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 (10) - 민경갑

펜보이 2007. 9. 9. 21:11

 

 

  유산 민경갑의 작품세계 

 

  ‘자연 속으로’에서 ‘무위’로

 

   신항섭(미술평론가)


 

서양에서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때 시지각의 개념이 적용된다. 시지각은 눈으로 물상을 인식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이는 ‘본다’는 용어의 개념을 충족시킨다. ‘본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활동임과 동시에 ‘눈’을 통한 시각적인 이해를 의미한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때 물상 하나 하나에 대한 시각적인 인식에 머물지 않고, 그 전체 또는 본질을 직시하는 ‘관조’의 개념을 따른다. 따라서 ‘눈’의 효용성이 거론되지 않는다. 아름다움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방식 때문인데, 이는 물상에 대한 분석적인 이해가 아니라 총체적인 인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동양의 그림은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때로는 신비적이다.

유산 민경갑의 그림도 이렇듯이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신비적인 요소로 치장한다. 우선 그가 사용하는 종이와 수묵 및 채색물감이라는 재료 자체의 특성이 그러하다. 자연물질로서의 본성을 바꾸지 않은 채로 가공되는 이들 동양재료는 작업과정에서 서로 신속하게 반응하며 융화된다. 다시 말해 종이와 물감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몸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종이가 캔버스처럼 두터워도 마찬가지다. 선을 그리거나 면을 만드는 경우에도 종이에 깊숙이 침투하고 침윤함으로써 먹이나 채색물감 자체의 존재성이 표면에서 증발한다. 이렇듯이 먹이나 채색재료의 질료를 종이의 표면에 거의 남기지 않는 표현방법은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신비적인 조형어법을 성립시키는 요인 중의 하나이다.

그는 오래 전부터 동양의 재료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관찰하고 연구하면서 대자연에서 배태한 동양사상을 그림과 일치시키는 방법을 모색해왔다. 그림이란 시각적인 언어이면서 동시에 그 언어를 통해 사상을 담는 그릇의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눈에 보이는 사실에 집착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사실은 오히려 대자연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설명적인 요인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형태가 존재치 않는 비구상적인 화면구조에까지 도달한 적이 있다. 형태를 완전히 소거한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갔을 때 금욕적인 세계가 만들어내는 관념의 허구를 보았다. 형태를 완전히 벗어났을 때 관념은 이미 그림의 영역을 벗어나 순수한 정신으로만 허공을 떠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순수한 정신이 그림과 동거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지 형태의 옷을 입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다시 형태의 도입을 진지하게 검토하게 됐다. 그 이후 형태의 옷을 입게 된 관념은 허공에서 내려와 동양사상 및 정서를 구현하는 실천적인 하수인이 된다. 관념에게 제공되는 옷은 일반적인 동양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색채와는 사뭇 다르다. 천연재료를 이용하여 만들어지는 그의 물감은 순도 높은 색상을 제공한다. 색채가 그처럼 투명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경우가 그의 작품 말고 또 있었던가. 검정 빨강 파랑 노랑 초록 어떤 색깔도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듯 맑고 투명하여 그 자체만으로도 시각적인 쾌감은 물론 감정의 정화가 이루어지는 기분이다. 단지 그림과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맑아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색채이미지 및 정서는 그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설득력의 하나이다.

그의 그림은 대자연에 대한 직관의 표출이라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러기에 대자연의 물상은 간명하고 단출한 이미지로 압축된다. 설명적인 요소는 가능한 한 억제하면서 몇 가지로 한정되는 물상의 형태를 작품의 주제에 따라 다양하게 조합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그림에 등장하는 소수의 조형언어(소재의 형태 및 포름)는 상징적인 이미지로 처리되어 여러 작품을 통해 반복하여 등장한다. 반복되는 조형언어는 자연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것들로서 산, 깃발, 소나무 또는 불특정의 나무, 대나무, 바위, 매화, 백련, 천 자락, 불상 따위이다. 이들 소재는 단순한 그림의 구성요소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상징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더불어 구성적인 간결한 윤곽선이나 평면적인 색채 포름으로 변형되거나 변주되면서 자연미라는 하나의 통합된 질서 속으로 편입된다. 

