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 (6) - 이상원

펜보이 2007. 8. 16. 11:04
 

 

 

  이상원의 작품세계


  생성과 소멸 그리고 순환의 미학

 

   신항섭(미술평론가)



  새 천년이 다가오고 있다.  한 세기가 바뀌는데 그치지 않고 열 세기가 한꺼번에 가고 또 새로운 열 세기가 다가온다고 생각하면 한 세기의 시간개념에 익숙해온 우리의 삶은 갑자기 그 열 배로 증폭된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렇듯 시간은 그 개념 설정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한 세기의 시간개념에 익숙해진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20세기는 인류에게 가장 눈부신 발전을 가져다 준 시대였다.  미술에 국한하여 보더라도 그렇다.  19세기말 인상파의 등장으로 비롯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조형개념인 입체파를 시작으로 하여 구성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추상주의, 앵포르멜, 액션페인팅, 누보레알리즘, 팝아트, 해프닝, 키네틱 아트, 미니멀 아트, 개념미술, 하이퍼리얼리즘, 테크놀로지, 비디오 아트, 설치, 컴퓨터 아트 등 미술의 지평은 끝없이 넓혀졌다. 

  이렇듯 갖가지 새롭고 실험적인 표현양식 및 형식이 난무하는 가운데 인상파 이전의 조형개념은 20세기라는 시간의 중심에서 사라진 듯했다.  시간을 주도하는 것은 언제나 실험적인 새로운 시도의 미술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주의는 이제 시간의 무덤인 미술관에서나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과거의 미학개념에 충실히 복종하는 작가들의 존재는 엄연히 우리들 가까이 존재해왔다.  우리는 다만 너무도 빠르고 혼란스러운 20세기 미술의 양태에 시선을 뺏긴 나머지 그들의 존재를 의식할 겨를이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새 천년이 다가오고 있는 시점에서 20세기를 밝혀온 이른 바 현대미술(컨템포러리 아트)도 더 이상 새로운 얼굴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돌연히 시간이 정체한 듯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미술이 숨을 죽이고 있는 상황은 사실주의 또는 그 이후의 평면작업에 신념을 바쳐온 작가들이 그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

  한국의 화가 이상원은 이와 같은 시대적인 상황, 즉 세기말과 새 천년의 틈새에서 돌연 각광받고 있다.  ‘돌연’이라는 단어는 그의 활동을 설명하는 데 아주 적합한 용어다.  왜냐하면 그는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블라디보스톡의 연해주미술관을 비롯하여, 북경의 중국미술관, 파리의 세인트 루이스 라 살 뻬뜨리에르, 그리고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러시안미술관으로 이어지는 투어형식의 전시회를 통해 그 존재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2000년 가을에는 니스미술관 전시회가 예정되어 있다.

 

                

 

  그의 작업은 사실주의 조형개념을 따른다.  눈에 보이는 사실 또는 현실을 충실히 재현한다.  우리의 눈과 지식으로 파악되는 사실만으로는 사실주의 양식에 속한다.  다만 그의 작업을 서구적인 사실주의 조형개념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이 타당한지 여부에 대해서는 좀더 연구할 점이 있다.  작업에 쓰이는 재료 및 화구가 유화의 그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말해 그는 한지와 수묵 그리고 모필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동양의 수묵화 재료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들 수묵화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표현양식에서는 사실적인 묘사기법을 따르는 전통적인 동양의 채색화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채색화와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한다.  표현기법 면에서 보면 서구의 사실주의 조형개념에 훨씬 가까운 것이다.  이와 같은 몇 가지 특징을 하나의 통일된 시각으로 요약하면 서구의 사실주의 미학개념에 대입시키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기말에 왜 하필 사실주의 회화인가.  이미 고전이 돼버린 표현양식이 새삼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러시아는 물론이요, 중국, 프랑스에는 모두 훌륭한 사실주의 회화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구나 사실주의 회화는 어느 나라에서나 현대에 와서는 거의 논의조차 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리얼리즘 역사를 들추어보더라도 벌써 1세기 이전의 일이다.  레핀을 정점으로 하는 러시아리얼리즘의 경우에도 금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또한 글라스노스트를 기점으로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자취를 감춘 상황이다.  중국에서는 여전히 사실주의 회화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보다 분명한 점은 추상미술 또는 보다 자유로운 다양한 표현양식의 현대회화에 점차 밀려나고 있는 추세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사실주의를 요구하는 시대가 아닌데도 정작 미술관에 전시되는 순간 그의 작업은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전시장에서 그의 작품을 감상한 소감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으나 한가지 뚜렷한 공통적인 반응은 정밀묘사에 가까운 치밀하고 섬세한 묘사에 대한 놀라움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림 앞에서 반응하는 그 놀라움은 단순히 테크닉에 대한 감탄만이 아님을 주시해야 한다.  그 놀라움에는 이제까지의 사실주의 회화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소재에 대한 신선함도 함께 한다는 점이다.  

