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철 작품세계
물안개 피어나는 서정적인 풍경
신항섭(미술평론가)
세상은 보는 만큼만 보인다. 아니, 보려고 하는 만큼만 보인다. ‘보려고 하는’ 것은 주관적인 의지의 표현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대상을 그리더라도 저마다 다른 그림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보는 방식에 기인한다. 그러기에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구하려면 먼저 세상을 보는 자기만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
김동철은 자연풍경을 그린다. 그러니 풍경화가이다. 하지만 막상 그의 풍경화를 보면 간단히 풍경화가라고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의 눈에 익은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나 인상주의 화풍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분명히 자연풍경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일반적인 풍경화의 범주에 들어갈 듯싶다. 하지만 기존의 어느 표현양식에도 선뜻 대입하기가 어려운 독자적인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독특하다는 것은 개별적인 시각이 형성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 그는 자연을 보는 방식이 남다르다. 마음의 우유빛 유리를 통해 세상과 만난다. 우유빛 유리를 통하면 구체적인 형태가 걸러짐으로써 희미한 안개풍경과 같은 이미지만이 남게 된다. 그의 그림은 이처럼 구체적인 형태미를 여과시켜 실루엣처럼 희미하게 처리한다.
어떤 풍경이든지 물상의 형태가 온전하게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풍경에서 흔히 마주치게 되는 나무나 집 따위의 어떤 특정의 물상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의 풍경화는 자연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개별화된 물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그 전체적인 상황만을 겨우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의 실루엣 형식으로 표현할 따름이다. 그러기에 시각적인 이해가 쉽지 않다. 형태를 통해 바라보는 자연이 아닌 까닭이다. 물상의 개별적인 형태를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언제나 어떤 정황을 시사하는 정도에 그친다. 여기에서 말하는 정황이란 자연 자체가 만들어내는 생명의 기운, 즉 온갖 생물체를 키우는 존재로서의 살아있음을 암시하는 생명활동을 뜻한다. 즉, 수면위로 피어오르는 물안개, 산허리를 감아 도는 안개, 물 비늘, 물에 반사되는 빛 따위의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자연의 생명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의 시선은 자연의 외적인 형태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일반적인 풍경화의 형식을 벗어나 있다. 이는 시각적인 이해의 울타리 바깥에 자리하는 미묘한 자연현상을 주시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지각에 의해 낱낱이 파악되는 실체가 아닌, 정서적인 감응을 유도하는 자연현상을 포착하려는 것이다. 물론 안개나 물 비늘, 수면에 반사되는 햇빛 따위는 시지각에 의해 분별되는 자연현상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자연현상에서는 시각적인 이해보다는 감정적인 반응이 선행한다. 정서적인 감응이 먼저 일어나는 것이다. 그는 바로 이와 같은 정서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키고자 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과 마주했을 때 발생하는 시각적인 감동의 진폭은 그리 크지 않다. 무언가 눈으로 읽히는 사실이 거의 없는 것이다. 어쩌면 내면적인 감상안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보여지는 실체가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가 제시하는 세상과 만나기 위해서는 시지각보다는 감성적인 촉수가 필요하다.
저마다 독특한 형태미를 뽐내는 온갖 자연의 물상에서 느끼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걷어냈을 때 자연은 우리 앞으로 다가오지 않고 되레 저만치 물러선다. 그러한 자연의 이미지를 읽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한 걸음 더 물러서야 한다. 멀리서 바라보는 세상은 언제나 시각적으로는 불분명하게 마련이어서 그 전체상에서 만들어지는 분위기를 탐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봄으로써 객관화된 자연은 물러가고 주관화된 자연이 남아있게 된다.
구체적인 형태는 객관적인 시선을 요구한다. 명백히 드러나는 세계에 주관적인 이해가 개입될 여지는 거의 없다. 반면에 구체적인 형태가 없으면 주관성이 개입될 소지가 상대적으로 커지게 된다. 그러기에 그의 그림을 감상하는 데는 객관적인 시각보다는 주관적인 시각을 필요로 한다. 시각적인 이해에 앞서 그 정황에 먼저 사로잡히게 되는 까닭이다. 느낌은 시지각에 의해 파악되는 물상의 실체에 대한 소감이 아니라, 언어로서는 쉽게 표현되지 않는 내적인 감응이라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해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식의 특별한 감상방법이 필요한 것도 이에 연유한다.
