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 (5) - 권기자

펜보이 2007. 8. 10. 11:02

                      

 

 

   권기자의 작품

 

  우주에서 오는 황홀한 유혹

 

   신항섭(미술평론가)


인간에게는 만물의 영장에 값할 만한 특별한 능력이 주어졌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적인 능력의 하나인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현실적인 한계성으로부터 발단한다. 다시 말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에 관한 정신의 자유로운 항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예술가의 상상력이란 일반인들보다 훨씬 비약적이다. 자연과 우주의 영역을 지적으로 해석하여 현실너머로 확장해 가는 과학자의 상상력과 달리 예술가의 상상력은 신비하면서도 달콤한 몽상에 가깝다. 예술가의 상상력은 순전히 아름다움에 바쳐진다. 현대미학이 많은 부분에서 아름다움과 다른 길을 택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미적인 가치를 결코 벗어나는 일은 없다.

권기자의 상상력은 당연히 예술가로서의 미적 감수성에 의해 촉발된다. 실제와 공상의 경계를 오가고 있는 그의 상상력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비록 눈으로 인지되는 현실은 아닐지언정 엄연히 실재하는 세계를 재현하는 형식을 취한다. 그가 우리 눈앞에 펼쳐놓는 상상의 공간은 섬뜩하리 만치 사실적이다. 그런 상황을 체험하지 않고서 어찌 그처럼 명석하고 극렬한 이미지로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는지 기이하게 여길 정도이다.

현실을 재현하는 화가들의 경우 상상력은 제한적이기 마련인데 반해 그는 이 부분에서 무제한의 자유를 누린다. 어쩌면 우주는 실재하는 세계임에도 시지각으로 명료하게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한마디로 그의 그림은 어떤 이미지를 추구하더라도 응당 그럴 수 있으리라는 개연성이 지배한다. 그 개연성은 고맙게도 천체물리학과 전파망원경을 만든 현대과학에 의해 실제의 상황으로 파악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듯이 그의 상상력이란 광학렌즈를 사용한 기계식 망원경 또는 전파망원경이 찾아낸 우리들의 시계 밖에 존재하는 우주의 이미지에 근거한다. 다시 말해 일단 지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실제 작업과정에서는 이미 그러한 지식을 버린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기억의 망막 속에서 완전히 지울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의 상상력이란 결코 자유롭다고만 할 수는 없다. 과학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작업하는 과정 그 자체는 기억의 망막에 어른거리는 이미지를 의식하지 않는다. 단지 그 자신의 앞에 놓인 선택적인 물감과 도구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미지의 이미지만을 의식할 따름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단지 물감 스스로의 영감에 의해 자극되는 물리적인 흔적들이 캔버스를 덮어나가는 일을 돕는데 필요한 신체적인 역할에 그친다. 물리적인 흔적은 영특하게도 우주의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다. 은하를 포함하여 성운 성단 빅뱅 또는 블랙홀과 같은 우주의 풍경이 전개되는 것이다. 우리의 시야를 아득히 벗어난 광대무변의 우주가 마치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듯한 양상이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의 그림이 풀어내는 우주의 이미지는 단지 물감이라는 물질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림에서 시선을 거두는 순간, 미지의 우주를 탐험하고 온 듯한 정신적 충족감에 안도한다.

이와 같은 물감의 물리적인 현상, 즉 물성에 따른 표현적인 이미지는 그 자신이 주재하는 상상의 진폭과 관계가 있다. 상상의 공간이 비대해지면 그의 그림 또한 그만한 체적의 공간을 점유한다. 별과 별 사이 은하와 은하 사이에 존재하는 그 엄청난 거리는 사실상 우리의 숫자개념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그런 거리를 압축하여 일목요연한 우주풍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쩌면 아기자기하게 보이는 별들과 은하 또는 장엄한 우주현상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불꽃놀이 정도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의 상상은 우주를 벗어나 예술성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진입한다.

 

 

예술성이라는 차원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초월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시간 및 공간적인 개념을 벗어난 어느 지점에 고고한 성채를 마련하는 것이다. 예술성의 차원은 상상의 발단이 된 우주의 이미지로부터 아주 먼 개념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 개념적인 공간은 공허한 세계는 아니다. 물감이라는 물질이 만들어내는 체감의 세계이다.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개념적인 세계이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우리의 시지각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그림은 시각적인 지지도가 높다. 달리 말하자면 눈으로 읽는 즐거움이 충만하다. 개념의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실재하는 세계와 상통하는 바가 많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자 호소력이다. 

그는 우리의 시지각이 감지하지 못하는 어떤 투시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직관이든 또는 영험한 신성이든 간에 우주의 이미지를 그처럼 선명하고도 명석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일이다. 어쩌면 물감을 다루는 기술이 익숙한 나머지 그처럼 황홀한 우주의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지 모른다. 설령 그렇더라도 그처럼 아름다운 세계를 꿈꿀 수 있는 것은 그만의 능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전까지는 누구의 그림에서도 그처럼 아름답고 신비하며 황홀한 꿈을 본 일이 없는 까닭이다.

 

                 

                 

 

그의 그림은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우주를 관통한다. 우주는 스스로의 빛을 가지고 있다. 열을 내뿜는 무수히 많은 별들에 의해 우주의 존재가 드러난다. 그는 캔버스라는 망막한 어둠 속에다 열을 발산하는 별들에 의해 드러나는 우주의 존재를 투사시킨다. 그의 캔버스는 빛이 스스로의 존재성을 실현하는 어둠의 세계이다. 광원으로서의 발광체의 존재가 들어옴으로써 캔버스는 별안간 우주의 한 부분을 이루게 된다. 그는 이러한 현상이 캔버스에서 일어나기 전에 이미 마음속에 그런 결과를 예상할 것이다. 상상력이 지배하는 어둠의 공간에서 피어나는 별들의 향연은 마치 꽃밭과 같은 이미지를 꿈꾸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우연적인 표현이 가져오는 그 신비한 이미지와 공간의 깊이는 그의 상상력이 미치지 못하는 세계이다. 그런 의외성이야말로 아득한 곳으로부터 발원한 우주의 광채인 셈이다. 감각이나 지각의 영역을 벗어나는 세계의 일이다.

신기하게도 그의 그림은 현실적인 공간개념을 빙자한 가상의 공간임을 전혀 의심받지 않는다. 아주 당연한 듯이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과 마주하는 순간 이미 아름다운 우주 쇼에 현혹되고 말리라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의 그림은 설득력이 강하다. 그래서일까. 그처럼 아름다운 세계가 결과적으로는 물감의 물성에 따른 물리적인 혼합물일 따름이라는 사실조차도 믿고 싶지 않다.

 

 

그의 그림은 우연과 필연이 아름다운 공조를 모색하는 형국이다. 우연성은 예측할 수 없는 표현들이 발생하는 작업과정의 물리적인 특성에 의해 좌우된다. 그리고 필연성은 그 자신의 의식 또는 무의식 속에서 불려나오는 우주의 현상, 즉 실제를 방불케 하는 이미지들이다. 그렇더라도 그 자신조차도 본 일이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고독한 진술이라는 점에서는 실제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세계는 실제도 가상도 아닌 그림으로서의 예술적인 가치이다. 그림과 실제를 혼동하는 것은 감상자의 몫이지만 그 자신만큼은 실제의 환상에 빠져드는지 모른다. 그런 유혹이 없고서는 그처럼 황홀한 꿈을 꿀 수는 없는 일이다.


<이 글은 2005년 개인전 서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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