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 (14) - 이왈종

펜보이 2007. 10. 4. 22:38

 

                       

  

                                                                                                                 중도의 세계(입체)

 

이왈종의 작품세계

 

해학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제주도의 낭만

 

신항섭(미술평론가)

 


철학자는 문자언어를 통해 사유의 지평을 넓혀간다. 반면에 예술가는 조형언어를 통해 감성의 폭을 넓혀간다. 예술가의 조형언어란 형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형태는 당연히 자연에 존재하는 물상이거나 그를 응용한 인조물이기 십상이다. 자연물상 하나 하나가 지닌 독특한 형태미를 인지해 가면서 조형적인 언어의 폭을 넓혀 가는 것이다. 화가의 조형적인 사고란 체험한 사실에 근거하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화가 자신을 에워싼 자연환경이야말로 그 화가가 구사하는 조형언어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화가의 조형적인 사고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자연환경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왈종이 서울을 떠나 제주도에 거처를 마련한 지도 벌써 십 수년이 되었다. 그가 화가로서 운신하기 좋은 중앙무대를 뒤로한 채 홀연히 제주도행을 결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화가로 입문한 이래 착실히 다져온 인기작가로서의 입지를 내팽개치듯 던져버리고 여러 가지로 여건이 불리한 지방작가가 되기를 주저치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한 작가로서의 입지를 구축하는데 가장 중요한 시기인 40대 후반에 정보가 부족하고 교통이 불편한 섬으로 화실을 옮긴 것은 정녕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의 제주도행을 명쾌히 설명해 줄 수 있는 답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십 수년이 지난 오늘, 그리고 전시회를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그의 최근 수년 동안의 작업을 보았을 때 그 의문은 일시에 풀린다.

주지하다시피 제주도는 화산활동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지질구조에다가 한반도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어 아열대에 근접하는 기후조건을 갖춘 특별한 섬이다. 따라서 뭍에서는 볼 수 없는 무성한 아열대 식물 군락이 곳곳에 산재하고 섬 전체가 푸른 색깔의 청정해역으로 둘러싸여 있을뿐더러 바람과 여자와 돌이 많은 환경 탓에 예로부터 독자적인 문화가 형성되어 왔다. 무엇보다도 육지의 지방 사투리와는 전혀 다른 방언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어쩌면 이국적인 정서가 물씬 배어나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육지와는 사뭇 다른 자연환경은 자연물상을 통해 조형적인 사고 및 시야를 넓히는 화가에게는 필경 무언가 다른 감각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그가 제주도를 택한 가장 큰 이유는 무언가 조형적인 변화를 모색하겠다는 강한 열망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서울을 떠나기 전 독자적인 발묵기법에 의한 수묵산수화를 버리고 ‘중도’ 연작을 시작하면서 어쩌면 이미 제주도행을 모의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수묵화를 가지고 제주도를 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을까.

이를 뒷받침하듯 실제의 제주도 풍경은 수묵산수화를 하기에는 그다지 적합한 형태라고는 할 수 없다. 밋밋한 구릉의 형태인 산세는 물론이요, 계곡이 깊지 않고 표면이 거치른 화산암 등 전통적인 수묵산수화를 구사하는 데 그리 합당한 조건은 아니다. 화산으로 생겨난 특이한 모양의 자연경관 자체가 변화무쌍한 육지의 산수와는 사뭇 다른 까닭이다. 만일 산수화를 한다고 할지라도 기존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준법이 강구되어야 할 판이다. 한마디로 제주도 풍경은 고산준령 및 기암괴석 그리고 심산유곡이 한데 어우러지는 전래의 수묵산수화의 요건에는 미흡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수묵산수화와는 다른 ‘중도의 세계’라는 전혀 새로운 화풍을 시도하고 있는 참에 불현듯 제주도로 떠난 것이었다. ‘중도의 세계’는 말하자면 제주도로 가기 위한 조형적인 포석이었는지 모른다. 그가 새로이 창안한 ‘중도의 세계’란 기존의 조형개념으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 파격으로 넘친다. 그런 파격이야말로 제주도라는 섬으로의 이주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빌미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제주도에 조그만 화실을 마련한 이후에도 주변의 염려와는 달리 화단활동이 위축되거나 단절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여기 저기 중요한 기획전을 비롯하여 간헐적인 개인전, 그리고 신문 연재물의 삽화 따위를 통해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했다. 무엇보다도 제주도 생활을 하면서 ‘중도의 세계’ 연작은 점차 물리칠 수 없는 확고한 조형세계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다양한 재료 및 기법에 대한 모색을 거듭하는 가운데 기법은 익어가고, 선은 한결 유연해지고 있었다. 기존의 산수화와는 완연히 다른 자유로운 필법을 구사함으로써 그에 상응하는 물상의 형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기존의 필법이나 화법과도 비교되지 않는 선묘방식은 개별적인 조형성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기에 이른다.