자연에서 채택되는 소재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이들 소재는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만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아니다. 동양인의 삶을 지배하는 자연사상 또는 생활철학을 그림으로 용해시키는 기능을 한다. 토속신앙을 포함하여 음양사상, 도가사상, 불교사상, 유교사상 따위의 전통적인 삶을 지배하는 정신세계를 함축하고 은유하며 상징하는 도구로 이용된다. 이들 소재는 그 어떤 무거운 주제도 아주 경쾌한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놓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소재들의 형태 및 색채가 어떤 식으로 해석되는가에 따라 그림의 내용 및 정서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는 소재의 선택 및 배치 그리고 구성을 통해 극도로 절제된 간명한 화면구조를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위에 열거한 전통적인 동양사상들을 아름다운 이미지 속에 용해시키는 것이다. 더불어 색채의 대비에서 오는 시각적인 긴장과 여백을 통해 맛볼 수 있는 정신 및 감정의 이완을 적절히 안배한다. 긴장과 이완이 교차하는 미묘한 시각적인 체험은 색채의 투명성과 더불어 지극히 간소한 화면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상이나 철학은 결코 두려운 대상이 아님을 역설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 그림이란 어떠한 경우에라도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다.

그가 직관적인 방식으로 제시하는 자연미는 관조된 아름다움이다. 그 관조된 아름다움은 보여지는 실체가 아닌 대자연 속에 내재한 본질을 의미하는데, 이를 아름다운 조형언어로 변환함으로써 자연과 직접 마주했을 때와는 완연히 다른 지적인 희열을 맛보게 된다. 지적인 희열이란 사실적인 형태를 간결하게 압축하고 생략하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세련된 조형미에 대한 정신 및 감정의 감화를 의미한다. 즉, 지적 조작에 의해 만들어지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반응하는, 예민한 미적 감수성에 의해 자극된 감정 및 정신이 극단적으로 고조되는 상황을 말한다.

이렇듯이 형태에 대한 사실적인 이해를 초월하는 관념의 형상화는 그의 작업이 도달하는 필연적인 결말이다. 또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압축된 조형언어 및 어법은 필수적이다. 관념은 스스로 나태하지 않는 가운데 이상향을 지향하는 한 맑고 고결한 정신의 그늘을 거느린다. 그 정신의 그늘이 선과 색채의 포름이라는 조형언어로 현현하여 아름다운 직관의 세계를 전개하는 것이다.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본질을 직시하는 데는 물상과 마주했을 때 일체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비워낸 순수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물상에 거짓없이 감응하고 반응하는 직관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그는 대자연에 버금가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이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 순수미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시각적인 정화가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일체의 고정관념으로부터 이탈한 맑은 영혼만이 대자연의 본질, 즉 우리를 감동시킬 수 있는 미적 진실 혹은 신령스러운 기운과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신령스러운 기운’이란 어떠한 외부적인 간섭이나 침해로부터 자유로운 대자연의 본성 또는 본질을 의미한다. 그 기운은 수묵화에서 말하는 ‘기운생동’과 유사한 개념이지만 시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조형언어로 구체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신령스러운 기운이 형태(구상 또는 비구상적인 이미지)를 통해 보여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자 노력했다.

대자연의 본질에 직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선 이후 일련의 행적을 보면 조형적인 변화와 함께 그 자신의 작업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는 필경 연륜에 따른 인생관이나 가치관 또는 세계관의 변화에 기인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자연과 인간의 관계설정에 대한 인식의 변화라는 측면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초기에는 물상의 형태미와 더불어 생명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다. 따라서 소재는 화조 영모 그리고 정물 따위가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면서도 일반적인 구륵법으로 상징되는 선묘 중심이 아니라 몰골법에 기초한 실험적인 방법을 구사했다. 그러므로 소재는 부분적으로 생략되거나 단순화되는 경향이었다. 이 때의 작업에서 그는 선염 또는 발묵이 만들어내는 우연적이고 신비적인 이미지에 도취되었다. 선염이나 발묵은 비록 구체적인 형태를 드러내는 데는 소극적이지만 내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함축하고 내포시키는 표현기법으로는 적절하였다. 무엇보다도 동양의 자연주의 및 신비적인 정서를 표현하는데는 탁월했다. 그 이후 그는 선염을 기조로 하는 독특한 표현방식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여 종이와 물감이 일체가 되는 독특한 표현기법을 완성하게 된다.

