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12) - 추대방식이 바람직한 미협 이사장 선거

펜보이 2007. 8. 1. 09:18

  추대방식이 바람직한 미협 이사장 선출



  인간사회는 참으로 복잡하고 미묘하다.  지구처럼 복잡한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는 세상이 달리 또 있을까.  우주에는 태양계와 같은 형태의 별의 집단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고 하니까, 어디인가에는 우리 지구와 유사한 인간사회가 존재할 수도 있으리라.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십 억의 인구가 사는 가운데 지역마다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며, 풍습이 다른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는 별은 아마도 지구 말고는 다시는 없을 지도 모른다.  서로 다르다는 것은 다양성을 의미하고 다양성은 풍요로움과 연관성을 가진다.  이 지구상에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이 살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그런데도 인간사회에서는 그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나와 비슷한 다른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독단주의가 팽배하여 분별을 낳고 분별이 다툼을 유도하는 것이다.  얼굴 색이 다르고, 풍습이 다르며, 종교가 다르다하여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 인간사회의 어두운 모습이다.  그래서 지구상에는 개인 대 개인, 집단 대 집단, 국가 대 국가의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어찌 보면 유사이래 온통 다툼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지구의 주인으로 자처하는 인간사회의 실상인지 모른다.

  인간을 포함하여 동물세계에서 다툰다는 것은 단순히 생존의 문제만이 아니라 존재의 과시, 즉 압도당하는 상대를 통해 자기 존재성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다시 말해 자기 존재의 과시는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아니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에서 두드러져 보이려는 욕구의 산물이다.  그 욕구는 생존의 법칙과도 관련이 있다.  강자가 살아남는 생존의 법칙에 근거하는 것이다.  자기 존재성에 대한 과시욕구는 동물학적으로 보아 수놈에게 강하다.  근본적으로 지배욕구를 가지고 있는 수놈의 생리로서는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무리를 이끌어 가는 존재로서의 수놈의 역할을 공인 받기 위한 노력의 하나가 바로 자기존재의 과시로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존재성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에 반대하는 그 어떤 상대와도 싸워서 이겨야 한다.  적자생존의 원칙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이는 우수한 인자를 이어가려는 종족번식에 대한 강한 의지의 발로이기도 하다.  존재의 과시가 결과적으로는 종족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식의 본능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생식의 본능, 종족 보존을 위한 다툼이라면 그것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일이니 탓할 이유가 없다.  강하고 우수한 자신의 분신을 위해서 보다 유리한 삶의 조건을 차지하려는 것은 생물의 본능이다.  본능에 충실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본능에 충실하는 것은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 인간 이외의 하급동물세계에서나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이성이 지배하는 인간사회에서 동물적인 본능은 인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유치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다.  고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동물적인 본능에 의탁하는 것은 곧 무차별한 살생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기에 그렇다.  즉 공존의 법칙을 무시한 채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여 완벽한 복종을 요구하는 독재의 논리에 빠지기 십상인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한마디로 치사하고 비열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동물처럼 단순히 생존의 수단으로서 힘을 행사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영역을 지킨다는 범위를 넘어 타자를 완전히 압도하거나 말살하려는 악의적인 싸움이었다.  그 싸움에는 고도의 지능을 이용한 온갖 형태의 살상무기가 이용되고 모략과 술수가 동원되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악랄하고 잔인한 동물의 싸움이 바로 인간사회에서 이루어졌다.  공정한 게임의 법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러한 인류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혜를 짜내 법률이라는 공정한 게임의 법칙을 만들어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 대 개인 간의 싸움을 억제하는 데는 얼마간 효과를 발휘하고 있으나, 특정 집단 대 집단, 국가 대 국가간의 싸움에는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처럼 법 테두리를 벗어난 싸움은 문명화될수록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변질된 채 계속되고 있다.  단순히 국가 대 국가간의 싸움뿐만 아니라 사회 대 사회간의 싸움은 물론이요, 집단 대 집단간의 싸움, 그리고 개인 대 개인간의 싸움에서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특히 다양한 집단이 존재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교묘하게 이루어지는 초법적인 형태의 싸움은 비열하고 치사하기 짝이 없다.  공개적으로 상대의 약점을 헐뜯는 것은 그래도 비교적 신사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질러지는 간교하고도 더러운 형태의 공격적인 수법은 도저히 이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용납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인간사회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가장 치사하고 더러운 싸움은 아마도 금력에 의탁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돈으로 환심을 사거나 매수하는 방법으로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싸움의 방식이다.  이러한 싸움의 방식이야말로 가장 추잡한 것이다.  그럼에도 현대사회에서는 이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한 분위기이다. 