  그의 시선은 일상적인 그림의 소재로부터 비켜선다.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자연주의 또는 인간 삶의 모습에 다가서는 사실주의의 정형을 따르지 않는다.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 조형개념 및 방법에 복종하면서도 시선은 다른 방향을 좇는다.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제까지 회화의 제재 또는 소재로는 관심을 끌지 못한 사물과 자연현상에 시선을 돌린 것이다.  물론 그도 다른 수묵화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수묵산수화를 그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다른 사람들이 닦아놓은 길은 걸어간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임을 깨닫게 되자 시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진정한 창작의 자유를 얻기 위한 미의식의 일대전환이었다.  창작의 의미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자각한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소재를 찾아다녔다.  신문지, 폐선, 자동차 바퀴, 로프, 자동차 엔진, 가마터, 공사장 잔해물, 폐가, 방치된 각종 어구, 수확이 끝난 논, 마른 물이끼, 고목, 낙엽, 폐타이어 등 낡아서 쓸 수 없거나 버려진 채 사라져 가는 것들이 그의 화폭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 소재는 한결같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점차 그 원래의 모습을 잃어 가는 것들이다.  그것이 구체적인 형체를 갖는 물상이든, 아니면 물체가 존재했던 흔적이든지 간에 현재는 그 본래의 모양으로부터 변모되고 있는 상황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들은 한 때 인간 삶의 외연에 존재했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에서는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이미 소멸의 과정에 들어가 있는 상황으로 존재한다.  인간 삶의 영향권밖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처럼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소재들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작가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데 대한 역반응으로서의 새로운 소재일 뿐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추측으로는 특이한 소재에 집중되는 그의 시각을 이해하기 위한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  그가 취하는 소재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용도 폐기된 채 소멸의 과정에 들어가 있는 것들이란 점이다.  이러한 공통점은 분명히 의식적인 행위의 결과임을 말해주고 있다.  어쩌다가 시선이 끌려 짐짓 한 두 번 택한 소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들 소재를 의식적으로 찾아 나서게 된 동기는 무엇이며, 그 의도는 또 무엇인가.  그것은 그 자신의 인생관 및 세계관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가 살아온 과정은 평탄하지 못했다.  10대 후반에 학도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온몸에 총상과 파편상을 입은 무명 상이용사라는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10대 후반에 미군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렸고, 20대 초반에는 극장 간판을 그리기도 했다.  또한 30대 이후에는 중소기업을 창업한 기업가로서 성공하기도 한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순수회화를 시작한 것은 40대 초반이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그는 정규미술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림을 배운 스승도 없다.  순전히 혼자서 그림공부를 한 것이다.  그러다가 그림을 시작하면서 대한민국미술전람회(한국문예진흥원 주최)와 중앙미술대상전(중앙일보 주최), 동아미술제(동아일보 주최) 등 한국의 대표적인 공모전에서 입상 및 수상하면서 작가로 데뷔하게 된다.

 

 

