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35) - 누군지 모를 너를 위하여

펜보이 2007. 8. 21. 14:01
 


 누군지 모를 너를 위하여


  최승


  내가 깊이 깊이 잠들었을 때,

  나의 문을 가만히 두드려 주렴.


  내가 꿈속에서 돌아누울 때,

  내 가슴을 말없이 쓰다듬어 주렴.


  그리고서 발가락부터 하나씩

  나의 잠든 세포들을 깨워 주렴.


  그러면 나 일어나

  네게 가르쳐 줄게.

  어째서 사교의 절차에선 허무의 냄새가 나는지.

  어째서 문명의 사원 안엔 어두운 피의 회랑이 굽이치고 있는지.

  어째서 외곬의 금욕 속엔 쾌락이

  도사리고 있는지,

  나의 뿌리, 죽음으로부터 올라온

  관능의 수액으로 너를 감싸 적시며

  나 일어나

  네게 가르쳐 줄게.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오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오감이란 인간의 신체적인 기능의 일부로서 건강한 이라면 누구나 그 기능을 극대화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촉각 속에는 단순히 피부의 자극에 의한 신체적인 감각 이외에 또 다른 기능이 있다. 정신과 육체, 감정과 육체 사이에서 기묘하게 존재하는 관능적인 감각이 그것이다.

  관능이란 육체적인 감각의 일부로서 성적인 욕구와 관계가 있다. 성적인 욕구는 직접적인 피부의 자극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지만 신체적인 접촉 없이 마음의 작용, 즉 상상만으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성적인 욕구는 언제나 은밀한 형태로 감춰진다. 그것이 밖으로 구체화되었을 때는 도덕 및 윤리적인 문제와 결부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적인 요구는 대체로 음지에서 기생한다. 그것은 순전히 사적인 문제로 여김으로써 개인적인 생각 및 행동 영역 안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욕구는 생명의 표상으로서 결코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 사적인 공간에서는 가장 왕성한 생명활동의 한 증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랑, 즉 성욕은 생명의 근본이다. 생의 욕구는 성욕과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성욕이 없으면 건강한 생명체로서의 기능을 완수한다고 할 수 없다.

  최승자 시인의 “누군지 모를 너를 위하여”는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성적인 욕구, 그 순수태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시인은 이지적인 동물로서의 인간이 지닌 본능적인 성적 욕구, 즉 사랑에 대한 욕구가 어떻게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어쩌면 성적 욕구가 없는 인간 삶이란 죽은 자의 세계나 다름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하지만 성적 욕구 또는 삶의 욕구는 언제나 나의 존재를 확인케 하는 상대적인 존재에 의해 자극되기 마련이다. 특히 삶의 본질의 하나인 사랑이란 성적욕구의 전 단계로서 언제나 나의 상대적인 존재를 통해 실현된다. 상대가 없는 상황에서는 사랑도 성적욕구도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깊이 깊이 잠들었을 때/나의 문을 가만히 두드려주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사랑에 대한 갈망 또는 삶의 욕구를 자극할 수 있는 존재를 기다린다. 잠든 상태는 어쩌면 살아 있다고 해도 사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처럼 죽어 있는 듯이 존재하는 사랑의 감각을 깨워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과 단절의 상태에 있는 나의 사랑에 대한 갈망, 생의 의욕을 일깨워 달라는 간청이다. 대상이 없기에 닫힌 공간에서 절대적인 고독에 잠겨 있는 나에게 생의 의미를 되찾게 해달라는 것이다.

  ‘내가 꿈속에서 돌아누울 때/내 가슴을 말없이 쓰다듬어 주렴.’

  꿈속에서나마 돌아눕거든, 즉 움직이고 있거든 ‘내 가슴을 쓰다듬어’ 잠든 나를 일깨워달라는 것이다. 문을 두드리는 단계를 지나 보다 실질적으로 나의 잠을 깨워달라고 한다. 가슴을 쓰다듬는다는 것은 피부의 접촉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피부를 접촉함으로써 사랑의 열망을 되찾아 절망적인 잠으로부터 보다 적극적으로 벗어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말이다.

  ‘그리고서 발가락부터 하나씩/나의 잠든 세포들을 깨워 주렴.’

  감각이 예민한 발끝, 즉 성적인 욕구를 가진 세포가 포진하여 반응하며 발동할 수 있는 발끝의 감각을 되살려 달라는 것이다. 발끝에 밀집해 있는 세포, 즉 관능의 촉수를 일깨움으로써 완전히 현실로 되돌아오게 되는 동시에 성적욕구, 생의 욕구를 돌이킬 수 있다. 여기에는 ‘너’의 존재, 너의 적극적인 자극이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내가 왜 혼자서 잠들 수밖에 없었는지를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의 욕구, 성적인 욕구가 어떻게 발동하는지를 증명해 보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 일어나/네게 가르쳐 줄게./어째서 사교의 절차에선 허무의 냄새가 나는지./어째서 문명의 사원 안엔 어두운 피의 회랑이 굽이치고 있는지,/어째서 외곬의 금욕 속엔 쾌락이/도사리고 있는지,’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사회생활이란 인위적인 것이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통해 서로를 만나게 된다. 사회에서 만나는 일은 사교적인 ‘절차’를 필요로 한다. 본능에 따르는 자연적인 삶이 아니기에 거기에는 계산이 따르고 그 계산된 사랑에는 허무의 그림자가 깃들인다. 그런가 하면 인간이 이룩한 문명, 그 이면에는 다툼이 있다. 인간이 이룩한 문명이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피로 쌓아올린 탑일 수도 있다. 스스로를 성스럽다고 여기는 인간의 오만함 이면에는 이처럼 피를 부르는 투쟁이 있으니, 그것은 결코 순수한 모습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은 불가능하다. 모든 삶이 투쟁의 연속이다. 거기에서는 사랑 또한 쟁취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적인 관계와 절연하고 금욕적이 된다. 사랑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금욕 속에는 쾌락’이 있다. 혼자된다는 것은 은밀한 것이며, 사랑을 포기함으로써 되레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그 ‘쾌락’은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조건적인 사랑을 버린 자로서의 승리감일 수 있다. 그런데 그 승리감은 일종의 자아도취에서 오는 허무의 쾌감일 수 있다.

  ‘나의 뿌리, 죽음으로부터 올라온/관능의 수액으로 너를 감싸 적시며/나 일어나/네게 가르쳐 줄게.’

  그래, 사랑을 포기했거나 혹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너로 인해 잠재된 욕망의 불씨를 되살리게 되었으니, 그 사랑의 열정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겠다고 한다.  내 삶의 가장 밑바닥, 사랑을 포기한 그 지점으로부터 되살아난 본능적인 성적욕구로 ‘너를 감싸 적시며’ 과연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확인하자는 것이다. 사랑이란 어떤 경우에도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기에 혼자 된다는 것은 사랑을 불가능하게 하는 일이요, 사랑이 없는 존재는 죽음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조건에 의한 사랑은 순수한 열정을 식게 만든다. 거기에는 계산이 선행하기 때문이다.

  절망적인 상황에 갇혀 있으나 내 잠자는 사랑의 감각을 일깨워 줄 수 있는 ‘너’의 존재를 기다리는 것은 삶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일 수 있다. 사랑의 가능성 때문에 사는 것이다. 사랑의 힘이란 바로 삶의 존재이유인 것이다.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