  인간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정한 규칙에 의한 공개적인 형태의 다툼은 선거이다.  선거에는 그것이 어떤 사회에서 이루어지든 공정을 기하기 위한 규칙이 마련되어 있다.  그 규칙에는 상식을 벗어난 비신사적인 언행은 물론이요, 불법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그 규칙을 벗어나면 법의 준엄한 심판이 내려진다.  그러나 그러한 규칙을 비웃기라도 하듯 현실적으로는 비신사적이고 불법적인 선거가 횡행하고 있다.  법망을 피하거나 은폐하는 방법으로 선거규칙을 무시하기 다반사이고 중상모략이 난무한다.  어떻게든 이기고 보자는 심리가 선거를 혼탁하게 만든다.  이처럼 불법적이고 초법적인 선거풍토가 만들어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승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관행이나 사회제도 탓이다.  다시 말해 선거 과정에서 아무리 불법적이고 불공정한 행위를 했을지라도 선거가 끝나면 그 잘못을 묻지 않는 정치풍토가 그리 만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치와 관련된 선거뿐만 아니라, 지엽적이거나 어느 소규모 단체에서 이루어지는 선거에서조차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멀리에서 찾을 필요도 없이 우리 미술계만 보더러도 그렇다.  삼 년마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선거가 치러지는데 그 때마다 어김없이 금권선거라는 말이 나돈다.  어느 후보가 얼마를 써서 당선됐고, 어느 후보는 얼마를 써서 패했다는 것이다.  최근 있었던 몇 차례 미협 이사장 선거 과정에서는 천문학적인 선거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적어도 수억 원의 선거비용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도대체 믿어지지 않는 액수이다.  이른 바 문화단체라고 하는 미협 이사장 선거에 무슨 돈이 그리 많이 필요한가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선거 과정을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지켜본 사람이라면 수억 원이 든다는 얘기에 수긍하는 점이 있을 것이다.  이 돈은 대부분 선거기간 중에 열리는 각종 미술단체 및 미술인들 모임의 회식비라든가, 또는 미협 회비를 대납하는데 들어간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선거운동원들의 활동비도 포함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미술협회 이사장이라는 문화단체장 자리가 무엇이기에 그처럼 거액의 선거자금을 들여야 하는가 의문이 생길 법하다.  과연 그만한 돈을 들여 당선될 만한 가치가 있는 자리인가.  물론 미협 이사장이라는 직책에는 표면적으로 한국 미술인을 대표한다는 상징성이 있다.  회원숫자만 해도 2만 여명에 달하니 가히 예술단체로는 최고 규모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미협은 문예진흥원으로부터 적지 않은 예산을 지원 받고 있다.  그리고 미협 이사장은 정부에서 주관하는 각종 문화행사에 미술인의 대표로 초대되는 영광(?)을 누린다.  속된 표현으로 미술계의 간판이 되는 것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미협 이사장은 명실공히 한국 미술인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만하면 누구나 그 자리와 그 명예를 탐낼만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과연 예술가라는 사람들이 수억 원이라는 거액을 들여서라도 당선되어야 하는가.  명예가 아무리 소중하다고 하더라도 꼭 돈을 들여서 쟁취해야만 하는 것인가.  돈으로 사는 명예가 진정 가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반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예술가가 돈과 권력에 초연한 자세를 취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오히려 돈을 탐하는 것은 예술정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하여 일부러 멀리하지 않았던가.  그런 시대에 예술가는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돈과 명예에 관계없이 예술의 순수성 및 숭고함을 위해 고난의 길을 걷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예술이 환금성을 가지게 되면서 예술가의 자세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예술적인 가치가 돈의 가치로 환산되는 세상이 되면서 돈에 집착하게 된 것이다. 