  미술대학 출신 작가들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한국화단의 상황에서 볼 때 그의 존재는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그 흔한 미술단체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독자적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공모전의 입상 및 수상은 그가 작가로서 활동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렇듯 그 자신을 에워싼 미술환경은 필연적으로 그 자신을 독립적인 길로 가도록 만들었다.  어쩌면 수묵화 작업을 하면서도 전통적인 산수화나 문인화가 아닌 사실주의를 택한 것도 어차피 홀로 설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기인하는지 모른다.  비록 성공 여부에 대한 확신이 없더라도 무언가 다른 작업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그 자신으로 하여금 화단의 유행과 다른 길을 택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새로운 소재와 함께 수묵화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어온 사실주의 기법으로 독립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동아미술제와 중앙미술대상전은 전통을 중시하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와 달리 현대적인 조형성 또는 형상성을 중시하는 경향이었다.  그러기에 이들 공모전을 통해 그 자신의 작업이 현대회화의 범주에 들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은 큰 수확이었으며, 동시에 앞으로의 작업에 확신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가 사라져 가는 것들, 또는 실재했던 사실의 흔적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것은 한국전쟁을 통해 생과 사의 극한적인 상황을 체험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생명의 무상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실재하는 것들 중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당연한 자각이야말로 그 자신으로 하여금 예술가로서의 길을 걷게 하는 결정적 동기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뿐더러 소멸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생성이라는 또 다른 약속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체험을 통해 확신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의 작업에서 소멸의 법칙에 적용되는 소재는 존재했던 사실에 대한 확인을 위한 메시지인 셈이다.  아울러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역설적인 메시지이기도 하다.  예정된 시간의 계획표에 의해 소멸해 가는 존재 및 그 흔적을 통해 현실의 무상함을 환기시켜주려는 것이다.  예술이 때로는 예언적이고 교훈적인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가 제시하는 소멸의 법칙은 단순한 조형성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자신의 체험과 관련하여 삶과 세상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는 계기를 유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의 작업은 눈에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내포한다.  아름다운 소재가 아닌 이미 인간의 일상적인 관심권 밖으로 벗어나 소멸하고 있는 존재 및 그 흔적을 택하게 된 데는 내용을 중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업이 반드시 예언적이거나 교훈적인 것만은 아니다.  조형적인 아름다움이 우리로 하여금 예술의 진면목과 만나는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  비록 소재는 아름답지 않더라도 그 소재를 미적인 표현으로 전환하는 그 놀라운 테크닉과 예술적인 감각은 비범한 것이다.  우리가 그의 작업 앞에서 쏟아내는 놀라움은 순수한 예술, 진정한 예술가에 대한 솔직하면서도 아낌없는 경의의 표현인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예술 앞에서 언제든지 아낌없는 찬사와 경의를 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감동을 안겨주는 진정한 예술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현실에서 그의 작업과 만났을 때 경이로움과 함께 경의를 보낼 수 있는 대상을 찾았다는 기쁨이 앞서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늘 새삼스럽게 사실주의를 추구하는 그의 작업이 새롭게 부각되는 것도 예술가의 전통적인 덕목인 테크닉을 가볍게 여기는 현대미술에 대한 반작용인지도 모른다.  아니, 현대미술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더라도 그가 자신의 작업에서 보여주는 테크닉은 그 자체만으로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다.  이전의 작가들과 비교개념의 차원을 뛰어넘어 그는 인간의 테크닉이 도달할 수 있는 그 극점을 넘어서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그의 작품 앞에서 놀라고 겸허해지는 것은 거기에 이르기까지 쏟아 부은 혼신의 노력에 대한 경탄이고 찬탄을 의미하는 것이다.  거기에 예술성이 담겼느냐 담기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다.  예술정신이란 다름 아닌 고도의 세련된 테크닉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는 까닭이다.

  우리는 정신적인 가치가 담기지 않은 미술은 예술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설령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미적 가치, 또는 예술성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잠시 사실과 현실의 재현이라는 형식을 따르고 있는 그의 작업이 과연 얼마만큼의 예술성을 확보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에 답할 필요가 있다.

  예술성은 전통적인 미술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 고도의 테크닉을 최우선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예술가의 조건 가운데 테크닉이야말로 일반인과 구별하는 척도인 까닭이다.  그렇더라도 단순히 테크닉이 기능적인 수준에 머문다면 예술성이 형성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작가가 작업을 통해 이상적으로 여기는 정신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테크닉이 구사됐을지라도 예술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작업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것은 리얼리즘의 형식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할 수 없는 예술적인 가치 중의 한 요소인 완벽한 테크닉과 함께 인간 삶의 문제에 관련된 생성과 소멸이라는 철학적인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견고한 조형성을 갖춘 가운데 고상한 분위기, 즉 철학적인 내용이 자리하고 있는 그의 작업에 예술성이 기거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작업은 내용으로서의 철학적인 주제를 내포하고 있는 이외에도 조형성의 문제에서 전통과 현대, 동서양의 조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의 작업은 서양회화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주의이다.  또한 동양의 채색화의 입장에서 보면 북종화의 한 부류일 수 있다.  그러기에 동서양의 절충양식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진실에 가깝다.  전통이란 문제에서는 서양회화의 사실주의에 가깝고 현대성이란 문제에서는 포토리얼리즘에 근접한다.  하지만 이러한 분류는 시각적으로 인지되는 그 표면상의 인상일 뿐이다.  단순히 사물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재현한다고 해서 사실주의라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한 결론이다.