그의 시선은 대자연의 그 무거운 존재성에 가 닿는다. 거대한 존재로서의 대자연이 가지고 있는 존재방식에 관심을 보내는 것이다. 자연이 감싸안고 있는 온갖 물상이 어우러져 지어내는 조화의 아름다움으로부터는 시선을 거둔다. 대신에 시야를 가로막고 나서는 거대한 산줄기라든가, 물안개 피어오르는 강 건너 숲, 햇빛에 반사되는 자잘한 물 비늘만이 보이는 바다, 적막한 숲 따위에 시선이 머문다. 온갖 동식물들에게 부여된 그 형언하기 어려운 외적인 형태미는 간 곳이 없다. 단지 그러한 자연물상을 가슴에 품은 대자연의 전체상만이 어렴풋이 존재할 따름이다.
그래서인지 언뜻 보면 거기에는 정적만이 깃들이고 있는 듯하다. 싱거운 바람 한 줄기에도 기민하게 감응하는 나뭇잎의 그 간지러운 태도도 보이지 않고,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투명한 햇살에 몸을 떠는 형형색색의 꽃 너울도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그처럼 신묘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세부는 그의 의식 속에 차곡차곡 쟁여져 있다. 그러한 자연의 실상을 의식하면서 단조로운 실루엣의 전체상에 내포시키는 것이다.
도무지 그림이 될성싶지 않은 이미지뿐이다. 그럼에도 찬찬히 그림을 들여다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듯하던 곳에서 서서히 형체가 떠오른다. 물안개, 물 비늘, 숲 그림자, 물위에 반사되는 빛, 지열과 찬 공기가 만나 피워내는 숲 안개, 그리고 형태는 분명치 않으나 산을 빈틈없이 덮고 있는 숲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한 이미지를 파악하고 나서 비로소 그가 슬며시 우리 앞에 밀어놓는 자연의 실체와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그것은 확실히 경이로운 체험이다. 그가 그림 속에 옮겨놓은 정경과 일치하는 대자연의 어떤 정황과 마주쳤을 때 느끼던 감동이 불현듯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러한 감동을 이끄는 것은 다름 아닌 서정성이다. 그런데 그 서정성이라는 것도 구체화된 물상과 물상간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서술형의 문학적인 정취와는 좀 다르다. 관념성이 짙다는 말이다. 아득히 바라다 보이는 희미한 강 건너 정경이라든가, 물안개 따위의 이미지가 지어내는 서정적인 이미지를 통해 만들어낼 수 있는 시적인 상상력의 공간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물상의 형태를 빌리지 않고 자연현상 그 자체를 앞에 두고 관조하는 방식으로 접근함으로써 사유의 공간은 확장될 수 있다. 그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시적인 정서란 바로 이와 같이 내면적인 깊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의 그림은 관념화이다. 설령 실상의 재현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거기에는 실체는 없다. 그 자신의 미적인 감수성 및 미의식이 합성해낸, 자연과는 또 다른 형태의 자연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의 감수성 및 미의식은 너무도 투명하여 그로부터 나오는 자연의 이미지는 정서적인 치유의 가능성을 높여준다. 그의 그림과 마주하면서 고요한 세상이 건네주는 순도 높은 정신 및 감정의 정화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 여운은 길다. 자연의 그 낱낱의 형태가 지어내는 아름다움에 대한 시각적인 즐거움을 밀쳐냄으로써 되레 감동의 여운이 길어지는 것이다. 빛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몸을 살며시 흔들어대는, 수면 위의 잔물결처럼 아련한 감정의 여운이 가슴에 밀려드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감동의 여운은 그만의 형식미, 즉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얻은 조형의 신비인 것이다. 우리는 그의 그림을 통해 세상을 보는 방식 하나를 새로 가질 수 있게 된 셈이다.
<2005년 개인전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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