 

  

 

 그의 작업은 몇 가지 과정으로 변화되어 왔는데 그 첫째는 자연과의 조화, 둘째는 자연과의 공존, 셋째는 자연 속으로, 넷째는 무위자연이라는 제재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자연에 대한 그의 인식은 인간에 대한 동반자적인 존재로서 출발한다. 인간의 삶을 포용하는 자연과 그 자연에 귀속되는 인간이라는 관계가 그림의 기본적인 골격이다. 그러므로 자연을 바라보는 일, 또는 직관이라는 문제에서 언제나 자연 속의 인간이라는 시각을 전제로 한다. 그러면서도 인간이 인식하지 않는 자연이란 무의미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본주의는 아니다. 자연의 질서에 동화되고 편입되는 인간의 존재성만이 문제될 따름이다. 그러기에 그림의 내용에서 인간의 존재성이 선명히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의 존재성을 그림 속에서 지우고자 한다.

그가 최근에 명제로 채택한 ‘무위’라는 개념은 인간의 존재성을 비워낸 이미지가 아니라, ‘순수한 자연상태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다. 일체의 감정의 찌꺼기나 의식의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는 자연미의 순수한 원형 또는 그 진면목을 보자는 것이다. 물론 그 순수성은 그 자신의 미적 감각 및 미의식에 의해 걸러진 조형적인 세련미와 함께 한다. 아마도 때묻지 않은 자연의 본래 모습을 가정한다면 다름 아닌 ‘무위’의 상태를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전제 아래 화면은 이전보다 한층 간소하게 처리된다. 설명적인 요인을 줄임으로써 자연의 순수미는 시각적으로 더욱 명쾌하게 떠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위’의 연작이 가지고 있는 특징 중의 하나는 화면의 구조를 극단적으로 간결하게 처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화면은 크게 두세 개의 면으로 분할되는, 평면적인 구조를 기반으로 하여 한두 종류의 압축된 물상의 이미지가 배치되는 형식이다. 분할되는 화면에서 하얀색은 여백개념을 충족시키는 무한공간을 담당한다. 그리고 청 적 황이나 검은색 따위의 음양오행을 상징하는 색채들이 나머지 부분을 분담한다. 여백으로 상징되는 하얀색 색면에 극렬히 대비되는 색채 포름이 만들어내는 시각적인 긴장은 청명한 가을하늘처럼 끝없이 투명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 울림은 대자연의 순수성이 만들어내는 ‘신령스러운 기운’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무위’ 연작은 일체의 기교를 배제한 조형의 순수성을 추구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형태를 압축하여 함축적인 이미지로 귀결하고자 한다. 물론 여기에서 소재들의 이미지는 상징적인 언어로서의 기능을 한다. 동양사상 및 생활철학을 상징하는 압축된 소재들의 이미지는 도상이나 부호처럼 최대한 단순화되면서 상징적인 언어체계를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징적인 언어, 즉 단순화되는 소재들은 기꺼이 자연 및 조형의 순수성을 위해 봉사한다. 고유의 사실적인 형태미를 희생하여 그가 주재하는 ‘무위’의 세계 그 일원으로 편입하는 것이다.

 

 

‘무위’를 통해 도달한 그의 조형세계는 오염된 우리들의 눈과 마음을 말끔히 씻어내는 강렬한 정화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대자연에서 추출되는 순수미가 지극히 투명한 색채이미지로 환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투명한 색채이미지는 그 자신의 미의식이 걸러낸, 대자연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빛나는 생명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빛나는 생명의 아름다움에 감염되는 기쁨을 선물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그 순수한 아름다움에 속수무책 현혹될 수밖에 없다.

 

<2005년 일본 도쿄 '미술세계화랑' 초대전 서문>















'명작의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작의 길 (12) - 정우범  (0) 2007.09.24
명작의 길 (11) - 박용인  (0) 2007.09.15
명작의 길 (9) - 김동철  (0) 2007.09.05
명작의 길 (8) - 이두식  (0) 2007.08.29
명작의 길 (7) - 임종두  (0) 2007.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