  그는 1세기 이전에 살았던 사람이 아니다.  전자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이 시간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그가 소재로 택한 사물 및 또는 그 흔적의 많은 부분은 산업사회의 부산물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사실주의 조형개념에 그대로 대입시키는 것은 무리다.  그는 설령 사실주의 표현기법을 따를지라도 이 시간을 살고 있는 현대인의 미적 감각 및 미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조형적인 면에서도 소재의 선택은 물론 구도 구성 등에서 전통적인 방식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도 바퀴자국을 소재로 한 연작은 이미지의 전개 및 구조식에서 현대적인 조형성에 응답한다.  단순히 바퀴자국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이미지를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더구나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얻기 위해 직접 차를 몰거나 중장비를 운전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보이는 사실에 대한 피동적인 접근방식에 머무는 전통적인 사실주의 방식에 따르지 않고, 필요한 이미지를 얻기 위해 상황을 직접 연출하는 능동적인 태도룰 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제작되는 그의 작업을 새롭게 평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묘사기법에서는 때로 실제보다 과장되기도 한다.  가령 인물화의 경우 피부의 주름이나 머리카락의 표현에서는 극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실제보다 과장된다.  사실성의 극대화를 통해 극적인 긴장감을 높이려는 의도가 담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작업 앞에서 사람들은 분명히 새로운 체험을 맛보게 된다.  사실주의의 그 평온함과 소극적이며 피동적인 태도와 달리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접근함으로써 현대문명과 관련된 각종 위험으로부터 노출된 현대인의 자의식을 흔들어 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의 최근 작업은 소멸해 가는 사물 및 그 흔적에서 시선을 돌려 인물과 ‘소싸움’을 제재로 하고 있다.  인물이나 ‘소싸움’은 생명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시각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그의 인물화는 뚜렷한 특징이 있는데 노인과 장년 층의 어부 및 그 가족이란 점이다.  또한 그들은 모두 동해의 어촌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왜 노인들이고 어부들인가.  다양한 인간군상 중에서 ‘동해인’이라는 명제가 지시하듯이 특정 지역, 특정 직업, 특정의 연령층을 겨냥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노인은 한국에서도 사회문제의 하나가 되고 있다.  산업화 사회를 지향하면서 농어촌 젊은이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와 공장지대로 나가면서 농어촌은 무기력한 노인들만 남아있는 상황이다.  황혼기에 놓여 있는 노인들이 농어촌의 주인인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는 여기에서 비관적인 시각 대신 희망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삶의 의욕을 상실한 허무한 표정의 노인들이 아니라 여전히 삶의 중심에서 일하는 건강한 노인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농어촌 노인들은 소외집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평생을 바닷바람과 싸워온 건강한 삶의 표정에서는 오히려 희망적인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장년층과 노년층의 건강한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실증하려는 듯이 그의 셈세하고 강렬한 붓은 거침없이 내닫는다.  미세한 잔털 모공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훑어내는 그의 예리한 미적 감각은 박진감이 넘친다.  ‘동해인’의 주인공들은 바로 오늘의 한국인의 초상이다.  일제치하와 6.25를 겪었고 70년대 고도의 경제성장에 기여하면서 살아온 격변기의 주인공이다.  그들의 주름진 얼굴에서 역경과 고난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바로 한국인의 초상인 것이다.