‘중도의 세계’는 전통적인 조형개념을 일시에 부정하는, 가히 혁명적인 조형어법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화풍이다. 그 조형어법의 요지는 물상의 존재방식이 자유롭다는데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물상에는 위아래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중도의 세계’는 이를 철저히 부정한다. ‘중도의 세계’에서 물상은 상하전후좌우 구별 없이 자유자재로 배치된다. 그러기에 하늘과 바다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공간개념에서 말하는 안과 바깥도 없다. ‘중도의 세계’ 연작을 보면 모든 물상은 마치 무중력 상태인 우주선 안처럼 공중을 떠돌아다니는 듯하다. 어찌 보면 뒤죽박죽인 상태로 제시된다.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도대체 무질서의 극치인 것이다. 물상의 크기 문제 또한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확대되거나 축소된다.

 

                          

 

이러한 조형어법은 공자가 말하는 중용의 미덕에 근거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물상일지라도 모두 고유의 존재가치가 있다. 무엇이 특별히 더 낫거나 부족한 것이 있을 수 없다. 모든 존재는 아름다운 이 세상을 조화롭게 가꾸는데 한 몫을 한다. 그것은 존재의 필요성, 즉 고유의 가치를 의미한다. 이러한 시각은 선입견이나 편견 또는 차별의 잣대를 갖지 않는데서 비롯된다. 모든 물상에 균등한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가능한 세계이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이렇듯이 중도의 사상에 근거한다. 중도의 사상을 조형어법에 적용하게 되었을 때 그의 그림은 당연히 새로운 세계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제주도 생활은 바로 ‘중도의 세계’를 확실한 조형어법으로 굳히는데 가장 적합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고정관념으로 굳혀진 기존의 조형개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조형적인 사고의 전개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일체의 외적인 간섭으로부터 해방된, 또는 고립된 생활을 가능케 하는 환경적인 여건이 만들어지는 까닭이다.

그는 제주도 생활을 하면서 열정적으로 새로운 재료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닥지를 물에 불려 두터운 종이를 만들었고, 수묵 및 채색 물감 대신에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다. 그리고 호분을 바탕에 깔아 질감효과를 얻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나무로 만든 물바가지나 빨래판 따위의 목기에다 부조형식의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뿐더러 도자기 및 도조작업을 포함하여 철사에다 물에 불린 한지를 붙이는 방식으로 제작되는 입체작업과 천 조각을 이용한 조각보작업 따위로 그 표현영역을 넓혀간다.

 

                     

 

재료가 달라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새로운 재료는 화가에게 새로운 조형적인 사고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한지를 사용하면서도 입체적인 질감, 즉 물에 불린 한지를 꼬아 두터운 한지 위에 붙여 부조와 유사한 선을 만드는 형식도 닥이라는 재료를 사용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역시 호분을 사용하게 된 것도 두터운 닥지를 사용하는데 따른 결과였다. 목기를 이용한 작업도 마찬가지다. 입체적인 형태를 가지는 목기에다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시각적으로 입체를 평면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따라서 입체적인 재료의 특성을 보다 효과적으로 살리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부조형식의 작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재료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다각적인 면에서 연구함으로써 점차 평면조건을 탈피하여 입체적인 공간개념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가면서 조형세계의 폭을 넓히게 된 셈이다. 그리하여 도자기 및 도조작업을 병행하게 된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전개라고 할 수 있다. ‘중도의 세계’ 연작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그 자유로운 형태를 추구하는, 즉 격식을 개의치 않는 활달하면서도 개방적인 필선은 이미 모든 형태의 조형적인 변주를 약속하고 있었다. 전통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가운데 자유롭고 폭넓은 사고의 전개를 유도하는 필선은 희화적인 요소도 포함하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무구한가 하면 한편으로는 세련된 맛을 동시에 품고 있는 필선을 통해 그는 광활한 조형의 대지를 꿈꿀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현대갤러리에 출품되는 작품은 크게 여섯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물에 푼 닥을 두텁게 붙여 만든 판 위에 음각형태의 선조를 새긴 뒤 채색작업으로 마무리하는 방식의 평면작업이다. 주로 제주도 풍경을 중심으로 하는 이 작업은 회화적인 감각 및 역량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다양한 형태의 작업 그 골격을 이룬다. 그 둘은 목판에 각을 한 뒤 닥지로 떠냄으로써 부조와 같이 만들어진 요철의 종이판에다가 채색을 덧입히는 작업이다. 이 판화는 작품마다 일일이 채색을 덧입힌다는 점에서 종래의 복수 판화와는 다른 오리지널 개념이 적용된다. 이 작업의 내용은 화조화의 소재를 다루는 한편 한일월드컵에서 응원하는 붉은 악마들로 화면을 채운 전면회화 형식 따위로 되어 있다. 그 셋째는 두터운 닥종이 위에 종이를 꼬아 붙여 만들어진 선묘형식의 작업이다. 이 역시 채색으로 마무리된다. 그 넷째는 도자기 작업이다. 주로 향로의 형태로 만들어지는 이 도자기작업은 에로틱아트의 영역으로 구분되면서도 실용성을 중시한다. 화산재로 이루어진 제주도 흙의 거친 성분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면질감과 투박한 형태미는 친화력을 높인다. 도조작업에서는 무엇보다도 노골적인 성희를 통해 희화적이면서도 해학적인 이미지를 구사함으로써 인간사를 풍자한다. 그리고 다섯째는 철사로 골격을 만든 뒤 그 위에 물에 불린 닥을 붙여 나무 인물 동물 따위의 형태를 만드는 입체작업이다. 그 여섯은 얇은 금판에다 판금을 하는 작업이다. 이는 금니화를 연상케 하는데 금이라는 재료 때문인지 그 화려한 시각적인 인상은 매우 강렬하다. 이에 덧붙여 도조작업에서는 도자기 표면에 금박을 입히기도 한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그는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물론 재료의 다양화를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잠재적인 재능을 거침없이 토해내고 있다. 그에게서 창작이란 평면과 입체라는 공간적인 구분조차도 뛰어넘는 통합된 조형적인 사고 및 행위의 결과로서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이처럼 다양한 재료의 사용은 물론이요, 조각이나 도조의 영역까지 확장하는 일 자체가 설득력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그의 작업에 기꺼이 설득 당한다. 납득할 수 있는 작업인 것이다. 적어도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는데 따른 어눌함이나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는데 따른 어색함이 보이지 않는다. 어떤 재료이든 어떤 장르이든 능청스러우리만큼 아주 자연스럽게 소화해내고 있다. 새로운 재료나 새로운 분야에 들어가서 기술적인 완성을 추구하는 작업이 아닌 까닭이다. 그 자신에게 주어진 독자적인 미적 감수성에다 예술적인 세련미를 가미함으로써 아름다운 형태미를 만들어내는 데 남다른 감각을 발휘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의 작품에 내포되고 있는 공통적인 정서 또는 조형적인 특징은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즉, 개방적이고 낙관적이며 해학적인가 하면 희화적이고 낭만적인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면 성희, 즉 에로틱한 이미지이다. 특히 에로틱한 이미지는 간접적이거나 우회적이 아니라 직접적인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놀랍다. 이제까지 성적인 문제는 은밀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따라서 성희의 모습을 그림 속에 담는 것은 금기되다시피 했다. 노골적인 성희를 드러냄으로써 세간의 화제가 된 전시가 없지 않았으나 예술적으로 승화시키지 못했다는 평가에 머무는 예가 많았다. 이에 비해 그가 다루는 성희는 개방적인 형태로 그림 속에 등장한다. 직접적이고 직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은 결코 난하지 않다. 이는 교묘한 조형적인 기교의 결과이다. 어쩌면 희화적이고 해학적인 선조로 인해 노골적인 성행위가 희화적이고 해학적으로 용해되기 때문인지 모른다.

