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 (7) - 임종두

펜보이 2007. 8. 27. 22:33

  

 임종두의 작품


원색을 통해 발현되는 한국적인 미감


신항섭(미술평론가)

 


요즈음 한국 미술시장에서는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원색적인 그림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컬러시대’라는 말로 요약되는 현대인의 미적 감각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시대감각을 떠나서라도 강렬한 원색적인 색채가 한국인에게는 그렇게 낯설다거나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오방정색을 기본으로 하는 화려한 원색이 일상생활 속에 깊이 침투되어 있는 까닭이다. 관혼상제에 쓰이는 각종 복식 및 그리고 전통적인 생활기물 속에서 원색은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이로써 짐작할 수 있듯이 어쩌면 원색적인 색채이미지의 그림이 한 시대의 감각으로 각광받으리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임종두도 최근 수년 동안 원색적인 색채이미지를 도입함으로써 컬러시대에 부응하는 셈이 됐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영합하려는 어떤 의도도 없다. 다만 한국적인 것, 한국인의 미적 감각 및 정서에 부합하는 색채이미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원색적인 색채이미지를 구사하기에 이른 것이다. 더구나 그 원색적인 이미지는 황적청백흑의 오방정색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형태해석, 즉 조형언어는 평면적인 이미지를 따른다. 단청을 비롯한 전통적인 생활기물에 쓰이는 색채이미지는 대다수가 평면적인 이미지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작업은 어떤 식으로든지 전통적인 가치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그림에서 평면적인 이미지와 원색적인 색채이미지를 구사한 것은 불화와 민화 그리고 단청이다. 그밖에 민속기물에서 볼 수 있는 간결한 그림들도 평면과 원색적인 색깔이다. 그의 그림 속에서 이들 전통회화의 그림자를 연상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림의 소재 및 대상 또는 내용만 다를 뿐이지 그 표현방법에서는 일치되는 바가 적지 않은 까닭이다. 특히 민화의 조형적인 특징과 유사한 부분이 적지 않다. 평면적인 공간 및 행태해석이 그러하고 오방정색으로 분류할 수 있는 색채이미지가 그러하다. 그의 경우 색채이미지는 민화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공격적이다. 순색을 여과 없이 사용하는 데다 대담한 보색대비도 주저치 않기 때문이다.

원색은 인간의 내적 감정을 자극하는데 아주 효과적이다. 원색적인 색채이미지에 대한 감정반응은 직설적이고 빠르며 솔직하다. 그러기에 감정이입에 따른 극적인 효과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황청적 삼원색에 대한 감정반응은 가장 기민하다. 어쩌면 그가 이들 삼원색, 즉 순색을 즐기는 것도 이와 같은 기민한 감정반응에 효과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의 그림과 마주하는 순간, 그림의 내용에 앞서 색채이미지에 민첩하게 반응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단박에 그 색채이미지에 사로잡힐 만큼 강렬한 시각적인 인상을 주는 것이다.

 

 

더구나 그의 경우 보색대비라는 극단적인 색채배열방식을 통해 시각적인 효과를 한층 극적으로 이끈다. 자칫 보색대비에 의한 긴장감이 지나쳐 심리적인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그러한 위험에 노출되지 않는 것은 견고한 조형감각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인물에 부여된 간명한 형태해석은 원색중심의 단순한 색채배열에 일치시킴으로써 시각적인 안정 및 통일을 도모한다. 극단적인 보색대비가 만들어내는 극렬한 색채대비는 시각적인 긴장감과 더불어 감정을 고조시킨다. 일상적인 시각을 뛰어넘는 미적 감흥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그림과 마주하는 순간 잠재의식 속에 눈감고 있던 색채감각이 일시에 깨어나 심신이 활성화되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이는 원색적인 그림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마법이다.

이러한 색채감정은 그림이 만들어내는 환상의 세계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는 계기를 유도한다. 물론 원색적인 색채이미지로 인해 현실성을 벗어나 순전한 회화적인 세계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회화적인 세계에서 현실적인 공간감은 잊어버려야 한다. 단지 회화적인 환상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해방 및 자유로운 의식의 확장을 맛보는 것으로 족하다.

그의 그림 속에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형태들, 즉 인물과 꽃을 포함하여 새, 물고기, 풍경 따위의 형상언어들은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만을 위해 취한 소재가 아니다. 다시 말해 이들 형상언어는 그림의 내용을 만들어 가는 구성요소인 셈이다. 이들 소재가 작품의 내용에 따라 이합집산하면서 내용을 결정하고 형식미를 만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들 소재는 그 자신이 제시하는 조형어법에 의해 재해석 및 재구성된다. 따라서 조형적인 질서 또는 법칙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새는 하늘의 존재임을 상징하고, 물고기는 바다의 존재이다. 그리고 꽃은 땅의 존재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들 소재의 존재방식을 보면 하늘 바다 땅이라는 공간적인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가 하나의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생명체의 존재방식은 자연이라는 하나의 질서 속에 통합된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일까. 바꾸어 말해 우주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지구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존재방식의 구별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들 소재를 평면공간이라는 하나의 관점으로 통합할 수 있었다. 이는 존재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평면공간을 통해 모든 생명체가 하나의 질서 속에 놓이는 이상향을 지향하고 있다. 여기에서 여성, 즉 인간의 이미지는 그 중심이 된다.