  그의 인물화는 포트레이트 형식을 따르는 정적인 이미지의 작업이 있는 반면 고기잡이 장면처럼 극렬한 삶의 현장을 직접 담고 있는 작업이 있다.  이들 작업은 사실주의 미학을 충실히 따른다.  그러나 유화와는 전혀 다른 시각적인 감동이 있다.  그것은 종이와 수묵이라는 재료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현실의 직접적인 제시라는 점에서는 서양의 사실주의 미학과 일치한다.  그런데도 채색이 억제된 그의 인물화는 오히려 시각적으로 더욱 명료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시각적인 인상의 차이는 여백개념을 적용하는데 따른 조형적인 접근방식이 다른데서 연유한다.  하얀 종이와 검정색인 수묵의 선명한 대비는 시각적인 인상이 명쾌하다.  특히 수묵작업은 모필을 사용하는 선묘방식인데 반해 유화는 명암에 의한 면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상이하다.  수묵과 유채의 차이를 극복하고 화합하도록 매개하는 것은 모필이다.  작가의 호흡 및 섬세한 촉감까지 놓치지 않고 표현하는 모필의 조형감각에 의해 호소력이 강한 인물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특이하게도 선묘방식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명암기법을 받아들이고 있다.  다시 말해 유화와 수묵화의 특징을 혼합한 절충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선묘방식의 명쾌한 형태감각과 명암기법의 부드러움을 혼합함으로써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이미지의 인물화를 창조한 것이다.  이처럼 동서양화의 절충방식은 단순히 조형적인 면에 그치지 않고 물감이라는 재료의 혼용으로 이어진다.  이제까지 한지에는 수묵 또는 수간채색이라는 전래의 수채재료만을 사용했다.  한지의 특성과 기법의 특징으로 보아 유채는 맞지 않는다고 인식돼온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작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지 위에 수묵과 유화에 쓰이는 유채물감을 병용하고 있다.  수묵 이외의 채색은 유채라는 사실이 놀랍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면 담채처럼 보이는 채색이 전래의 동양채색과 무언가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감의 착색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전문가가 아니면 채색의 차이를 변별하기 쉽지 않은 일이지만 수묵과 유채를 조화시킨 그의 감각은 예사롭지 않다.  가볍게 칠했으면서도 깊고 무거운 착색은 되레 이질적이어서 조화될 수 없다는 수묵과 잘 어울리고 있다.  어쩌면 수묵을 사용하고 있는데도 사실주의 조형개념에 익숙하게 반응하는 것도 유채가 가지고 있는 색채이미지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무튼 그의 작업에 대한 미술애호가들의 관심은 수묵으로도 유채화에 뒤지지 않는 사실성의 표현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생경하게 보이는 것이다.  미술애호가들은 그 생경함의 비밀이 무엇인지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물의 피부와 머리카락에서 볼 수 있는 극명한 사실적인 묘사는 실제보다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눈에 보이는 사실을 뛰어넘는 독자적인 조형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서양의 인물화와 비교해 힘과 생동감이 훨씬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와 같은 묘사기법의 차이, 즉 새로운 조형적인 해석에 근거한다.  뿐만 아니라 힘과 생동감은 인물의 배경으로 설정된 추상적인 이미지와도 관련이 있다.  농묵으로 처리된 추상적인 이미지는 설명이 필요 없는 추상언어이다.  인물이 처해 있는 상황과도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독립적인 이미지인 것이다.  그런데도 극사실적인 인물과의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전체적인 인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적인 인물의 이미지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음은 물론 오히려 사실적인 이미지와의 조화를 통해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키는데 기능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물의 배경에서 자유로운 이미지로 등장하는 추상적인 이미지는 ‘소싸움’ 연작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격렬하게 움직이는 소들의 동작과 서로 머리를 부딪치며 싸우는 순간의 긴장관계를 한층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자유롭고 힘차게 던져지는 농묵에 의한 추상적인 이미지는 이처럼 사실적인 형상을 더욱 강조하는 시각적인 효과가 있다. 

  ‘소싸움’은 한국에서는 오랜 전통을 가진 민속놀이의 하나이다.  ‘소싸움’은 여러 지방에서 농한기를 이용하여 살찐 수소끼리 싸움을 붙여 놓고 이를 보며 즐기는 놀이의 하나인데 1톤에 가까운 거대한 소끼리 싸우는 장면은 격렬하기 그지없다.  그가 ‘소싸움’을 제재로 한 것은 육중한 동물이 민첩하게 움직이며 싸울 때 발생하는 극적인 긴장감을 회화적인 이미지로 표현하는데 있다.  이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동물의 잠재적인 생명력이 어떻게 분출되는가를 지켜보자는 의도를 담고 있다.  싸움하는 순간의 긴박함을 실제의 상황처럼 재현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충분히 전달되고 있다.  뒤엉켜 싸우는 소들의 모습은 처절하기보다는 차라리 아름답다.  특히 소들이 떼지어 싸우는 장면은 인간의 전투장면처럼 장엄하게 보인다.  그러나 무기를 지닌 인간의 전투에서 볼 수 있는 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마치 아름다운 군무처럼 보일 정도이다.  육중한 몸집에 저돌적으로 돌진하여 사력을 다해 싸우는 소들의 모습이 지어내는 곡선의 유려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렇듯 ‘소싸움’을 제재로 하는 작업은 단순히 사투하는 소들의 치열하고 처절한 격전의 긴박감 극렬함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소들이 극한상황에서 보여주는 그 격렬한 동작을 통해 생명의 아름다움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이제 그는 시간을 역류하지 않고 가장 현실적인 삶에 시선을 돌리고 있다.  이전까지는 소멸하는 것들에 시선을 주었다면 이제부터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자 한다.  인물화 및 ‘소싸움’도 일련의 생명에 대한 찬가이다. 

  그의 생각은 이렇다.  시대의 흐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감동을 줄 수 있는 영원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회화적인 진실을 통해 그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현양식 및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진실한 것, 그리고 현실적인 것만을 탐닉하면서 객관적이면서도 애정이 담긴 시선으로 세상을 응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모든 진실을 아름다운 언어로 승화시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1999년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그 '러시안미술관' 초대전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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