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 (8) - 이두식

펜보이 2007. 8. 29. 21:29

 

                                                                                                                  잔칫날, 2007년

 

두식의 작품세계


삶의 에너지를 응축한 현란한 선의 유희

 

신항섭(미술평론가)

 


인간 삶의 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건강한 신체이다. 신체가 강건하면 그를 집으로 삼는 정신 및 감정 또한 건강하게 마련이다. 예술이란 정신 및 신체의 조화로써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렇다. 예술은 신체적인 행위를 통해 구체화되며, 그 신체적인 행위를 주도하는 것은 정신이고 감정이다. 이렇듯 신체를 사역하는 것은 정신 및 감정이지만 이는 신체를 통해 존재할 수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를 감동의 세계로 이끄는 아름다운 예술의 꽃은 강건한 신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두식의 작업은 삶의 에너지로 넘친다. 그러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짜릿한 시각적인 체험을 맛보게 한다. 무엇보다도 활기차게 전개되는 동적인 선과 강렬한 원색적인 색채이미지가 한데 어우러지면서 뿜어내는 에너지는 감성을 자극하고 정신을 긴장시킨다. 구상이냐 추상이냐, 혹은 아름다우냐 추하냐, 그리고 그 내용은 무엇이냐의 문제를 떠나 강렬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감정을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렇듯이 그의 그림은 감상자에게 거기에 반응하고 그림이 담고 있는 내용을 음미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두지 않을 정도로 직접적이고 직설적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일종의 미적인 쾌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을 통해 그처럼 강렬한 인상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원색적인 색채이미지와 활기찬 선의 흐름은 감상자에게는 피할 수 없는 유혹이다. 그러나 미적인 감동은 시각적인 자극만으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조형적인 요소가 적절히 조합되어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 때 미적 감흥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그의 그림에서는 열정적인 삶의 에너지가 유달리 강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의식적인 사고 및 행위의 결과인가. 아니면 그 자신의 내부에 잠재된 삶의 열정과 에너지가 무의식적으로 그림을 통해 표출되는 것일까. 그의 일상적인 삶을 지켜보면 결코 의식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선천적으로 열정의 화신과 같은 왕성한 활동력과 체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화가와 대학교수 이외에도 한국미협 이사장을 지냈는가 하면 홍익대 미대학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뒤늦게 일본 교토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술 외적인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하루 수면시간이 4시간을 넘지 않을 만큼 시간을 쪼개어 쓰고 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지치는 기색이 없다. 하지만 작업량은 그 누구보다도 적지 않다. 화가야말로 본업이라는 직업정신에 투철하다.

     

  

그가 그림에 얼마나 투철한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글씨를 쓰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손에서 붓을 놓지 않는 것은 항시 그림을 그릴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의무감에서든 또는 어떤 동기에 의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충동이나 미적 감흥이 일어날 경우에는 거기에 즉시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태도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천상 화가일 수밖에 없다. 직업정신에 투철한 진정한 프로인 것이다. 그의 그림은 바로 이와 같은 타고난 삶의 열정과 강인한 체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쩌면 그의 작업은 조형적인 아름다움 및 의미내용을 천천히 음미하기보다는 감성적인 접근이 용이한지 모른다. 그의 그림에는 그처럼 자극적인 요소가 많은 까닭이다. 발랄하고 경쾌하게 움직이는 선의 형태 및 흐름이 그러하고, 격정적인 원색의 이미지가 주는 시각적인 호소력이 그러하다. 물론 힘찬 선과 강렬한 원색 이외에도 다양한 색채가 만들어내는 점이나 색반이나 색면 그리고 여러 가지 자연물상의 형상이 공존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처럼 다양한 이미지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조형적인 논리는 일목요연하다. 오랜 동안 동일한 패턴의 작업을 지속하면서 단지 조형적인 변주를 통해 표현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이는 그림에 대한 확고한 자기 신념의 증표이다.

 

  

그에게 그림은 일상적인 사건의 하나에 불과한지 모른다. 다만 정해진 하루의 일과처럼 기계적인 행위의 결과로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의식과 같은 무게로 진행된다. 그리고 어떤 일, 어떤 상황에 있거나 항상 열린 감성으로 세상과 마주함으로써 일상적인 사건들이 그림의 내용과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형태로 연관성을 갖는다. 일상적으로 보고 느끼며 생각하는 것들이 작품 제작을 위한 동인이 되고 때로는 제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일상적인 일들에 의해 자극되는 미적 감흥 또는 창작충동은 엄격한 내적 질서를 따른다.

그의 그림에는 인물을 비롯하여 누드 새 물고기 잠자리 자전거 따위의 다양한 물상이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크로키의 이미지를 넘지 않는 최소한의 형태에 한정한다. 그러기에 추상적인 이미지가 주도하는 상황에 아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추상에 대립적인 이미지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에 시각적인 긴장과 활기를 불어넣는 미점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조형세계의 원칙 또는 큰 틀은 생동감을 포함하여 동양사상 그리고 한국적인 정서로 요약된다. 그리고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자연물상에서 받아들이는 형태미와 생기가 넘치는 공간 또는 여백, 그리고 오방정색으로 함축되는 음양오행사상 및 한국적인 정서가 조화를 이루는 세계이다. 그러면서도 시각적인 이해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는 보편적인 조형언어 및 어법을 갖추어야 한다는 요구를 충족시킨다. 설령 추상과 구상을 혼합한 형태라는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을지언정 결코 난해하지 않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실제로 그는 감상자에게 일방적으로 창작의 권리만을 내세우는 강압적인 태도는 취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림에는 볼거리와 읽을 거리, 그리고 사유의 문고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부분적으로 구상적인 이미지를 도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어쩌면 현대미술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친절이자 배려일 수도 있다. 따라서 그림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대중적인 인기작가로 부각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아니, 대중적인 인기뿐만 아니라 국제무대에서의 활약상과 그에 따른 성과는 단순한 국내용 작가로서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이다.

