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 (15) - 김경렬

펜보이 2007. 10. 8. 07:41

  

  김경렬 작품세계


  빛의 땅을 지키는 영특한 존재들

 

  신항섭(미술평론가)



  어떤 이들은 사실주의는 끝났다고 단언한다. 형태를 눈에 보이는 대로 재현하는 일은 진부하다는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실주의라고 해서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림세계는 무한한 표현가능성의 땅이다. 기존의 종種이라고 할지라도 그 변종을 포함하여 전혀 새로운 종의 출현이 가능한 열린 대지이다. 우리는 김경렬의 작업을 통해 이를 목도하고 있다. 그의 그림은 사실주의의 변종이자 새로운 종임을 선언한다. 그는 사실주의가 진부하기는커녕 얼마든지 새롭게 해석될 수 있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아주 단호한 어조로 우리를 설득하고 납득시킨다. 반면에 사실주의는 진부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는 아주 명백한 언어로 그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첫 개인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숨겨진 실체를 탐색해 왔다. 눈에 보이는 세계 그 이면에 은닉하고 있는 또 다른 실체를 찾아내자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자연 그 어딘가에 자신만을 위해 마련해 놓은 특별한 잔치상을 받으려는 것이다. 그러한 시도가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한 그 구체적인 답은 최근 작업에서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사실주의라고 하는 그 견고한 땅에 새로운 씨를 뿌릴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어쩌면 사실주의라는 숨겨질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무모한 도전을 시작한 이래 미래의 지표 하나 없는 오리무중의 습지에서 홀연히 탈출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자신을 향해 비치는 한 줄기 서광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 빛이 안내하는 대로 의심 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가 자연만을 대상으로 했던 것은 아니다. 정물과 인물에도 제법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했다. 적어도 그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어떠한 형태든지 주저 없이 받아쓸 수 있는 구체적인 서술방식을 습득하는데 전력투구했고 그 노력에 따른 기술적인 완성으로 충분히 보상받았다. 자신을 노려보며 ‘어디 나를 잡아 먹어봐라’고 덤벼드는 그 어떠한 존재 앞에서도 뒷걸음치는 겁쟁이는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그는 날 세운 칼을 차고 ‘자신을 요리하라’고 오만하게 버티고 서 있는 거대한 고목과 대결하기를 좋아한다.

  최근 작업에서 그는 나무들의 지속적인 도전에도 지치지 않고 차례로 굴복시키고 있다. 화폭 속에서 아주 섬세한 감각과 능숙한 솜씨에 의해 요리되는 나무들의 모양을 보면 이제야말로 그 자신의 왕국 하나를 거뜬히 세울 수 있는 힘을 축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캔버스 안에서 도열하는 다양한 형태의 나무들은 저마다 개별적인 이름을 얻으며 그를 경배하고 있다. 그가 부여하는 형태미를 그대로 수용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거기에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무들은 고고한 자태를 잃지 않는다. 그만의 예술왕국을 위한 동반자가 된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무엇보다도 나무들 스스로 그에 의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부여되는 영속적인 생명을 거부해야 할 어떠한 명분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나무 그림은 기이하다. 도무지 미진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낼 수 없는 너무도 명확한 형태미 때문일까. 도대체 흠 잡을 데 없이 명료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그 형태미에서는 살기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스치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살을 베일 것만 같은 날카로운 감촉으로 묘파한 형태미에 스며든 사실성에는 살기가 감돈다. 달리 표현하면 살기는 생명의 맥박을 의미한다. 실제의 형태를 능가하는 그 극명한 조형적인 해석은 눈에 보이는 실상을 보다 선명히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그는 판화를 위해 목판을 새기듯이 고조된 감정 또는 예민해진 조형감각을 이용하여 아주 명석하게 형태를 만들어간다. 여기에는 극렬한 명암이 도입된다. 빛과 음영을 가르는 날카로운 시각으로 치밀하게 형태를 찾아 들어가는 세필 묘사는 그 자신의 의식을 극도로 긴장시킨다. 빛과 음영의 대비로 긴장된 상황을 조성해가면서 우리의 시지각을 첨예한 감각 위에 올려놓는다. 실제와 일루전을 구분할 수 없는 애매한 상황 앞에서 우리는 단지 놀라움만을 거두어들일 수 있을 따름이다.

