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14) - 한 지붕 아래 두 집 살림의 미협

펜보이 2007. 8. 1. 09:42

   한 지붕 아래 두 집 살림의 미협



  세상이 어수선하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며,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그리고 무엇이 미이고 무엇이 추인가.  이를 분별할 수 없으니 세상이 어지럽게만 보인다.  그야말로 현대는 혼돈의 시대라서 그런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규범이나 법질서는 물론이요, 사회정의도 존재하지 않는 현실상이 바로 혼돈의 시대를 말함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한 시대를 통틀어 혼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데 신념을 바쳐온 미술인들이 어찌된 판인지 이즈음에는 세상을 어지럽고 추하게 만드는 일에 앞장서고 있으니 이 또한 혼돈의 한 모습이 아닌가.  한마디로 거꾸로 가는 세상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진선미를 추구하는 일이 아닌가.  진선미는 바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규범을 세우는 기둥이다.  그 기둥을 만들고 세우는 일이 다름 아닌 예술이고 예술가의 몫이다.  예술의 한 장르인 미술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  진선미를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예술이기에 일반인에게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예술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가치로서의 진선미를 통해 인간은 심적 정신적인 정화를 맛본다.  시각예술인 미술은 눈으로 분별하고 파악하며 인지함으로써 이해하기에 가장 쉽다.  물론 미술도 은유 암시 상징 등의 장치를 가지고 있기에 그 내용을 이해하는 문제에서는 간단하지 않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술은 일정한 형태로 완성된 이후에는 정지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시간적인 제약을 받지는 않는다.  어쩌면 미술이 인간의 일상적인 삶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도 바로 시간과 공간에 따른 큰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을까.

  미술은 이처럼 인간 삶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세상을 바로잡는데 필요한 이상적인 가치로서의 진선미를 추구하고 또 실현하는 숭고한 목표를 가진다.  그러기에 미술관은 진선미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미술품은 상상하기조차 힘들만큼 높은 가격으로 거래된다.  미술작품에는 바로 진선미가 숭고한 형태로 실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미술작품을 생산(창작)한 예술가로서의 미술가들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은 세상이 많아 달라져 예술가가 존경받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불과 수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예술은 해서는 안될 직업으로 간주되었다.  그러한 사회적인 몰이해 및 편견 속에서도 신념을 꺾지 않고 고난의 길을 걸어온 예술가들의 존재는 한편으로는 세상의 지표였다.  힘든 길임을 알면서도 오직 자기신념에 의지하며 예술혼을 불태우는 모습 속에서 세상은 힘겨울 때마다 위안을 삼아온 것이다.  예술혼이란 바로 진선미만을 지향하고 모색하며 모든 현실적인 고난을 견디는 정신적인 표상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예술가의 정신적인 표상인 예술혼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예술혼이 권력 및 금력과 결탁함으로써 본래의 순수성을 잃은 채 저자거리의 몹쓸 패거리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미술품을 고가에 파는 것은 차라리 순수한 일이다.  미술품의 거래는 생계의 수단이라는 사회적인 합의가 전제되고 있을 뿐더러, 그만한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과 고초가 따랐으리라 짐작하기 때문이다.  아니, 예술성을 분별하는 눈 밝은 사람들이 아낌없이 돈을 지불하는 것은 바로 미술품을 생산해낸 미술인에 대한 사회적인 정당한 대우일 수도 있기에 그렇다.

  이와 같이 사회적인 인식과 대우가 크게 향상되어서일까.  미술가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그 목소리가 미술계 내부에서 바깥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예술가도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 할 어떤 필요성이 생긴 것일까.  다시 말해 약아빠진 사람들로 넘치고 있는 세상이니 미술가들도 좀더 영악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이 있어서일까.  권력과 금력에만 눈먼 사람들로 넘치는 세간의 정치판과 같은 행태를 답습하고 있다.  그러한 미술가의 모습에서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예술가상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아니, 평범한 시민의 상과도 거리가 있다.  한마디로 도덕과 윤리 법질서를 무시하는 비문화인의 얼굴만이 보일 따름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 시절 예술가들은 사회적인 편견과 냉소 속에서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예술의 길에 뛰어든 데 남다른 긍지를 느꼈다.  그러한 예술가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이 창작의 원천이 되었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오직 나만의 창조적인 세계를 만든다는 신념과 확신으로 스스로를 지탱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오직 창작의 공간에서 말없이 작업에만 전념하던 예술가상에 비추어 많이도 변했다는 생각이다.  이전에는 미술가는 사회생활에 아주 서툰 사람들로 여겼고, 미술가 자신들조차 그러한 사실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미술작품을 돈으로 바꾸는 사실조차 쑥스러운 일로 여기던 것이 바로 엊그제였다.

  그러한 어설픈 생활인의 태도가 오히려 미덕으로 보였다.  하지만 미술계의 풍토도 많이 변했다.  황금만능주의, 즉 배금사상이 예술계에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점차 감소해가고 있는 현상은 이제 하나의 상징적인 예에 불과하다.  단순히 상업적인 목적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재료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냐는 그들의 반응은 적어도 예술가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려는 안간힘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17일 한국미술협회 2000년도 정기총회가 열리는 서울 용산구민회관 대강당에서는 한국미술사상 전대미문의 희한한 사건이 벌어졌다.  미술협회 이사장이 두 명으로 늘어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현 집행부를 이끌고 있는 박석원이사장 외에 미협바로세우기 회원연대 김선회대표위원이 또 다른 이사장으로 선임된 것이다.  사건의 전모는 미술신문 제238호에 자세히 나와 있으므로 다시 되새겨볼 필요는 없다. 

