은 일상적인 삶의 공간에 놓인 정물을 포함하여 아름다운 자연과 인간, 그리고 사회적인 동물로서의 인간이 남긴 삶의 자취를 더듬어 가는데 있다. 

  그러나 그가 작업의 중심에 놓는 것은 순수미이다.  인간으로서의 현실 및 역사인식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회화로서의 미적 가치 즉, 예술성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아무리 사상 및 철학적인 깊이가 담긴 그림일지라도 조형적인 아름다움이 없다면 회화로서의 가치는 논할 수 없다.  그는 이와 같은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색채 포름에 심취하는 것도 다름 아닌 조형적인 아름다움과 관련한 새로운 표현적인 가치를 창출하려는데 있다.

 

          

 

  그의 작품은 그 소재 및 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의 미감을 현혹시킬 만큼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자연의 아름다움과는 다른 인위적인 아름다움이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인간의 미적인 감각은 필연적으로 자연에 대응할 수 있는 창조적인 공간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예술이라는 공간이야말로 인간이 자연을 모방하여 이 지상에서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세계임을 확신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사실은 인간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의 원형은 자연에 있다는 점이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자연미의 모방이자 응용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의 작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창조적인 작가는 자연미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형태와 색채를 포함하여 공간구성 등에서 완전히 개별적인 해석을 덧붙인다.  소재 및 대상은 하나의 회화적인 동인이 될 뿐이다.  자연을 깊이 관찰함으로써 터득한 미적 감성을 풀어헤쳐 놓고 그 자신의 조형적인 논리에 따라 하나하나 재구성한다.  주어진 조건으로서의 자연미를 일단 완전히 해체한 다음 그 자신의 미의식 및 미적 감각에 의해 재해석함으로써 재창조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생산되는 그의 수채화는 그림이란 과연 자연미에 필적하는 무한한 아름다움의 세계임을 확인시켜 준다.  세련된 선 그리고 색채가 만들어내는 포름의 그 세련된 아름다움을 보면서 인간의 미적 감각은 진정 조물주의 선물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그의 경우 이전의 작가들과 분명히 다른 조형세계를 보여주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그의 그림을 보면 생명을 지닌 유기체와 같다는 느낌이다.  평면 위에서의 일루전이 아니라 생명체가 살고 있는 생물의 세계처럼 보인다.  그러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세포분열을 거듭하며 형태가 증식하는 듯한 이미지로 보인다.  서로 다른 색채와 색채가 만나 예상치 못한 이미지들이 형성되어 가는 모양을 보면 유기체와 다름없는 생각이다.  이와 같은 유기체적인 생명력은 어디에 기인할까.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표현기법의 독창성에서 비롯된다.    그의 수채화는 종이 위에 형상을 그리는 일반화된 묘사방식과는 사뭇 다른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즉 종이와 물감 그리고 물이라는 세 가지 재료가 가지고 있는 각기 다른 物性(물성)을 표현행위와 결부시키는 것이다.  이때 이들 세 가지 재료가 지닌 물성이 효과적으로 그 기능을 발휘하는 데는 끝이 뭉툭한 붓이 이용된다.  마치 무쇠 솥을 씻는 풀뿌리 솔과 같은 형태의 붓을 연상할 수 있다.  이러한 붓에 물에 적신 종이를 놓고 물감을 묻혀 두드리는 방법으로 작업한다.  이렇게 하면 물감이 종이에 깊이 스며들게 되면서 종이와 물감이 일체가 되는 것이다.  물을 흡수하는 종이의 성질, 즉 물성을 이용함으로써 묘사에 의존하는 기존의 표현기법과는 다른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려지는 그의 수채화는 종이라는 재료가 가지고 있는 가벼움에서 벗어나고 있다.  수채화는 가벼운 그림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을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수채화에서 볼 수 있는 붓 자국을 거의 남기지 않는 것도 그 특유의 표현기법과 무관하지 않다.  서로 다른 색채의 물감이 종이 위에서 만나면서 서로의 영역을 침투하고 침투당하는 과정을 물성에 맡김으로써 우연성이 강한 이미지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묘미중의 하나는 작가 자신의 의지를 떠난 표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세련된 조형의 틀은 그 자신의 미감이 지시한다고 하지만 인위성이 억제되는 가운데 성립되는 세부적인 표현의 자연스러움은 바로 물성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의 수채화는 새로운 표현기법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고 있다.  색채와 색채가 만나는 접점에서 만들어지는 미묘한 색조의 아름다움은 회화의 가지고 있는 무한한 색채의 요술을 실감케 한다.  조작된 색채가 아니라 색채끼리 만나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우연의 색조변화는 당연히 그 자신의 색채감각에 의해 유도된다.  그는 색채를 색채로서만 한정시키지 않는다.  생명의 빛을 발하는 색채로서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반짝이는 생명의 환희가 그 빛과 더불어 들어와 살도록 하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자연의 형상들은 숨어들 듯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처럼 수줍게 자리하는 형상에서는 아릿한 서정적인 이미지가 감지된다.  선으로 인지되는 형상이 아니다.  실루엣과 같은 이미지로 파악되는 교묘한 형태미는 언제나 불확실한 상태로 유지된다.  그래서일까.  흡사 꿈속의 풍경처럼 아련한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의 수채화는 물이 만들어내는 색채의 순결성을 노래한다.  거기에는 색채의 순수함이 기거한다.  그는 수채화 물감이 가지고 있는 색채의 아름다움과 순결한 이미지를 시적인 언어로 다듬어낸다.  수채화로 노래하는 순수시라고 할까.  수채화의 맑고 투명함을 보석과 같은 빛나는 이미지로 바꾸어내는 그의 조형적인 상상 및 감각이 눈부시다.


<1999년 개인전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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