인물은 소우주라고 일컫는 독립된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의지를 상징한다. 동시에 여성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인간은 모태를 상징한다. 한 생명체를 잉태하고 키우는 여성의 이미지와 자연계의 생명체를 키우는 흙은 일치한다. 하지만 모태로서의 여성은 인간 본연의 의지, 즉 독립된 소우주로서의 무한한 자유를 꿈꾼다. 우주 또는 대자연의 질서에 귀속되면서도 소우주로서의 독립적인 가치를 부단히 모색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은 상승에 대한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의 존재성을 부단히 높여가고자 한다. 이러한 상승의 의지야말로 인간의 참다운 모습이다. 여기에서 인물, 즉 여성의 이미지는 자유의지의 표상이 된다. 주어진 조건으로서의 현실을 뛰어넘어 보다 자유로운 꿈의 실현을 위해 스스로를 상승하도록 부추기는 존재이다. 지식을 쌓고 견문을 넓히며 예술을 가까이함으로써 고상한 감정 및 사고를 촉발하려는 의지야말로 상승하려는 인간의 참모습인지 모른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을 통해 인간은 독립된 소우주로서의 가치를 높여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의 그림 세계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꽃과 더불어 아름다움의 상징이기도 하다. 아름답다는 것은 이상적인 가치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이미 현실에 실현된 미적 가치이다. 그러나 이상적인 가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적인 가치로서의 아름다움은 인위적인 것인데, 예술이라는 수단을 통해 실현할 수 있다. 그가 여성을 등장시키는 것은 꽃과 같은 개념의 상징적인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다. 자연미, 즉 여성에게 주어진 아름다움을 그대로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위적인 미적 해석에 의한 가공된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현실적인 아름다움과는 사뭇 다른 형태로 재해석된다. 전체적으로 왜곡 및 변형이 이루어지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이는 순전히 자의적인 미적 감각의 산물이다.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자연미를 해체하여 새로운 조형적인 질서, 즉 개별적인 형식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형태해석은 평면적인 이미지로 귀결하고 있다. 평면적인 공간은 선과 면 그리고 색채라는 조형적인 요소로만 구성된다. 거기에 은폐되거나 은닉되는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형태는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처럼 간명한 조형어법은 표현적인 순수성을 불러들인다.

인물을 에워싸는 주변 공간, 즉 배경은 평면적이다. 그러나 꽃을 배치함으로써 조형적인 아름다움과 더불어 시각적인 긴장을 야기한다. 규칙적이고 때로는 불규칙적으로 배치되는 꽃은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보조하면서 공간해석의 여지를 넓혀준다. 꽃의 이미지가 조밀하게 배치되거나 반대로 성글게 배치되는 데 따른 시각적인 긴장감은 달라진다. 이는 화면구성의 기술 또는 조형감각과 관련된 문제로서 다양한 변주를 예상할 수 있다. 꽃의 크기 및 숫자에 따른 공간의 변화는 무궁무진하다. 이 역시 열린 사고의 전개를 가능케 하는 조형적인 기술인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인물의 형태를 결정짓는 선은 대체로 직선적인 성향이다. 여성의 부드러움과는 다른 직선적인 이미지는 명쾌하고 명확한 형태미를 돕는다. 어느 면에서는 중성적인 이미지를 드러낸다고도 할 수 있다. 여성의 모습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가지는 것이다. 머리모양이나 골격 그리고 의상에서 여성임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 그는 여성의 머리모양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다시 말해 사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이미지를 머리모양에다 대입시키고 있다. 머리카락 대신에 꽃을 비롯하여 물고기, 새 그리고 풍경 따위의 이미지가 들어앉는다. 이는 두뇌를 통해 각성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인간의 두뇌, 즉 머리는 각성뿐만 아니라 상상의 자유를 구가한다. 상상은 창작의 모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머리에 그려지는 이미지는 각성과 상상이라는 의식 활동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머리카락을 대신하여 꽃 새 물고기 따위의 이미지가 들어서는 머리는 열린 의식의 통로이자 창이기도 하다. 인물이 존재하는 평면 공간과는 또 다른 이중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머리는 인물이 존재하는 화면공간 속의 공간으로서 바깥세상과의 소통의 통로라고 할 수 있다. 머리는 상상의 세계가 보다 넓게 확장될 수 있는 공간이다. 상상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공간인 것이다. 이렇듯이 그는 이중의 화면공간을 설정함으로써 조형적인 상상의 세계를 보다 심화하고 확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현대 채색화의 한 방향을 제시한다. 견실한 전통적인 미적 가치를 중심에 두면서도 다채로운 현대적인 조형성을 반영함으로써 시대감각에 일치하는 독자적인 형식을 만들어내고 있기에 그렇다. 민화적인 형태해석 및 오방정색에 의한 색채이미지, 그리고 평면적인 구성과 상징적인 내용을 적적히 조합하여 한국화의 현대화라는 요구에 부응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예술지상주의에 충실한 가운데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작품에 따라서는 단색주의에 가까울 만큼 실험적인 요소도 적지 않다. 기존의 조형적인 질서에 맞서는 그만의 아름다운 회화적인 환상은 새삼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를 일깨워준다. 이와 같은 일련의 도전은 그 자신의 개인적인 형식미를 모색한다는 의미와 함께 한국화의 지평을 넓히는 결과로 구체화되고 있다. 

 

 


<2007년 개인전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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