최근의 평명작업에서는 선의 형태 및 흐름이 한결 힘차고 견고하다는 인상이다. 또한 간결하면서도 투박한 맛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유와 부드러움이 공존한다. 그 만큼 충분히 숙성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형태를 풀어나가는 조형적인 세련미와 더불어 음미할 만한 깊이를 가지고 있다. 밖으로의 확산보다는 안으로의 확장으로 이행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이는 조형적인 사고의 깊이와 함께 사상적인 골격이 굳건해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환갑이면 세상을 보는 안목이 저절로 무르익게 되어 있다. 일상적인 삶에서 오는 풍부한 경험과 창작으로 길들여진 미적 감수성 및 감각이 내놓을 수 있는 성과인 것이다.

 

                       

 

특히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그의 정신의 유희 및 그 흔적으로서의 개방성 낙관성 희화성 해학성 그리고 낭만성은 정형화된 틀을 거부하면서 독자적인 감각일 일깨우는데 전념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려는 듯하다. 사실 위와 같은 몇 가지 정서 및 조형적인 특징은 제주도라는 독특한 생활환경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다. 그가 처음 제주도에 발을 들여놓은 90년대 초만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국제적인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국제관광지에 어울리는 기반시설을 포함하여 주변 환경이 관광지 특유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즐길 수 분위기로 가꾸어져 있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그에게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제 그는 조용히 창작에만 전념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된 것이다. 어쩌면 그림 속에 낙관적이고 낭만적인 정서가 깃들이고 있는 것도 이러한 환경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인지 모른다.

아무튼 최근 작업을 보면 그의 작업은 사뭇 화려하다. 그만큼 장식성이 강화되고 있다. 장식성은 시각적인 즐거움을 유발한다. 무릇 예술은 감상하는 자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예술은 정신 및 감정의 휴식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휴식이란 정신 및 감정의 정화를 유도한다. 휴식은 아니, 정신 및 감정의 정화는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에 예술에는 어떤 식으로든지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그의 다양한 최근 작업을 보면서 문득 피카소를 떠올리게 되었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진정한 예술적인 자유, 즉 창작의 자유를 만끽하고 간 피카소의 그 분방한 정신을 그에게서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성희를 금기의 상자에서 풀어내 밝은 빛의 옷을 입혀준 그 대담한 도전적인 태도 또한 그러하다. 그렇다. 창작을 하고 그 결과물을 통해 세상을 밝고 아름다운 낙원으로 꾸미는 일이야말로 예술가의 몫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는 이와 같은 예술가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그에게서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월간"미술시대" 2005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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