  물론 그 놀라움에 뒤따르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놓칠 수는 없다. 눈이 시릴 만큼 말쑥하게 서 있는 나무들은 자신의 존재를 사유의 창고 속에 감금해 놓고 있는 듯하다. 그 사유의 창고 속에서 나무들은 자신이 나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인간의 흉내를 낸다. 그러면서 차가운 이성으로 빛나는 자태를 거듭 가다듬는 것이다. 그처럼 의연한 자태야말로 그가 창조해낸 새로운 종의 실체이다.  

                       

        

 

  이처럼 나무들은 의인화되어 있다. 그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대지는 현실이 아니다. 그 자신의 영감에 의해 창조된 가상의 땅이다. 빛과 음영이 퇴적층처럼 겹겹이 쌓인 정적 위에 신기루처럼 존재할 따름이다. 그 무거운 정적은 나무로 하여금 사유 이외의 존재방식을 알 수 없도록 한다. 그 정적 속에서 나무들은 마치 은자처럼 또는 도인처럼 맑은 세상을 꿈꾼다. 그리고 나무들의 꿈은 우리의 의식세계로 침투한다. 우리의 의식세계로 들어오는 나무들의 꿈은 아주 경건한 이미지로 변환한다.

  나무가 꿈에서 깨어났을 때 우리는 세상을 향해 이전보다 맑은 시선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의식 및 감정의 정화가 이루어진 까닭이다. 그의 그림은 신기하게도 어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를 상상케 한다. 그것은 아마도 극단적으로 강조된 빛과 음영의 대비에서 비롯되는 시각적인 효과인지 모른다. 빛이란 영험한 것이다. 음영과 함께 했을 때 빛은 더욱 영특해지고 영험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빛은 암흑 속에서 유일한 믿음의 대상이다. 그 빛이 차가운 새벽 공기처럼 투명하고 맑아짐으로써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그의 그림에서 인위적으로 주어지는 빛은 나무 또는 다른 물상으로 하여금 스스로 존재의 명확성을 일깨우도록 한다. 빛에 의해 포획되는 물상들은 숨을 곳이 없다. 낱낱이 드러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에 의해 선택된 물상들 스스로가 자의식을 되찾는 일이다. 주어진 존재로서의 소명을 다하고 이제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가상의 존재가 그가 일구어낸 회화적인 공간에서 실상처럼 거주할 수 있게 된다. 그의 그림에는 자기생명력에 대한 간절함이 담겨 있다. 그의 손에서 떠나는 순간 영속적인 생명의 존재로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간절함을 담는 것이다. 나무들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 가장 가까이에서 그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려는 동반자인 것이다.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한 생각을 했다. 한국의 전통도자기를 소재로 하는 정물화를 그리기로 한 것이다. 일본인 감상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리라는 예상에서 무언가 선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로 조선백자 및 분청사기 소품들이지만 그 모양이 아름답다. 일부러 멋을 내지 않은 소박한 형태미가 매혹적이다. 조선도자기가 왜 감상할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그림을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명민한 미적 감수성은 단순히 형태의 아름다움을 좇는데 그치지 않고 구운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임을 확인시키기라도 하듯이 도자기마다 생기 넘치는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그는 이들 조선백자 소품을 아주 명석하고도 영특한 이미지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의 신비란 이런 것이 아닐까.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이게 만드는, 그래서 거부할 수 없도록 만드는 어떤 독재권력 같은 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도자기 그림은 정물화의 형식을 갖추기는 했으나, 나무의 대체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 도자기들은 나무들이 일구어 놓은 땅에 놓여 있다. 흙의 이미지와는 다른 나무들의 땅은 조금은 환상적이다. 의인화된 나무들처럼 도자기들 또한 스스로의 사고체계를 지닌 존재처럼 보인다. 이는 역시 빛과 음영의 미묘한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시각적인 효과인 동시에 정서인 것이다.

  그는 새로운 땅을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분신들이 존재할 수 있는 영원의 시간을 끌어들였다. 그 시간 속에서 생명의 리듬이 들려온다. 빛이 허용하는 땅에서 생명의 리듬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2003년 일본 도쿄 "미술세계화랑" 초대전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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