그의 작업은 점 선 면 색채 균제 비례 조화 통일 따위의 조형적인 요소 하나 하나가 한결같이 생기 넘치는 이미지로 귀결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는 선명하면서도 명쾌하며 명확한 이미지 및 색채와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 모호하거나 애매하게 표현하는 부분이 없을뿐더러 모든 표현적인 이미지에는 자기 확신에 차 있다. 자기확신은 자신의 작업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근거한다. 실제로 그는 초기부터 일관된 조형적인 사고 및 조형어법을 구사해왔다. 급변하는 현대미술의 흐름에도 초연한 태도를 지키며, 동양적인 사상 및 철학을 중심에 두고 한국적인 정서의 발현을 최고의 가치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일구었다. 모노크롬이나 미니멀리즘으로 상징되는 현대회화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그의 그림은 복잡하다. 그 만큼 전혀 다른 길을 택한 것이다. 그의 그림은 복잡다단한 현대인의 의식구조 및 생활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그 자신의 개인적인 일상에 대한 진솔한 기술인 것이다. 그러기에 그림을 만들어 가는 조형언어가 현란하다고 할만큼 다채롭고 개성적이다.

빠르고 경쾌하게 구사하는 선과 짐짓 시각적인 호소력이 강한 오방정색으로 요약되는 화려한 원색과 점 그리고 면이 뒤섞이는 복잡한 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난해하다거나 불친절하다는 인상은 아니다. 오히려 마치 관현악의 장중하고 일사불란한 화음의 연결처럼 현란한 이미지를 거침없이 쏟아내면서도 시각적인 혼란스러움이 없다. 무엇보다도 청황적백흑이라는 오방정색을 중심으로 하는 색채배열은 한국인의 오랜 전통습속(관혼상제 및 민속기물 따위)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색채패턴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그러기에 오방정색을 기본으로 하는 색채배열은 정서적인 친근성으로 다가온다.

 

    

 

그의 그림은 구상과 추상의 대립과 조화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방법적으로는 음과 양, 강과 약, 명과 암, 빠름과 느림, 긴장과 이완 따위의 상반되는 이미지 및 개념을 따른다. 이러한 방법적인 패턴은 긋고 지우고 덮고 뿌리고 흘리고 찍고 뭉개는 따위의 다채로운 표현방법으로 구체화된다. 이렇듯이 극단적이고 대립적이며 상반적인 형식논리에 의해 구축되는 화면은 복합적인 구성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가운데서도 추상적인 이미지가 지배하는 상황이지만 간간이 모양을 드러내는 구상적인 이미지 또한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구상적인 이미지는 그림의 구성요소로서 뿐만 아니라 제재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작품에서나 구상적인 이미지가 제재가 되거나 내용을 주도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그는 구상과 추상의 대립 및 조화라는 단순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다변적인 세계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다양한 형태의 표현적인 이미지는 처음부터 면밀하게 계획되었거나 의도된 것이 아니라, 작업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심인과 감흥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순발력과 즉흥성이 강하다. 구체적인 형태를 지향한다거나 또는 절제되고 금욕적인 화면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므로 작업하는 과정의 감정에 크게 좌우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모든 형태의 이미지는 그에 상반되는 다른 이미지와의 대립 및 조화 그리고 통일이라는 원칙에 순응한다.

 

              

 

그의 작품은 강렬한 시각적인 인상과 함께 감상자의 감정을 뒤흔드는 생동감으로 넘치는데, 이는 격렬한 제스처를 수반하는 선의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다. 그의 선은 날이 선 듯하다 못해 살기가 느껴질 정도이다. 이러한 느낌은 아마도 모필이 만들어내는 힘의 표현에서 비롯되는지 모른다. 한글이나 한자의 서체를 연마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골기가 다름 아닌 생동감을 주도하는 것이다. 모필을 사용하는 서체는 서양화의 소묘와 유사한 개념이면서도 간결한 선으로 형태를 요약하고 함축하는데 아주 효과적이다. 이러한 과정을 지나면서 추상적인 이미지로 바뀌었을 때 모필 선은 즉흥성과 만나 한층 자유롭고도 폭발적인 힘을 구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 힘이야말로 다름 아닌 살기의 진원지인 셈이다.

 

        

  

그의 작품은 어쩌면 자기 표현에 솔직한 한국인의 기질적인 특징을 대변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한국의 경제를 상징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의 그림에는 그런 다이내믹한 한국인의 기질 및 정서와 일치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렇다. 그는 그림을 통해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삶의 열정 자극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처럼 현란하고 경쾌하면서도 세련된 멋을 지닌 선을 일찍이 본 일이 없다.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고 그 누구의 조형세계에도 저촉되지 않는 그 자유로운 선의 유희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그가 제시하는 선의 유희와 자극적인 색채미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의 본질이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2004년 월간 '미술시대'>

'명작의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작의 길 (10) - 민경갑  (0) 2007.09.09
명작의 길 (9) - 김동철  (0) 2007.09.05
명작의 길 (7) - 임종두  (0) 2007.08.27
명작의 길 (6) - 이상원  (0) 2007.08.16
명작의 길 (5) - 권기자  (0) 2007.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