  미협 이사장 자리만 해도 그렇다.  단순한 명예직이 아니게 되었다.  10억 원에 가까운 예산을 집행할 수 있고, 공공기관의 조형물 설치와 관련한 이권문제에 관여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이처럼 적지 않은 예산을 집행하고 이권문제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권문제 때문에 이사장이 되겠다는 미술인은 없으리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밖에서 보는 시선은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적어도 수억 원을 들여서라도 이사장이 되겠다는 것이 단순한 명예 때문만은 아니지 않겠느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곰곰이 따지고 보면 미협과 그를 대표하는 이사장이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데는 누구누구의 잘못을 가릴 것도 없이 일반회원을 포함하여 미협 집행부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조그만 이익을 생각한 나머지 아무렇게나 표를 던진 회원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진정 한국미술의 발전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인물을 가려내겠다는 책임감 없이 이런저런 인연에 이끌려 귀중한 한 표를 올바로 행사하지 못한데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사장 스스로의 투철한 봉사정신의 결여에 있는지 모른다.  물론 누구든지 처음에는 한국미술의 발전을 위해 일해보겠다는 일념에서 출발하고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과다하게 지출한 선거비용에 대한 부담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사사로운 이권에나 관심을 쏟게 된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초심이 점차 흔들리게 될 것은 빤한 일이다.  더구나 선거기간 중에 신세를 진 참모들에게 무언가 보답을 해야 된다는 데까지 이르면 정상적인 궤도를 이탈하는 것은 잠깐의 일이다.  어쩌면 공공기관의 조형물 설치, 미술대전의 운영 등에서 공정성을 의심받는 것도 바로 선거로 인한 물적 심적인 부채를 갚겠다는 안이한 생각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미협 회원들은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거에서 돈으로 표를 사려는 후보를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돈을 쓰지 않는 선거풍토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과다한 선거비용이 결과적으로 미협의 파행운영의 원인이 되고 있는 까닭이다.  더불어 학연이나 지연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소신껏 일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공정한 선거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규칙을 준수하는 경기는 아름답다.  선의의 경쟁은 더욱 아름답다.  진정 한국미술의 발전적인 미래를 위한다면 먼저 회원 각자가 공정한 선거풍토를 만드는데 앞장서야 한다.  그리하여 깨끗한 선거를 통해 탄생하는 미협 이사장의 밝고 아름다운 얼굴을 만들어야 한다.

  이번 미협 이사장 선거를 지켜본 어느 원로는 ‘예술인들의 모임에서 선거는 무슨 선거냐’고 반문하면서 가장 바람직한 방식은 이전처럼 추대방식이라고 말했다.  미협 이사장은 어디까지나 전체 미술인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임을 감안할 때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맡아야 하고, 대신에 미협의 살림은 미술인이 아닌, 행정 전문가가 맡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미협 선거와 관련해 이런저런 부정적인 일들이 언론의 가십거리가 될 때마다 미술인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은 점점 나빠지게 마련이다.  오늘과 같이 미술시장이 꽁꽁 얼어붙은 데는 국가 경제가 나쁜데도 원인이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미술인들에게서 더 이상 순수한 예술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는 데 대한 실망감이 미술품을 외면하게 된 또 다른 원인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순결하고 순수한 정신의 산물이라는 믿음을 상실했다면 미술품에서 무엇을 더 기대할 것인가. (신항섭)

                                                                

<"미술신문" 2001년2월20일(제25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