  현 이사장의 임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한 지붕 아래 두 명의 주인이 생기는, 이런 일이 왜 일어나게 되었을까.  미협바로세우기 회원연대라는 단체 이름이 말하고 있듯이 잘못 가고 있는 미협을 바로잡는다는 것이 이번 사태의 대외적인 명분이다.  바꾸어 말해 현 이사장을 중심으로 한 집행부는 미협을 이끌어갈 능력이 없으니 임기를 채울 필요도 없이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미협운영에 대한 미협 회원들의 불만과 불신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역대 미협 집행부의 독선적인 운영방식에 대한 비판은 선거가 있을 때마다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내부적인 비판이 점차 커지다가 마침내 이번 사대로까지 발전한 셈이다.  미협 운영방식에 대해서는 밖에서도 지적이 많았다.  그러나 외부적인 지적에 대해서도 전혀 개선의 여지가 없는 것이 미협의 일관된 태도였다.  역대 이사장 선거가 있을 때마다 후보들은 많은 공약을 내세워 운영의 합리화를 외쳤지만 막상 당선되고 나면 구습을 되풀이하는데 그쳤다.

  미협의 사업 가운데 회원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업은 해외 전시회 참가, 미술대전, 공공조형물 작가 선정 등이다.  이들 사업에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회원들의 가장 큰 불만이다.  이들 사업은 선거운동과 관련된 작가들 중심으로 한 논공행상에 따른 나누어먹기식으로 처리된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술대전 심사위원 선정에서는 이러한 병폐가 극심하여 미술대전 무용론까지 나올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공공조형물 설치 작가 선정 또한 집행부와 그 측근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작가들이 독식한다는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협의 사업에는 돈과 명예가 따른다.  해외전에는 전시 참가비가 보조되고, 미술대전 심사위원이 되는 것은 명예를 얻는 일이요, 공공조형물 설치에는 당연히 돈이 생긴다.  이처럼 돈과 명예가 걸린 사업을 집행부 중심으로 처리한다면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따라서 이번 미협바로세우기 참여연대의 현 집행부의 불신임과 그에 따른 변칙 이사장 선출은 이와 같은 문제점을 해결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밖에서 보는 시각은 그들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현 집행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마당에 기습적으로 이사장을 선출, 집행부를 두 쪽으로 나눈 사태는 도저히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예술가들의 모습이라고 볼 수 없는 까닭이다.

  현 집행부와 또 하나의 집행부가 물고 뜯는 싸움판은 저질 정치드라마와 다름없으니 말이다.  누가 이들의 모습을 보며 예술가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러한 행동과 정신 속에서 과연 세상을 정화시킬 수 있는 진선미의 꽃이 피어나리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이번 사태를 거꾸로 보자.  만일 미협의 사업이 돈과 명예가 따르지 않는, 순전히 회원들의 창작활동을 돕는 심부름꾼 일에만 국한된다면 정말 자발적으로 봉사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예술이란 해도해도 끝이 없는 길이어서 한 순간도 허비할 수 없는 마당에 어찌 남을 돕겠다고 나서겠는가. 

  미협 이사장 선거에는 정치권 선거가 그렇듯이 많은 돈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만한 돈을 들였을 때는 반드시 반대급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설령 돈이 생기지 않고 명예뿐이라고 해도 얼른 납득하기 어렵다.  예술가에게 도대체 작품을 통한 명예가 아니라면 무슨 의미인가.  이러한 의문은 일반인들 시각에는 아주 당연한 일이다.  일반인들이 믿고 있는 진정한 예술가상은 돈과 세속적인 어떠한 명예로부터도 초연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미협의 존폐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도 바로 예술가들이 본연의 창작활동에 전념하지 않고 돈과 명예에 따른 소수의 기득권을 행사하기 위한 도구로 변질시켰다는데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다.  무엇보다도 미협을 학연이나 지연 중심으로 이끌어 가는, 한국미술계의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점이 이번 미협 사태의 본질이라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다시 말해 세속적인 시각으로 말하자면 학연과 지연을 중심으로 한 이권다툼이고, 영역확보 싸움이며, 기득권 행사를 위한 투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바깥의 시각에 대해 아니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는 관계자들이 어디 있을지 묻고 싶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  변하고 있는 세상의 흐름에 따라 미협도 변해야 한다.  언제까지 어린이들의 땅 따먹기식 놀이로 시간을 보낼 것인가.  미협이 회원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고 회원의 권익을 옹호하는데 앞장서야 한다면 일체의 구습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이사장 당선과 결부된 논공행상의 전근대적인 병폐를 과감히 벗어 던져야 한다.  그렇게 하면 선거꾼들이 몰려들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사장 당선 후에 이사 한 자리 차지하거나 미술대전 심사위원이 되고 공공조형물에 눈독을 들이는 어설픈 작가들을 주변으로부터 차단한다면 미협은 그 순간부터 사회가 바라는 미술가들의 모임으로 환골탈태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문제점은 바로 미협 이사장 선거로부터 잉태된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미술계 풍토로 보아서는 누가 새로운 이사장이 되든 문제점이 개선되리라고 기대하는 회원은 거의 없다.  그만큼 미협의 파행운영은 고질적이다.  여기에서 아무리 이상적인 미협 운영책을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이사장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헌신적인 봉사정신을 갖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작업실을 떠나 속된 명예나 이권을 찾아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장사치와 같은 미술인들이 없어지지 않는 한 미협의 운영은 파행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정히 해결할 방도가 없다면 차라리 미협 자체를 없애는 것이 낫다.  아름다움을 가장한 추한 얼굴의 미협이 되레 세상을 더럽히고 있기에 그렇다. (신항섭) 


 <"미술신문" 2000년4월5일(제24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