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32) - 비가 오면

펜보이 2007. 8. 11. 09:56
 

 비가 오면


  


  비가 오면

  온몸을 흔드는 나무가 있고

  아, 아, 소리치는 나무가 있고


  이파리마다 빗방울을 퉁기는 나무가 있고

  다른 나무가 퉁긴 빗방울에

  비로소 젖는 나무가 있고


  비가 오면

  매처럼 맞는 나무가 있고

  죄를 씻는 나무가 있고


  그저 우산으로 가리고 마는

  사람이 있고


  자연은 인간 삶의 근본이다. 반드시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잘 것을 제공해준대서 만은 아니다. 자연의 이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에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온갖 전범이 숨겨져 있는 까닭이다. 인간의 삶이란 그 시초가 생명이다. 생명이 있음으로써 인간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생명의 본질 또는 모태가 바로 자연이다. 따라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자연에서 비롯되어 자연으로 회귀한다는, 생성 및 소멸의 법칙에 순응하게 되어 있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면 존재의 생명은 곧 회수되고 말기에 그렇다. 다시 말해 주어진 생명의 주기를 소진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기에 모든 생명체는 준엄한 자연의 법칙이 주관하는 삶의 조건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인간만이 그 자연의 법칙을 벗어나고자 한다. 아니, 거역하고 부정하기까지 한다. 그런가 하면 자연을 무차별 훼손하고 있다. 자연환경의 파괴는 인간 삶의 조건의 악화로 나타나게 마련이고 그 끝은 인류의 멸망으로 이어질 것은 명백한 일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인간은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고 만다. 인간은 스스로 저지른 잘못에 대해 모른 체 한다. 자기 자신만 모른 체 하면 잘못이 가려지는 것으로 생각하는지 모를 일이다.

  이상희 시인의 “비가 오면”은 나무가 비를 맞는 자연현상을 통해 인간의 숨겨진 속성을 빗대어 보고 있다. 시인은 비를 맞는 나무의 모습 속에서 불현듯 여러 인간유형을 보게 된 것이다. 그냥 예사로 지나치고 말수도 있는 비 맞는 나무가 시인의 감수성을 건드린 셈인데, 시인은 이를 놓치지 않고 그 의미를 붙잡고 있다. 그리하여 말못하고 자의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일지라도 그저 무심히 비를 맞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나무도 인간과 다름없이 사고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나무의 모습에서 시인은 우리들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

  비가 내리는 것은 자연현상이다. 수증기가 하늘에 올라가 구름을 형성하였다가 찬 공기와 만나 물방울로 응결되어 지상으로 떨어지는 자연현상이다. 비는 생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물의 다른 이름이다. 빗방울이 물을 이루어 온갖 동식물의 생명을 일깨우고 보전하게 된다. 하지만 시인은 비의 의미를 곧바로 생명의 문제로 결부시키지는 않는다. 비를 인간에 대한 자기성찰의 매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를 맞는 나무를 인간의 모습으로 치환하고 있다. 나무를 의인화하고 있는 셈이다.

  ‘비가 오면/온몸을 흔드는 나무가 있고/아, 아, 소리치는 나무가 있고’

  비를 맞으며 ‘온몸을 흔드는 나무’와 ‘아, 아, 소리치는 나무’는 능동적인 인간의 모습을 가리킨다. 비를 맞으며 ‘온몸을 흔드는’ 것은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반응이다. 비가 몸을 적실 때 거기에 반응하는 것은 존재의 확인이다. 그리고 빗줄기가 몸을 때릴 때 ‘아, 아, 소리치는’ 것은 자기존재에 대한 보다 능동적인 표현이다. 그저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일망정 비를 맞으면서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로서의 반응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나무의 반응을 볼 수 없다. 그래서 나무를 의인화하여 비를 맞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파리마다 빗방울을 퉁기는 나무가 있고/다른 나무가 퉁긴 빗방울에/비로소 젖는 나무가 있고’

  비를 맞는 모습이 이처럼 다르다. 마치 내리는 비를 거부하기라도 하듯 ‘빗방울을 퉁기는 나무의 모습은 사뭇 반항적이다. 퉁겨낸다는 것은 비에 젖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주어진 상황에 그대로 따르지 않겠다는 무언의 항변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다른 나무가 퉁긴 빗방울에’ 젖는 나무도 있다. 남이 버리는 것조차 받아 거두어들이는, 순연하고 순종적인 존재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는 피동적인 태도이다. 자기의지에 따르기보다는 먼저 타인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이다. 설령 비를 맞고 싶어도 옆의 나무가 빗방울을 퉁겨주어야 비로소 몸을 적시게 되는 존재이다. 역시 나무의 모습에 견주어 인간의 한 유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비가 오면/매처럼 맞는 나무가 있고/죄를 씻는 나무가 있고’

  비를 맞는 나무의 모양새나 그 마음가짐이 이처럼 서로 다르다. 비를 ‘매’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있는가 하면, 비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씻어내는 존재가 있다. 시인은 여기에서 비를 맞는 나무의 모양새에서 돌연 비의 존재성에 대해 시선을 돌린다. 비를 맞는 나무 그 자체가 아닌 비의 존재성, 그 의미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비를 매로 받아들이는 나무는 자신의 허물이 그리고 잘못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리고 그 허물과 잘못에 대한 뉘우침의 뜻으로 비를 맞는 것이다. 몸을 때리는 빗방울을 매로 받아들이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빗물이 자신의 죄를 씻어낸다고 생각하는 나무가 있다. 이 역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그저 우산으로 가리고 마는/사람이 있고’

  여기에서 드디어 나무는 인간으로 변환한다. 의인화된 나무의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비 맞는 나무의 이미지를 빌어 인간의 여러 유형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비를 맞지 않고 ‘우산으로 가리고 마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나무와 다른 인간의 모습이다. 이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비에 반응하는 나무, 또는 사람은 자연에 대한 순종적인 모습이다. 이에 반해 ‘우산으로 가리고 마는 사람’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존재인 것이다. 죄를 짓고도 모르는 체 하고, 죄를 씻으려 하지도 않는 존재는 이 세상에 인간 말고는 없다. 한마디로 시인은 비를 맞는 나무의 모습에서 자연의 법칙에 역행하는 인간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