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11) - 인사동아! 인사동아!

펜보이 2007. 7. 25. 07:40

  인사동아! 인사동아!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어쩌면 여론이 만들어 가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물론 대중매체인 언론이 불특정 다수의 의견을 수렴하여 발표하는 형식이지만 이와 같은 여론은 국가의 기본정책 수립에도 반영된다.  민주주의 국가의 정책이란 궁극적으로 국민의 안위와 행복을 지켜주는 데 목적을 둠으로써 절대다수의 국민적인 의견을 좇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여론은 이제 세상을 움직이는 또 하나의 중심 축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 사회 한편에서는 다수의 견해인 여론을 있을 수 있는 푸념 정도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아직도 남아 있다.  독단적인 시각에 빠져 여론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소수의 전문가들의 경우 이런 성향이 강하다.  자신의 앞선 전문적인 지식 및 기술로 한 세상을 이끌어갈 수 있다는 우월 의식에 사로잡힘으로써 남의 견해를 경청하려고 하지 않는다.  일단 자신이 주장했거나 이루어놓은 일에 대해서는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고 밀고 나가려고 하는 것이 이들의 한 속성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주장하거나 이룩한 사실을 번복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꺾는 일로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이유에서건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 및 기술로 이룩한 성과를 철회하는 일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수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늘의 세상은 너무 복잡하다.  현대사회는 너무도 다양하고 세분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느 분야에서나 보다 세분화된 전문가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전문가라고 해서 어느 한 분야의 지식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전문가는 자기 분야는 물론이려니와 유관한 이웃 분야의 지식을 포함하여 사회 전체의 시스템을 총괄적으로 볼 수 있는 보다 폭넓은 시각 및 광범위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자동차 부품 하나를 만들더라도 자동차라는 전체적인 기능을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자기 전문 분야라는 한정된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언제나 세상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에다 자기 전문지식을 맞추어 가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 전체의 균형 있는 발전이 가능한 것이다.  어느 한 분야에서 시대를 앞선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전체적으로 그 기술을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소용없다.  그러기에 전문가라고 할지라도 전체 사회라는 통합된 시스템에 필요한 하나의 부속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인사동에 대해 말이 많다.  인사동이 거지반 일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의 도로정비 및 미관공사를 끝내고 지난 가을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새롭게 단장한 인사동에 대해 이런저런 여론이 무성하다.  그런데 중론은 이전만 못하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20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공사비를 들여 단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은 부정적인 편이다.  왜 그런가.  외양으로 보아서는 검은 벽돌을 깔고 군데군데 화강석 돌을 놓아 깔끔하게 정비되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그렇다.  단지 도로정비라는 차원에서 보면 이전보다 한층 깨끗해진 것이 분명하다.  시도 때도 없이 상수도 및 하수도 또는 전기 및 가스공사를 하느라고 덕지덕지 기워 붙인 아스팔트가 볼썽사나웠던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양을 갖추었다.  그런데도 왠 일인지 검은 벽돌로 치장한 새로운 인사동 길이 낯설고 기이하게 보인다.  어디서도 본 일이 없는 새로운 거리모양새 탓이 아닌가싶다. 

  인사동 거리를 새롭게 단장하는데 따른 설계를 맡은 이는 건축가라고 했다.  설계를 하기 전에 공청회를 열어 거기에서 나온 여러 가지 의견을 설계에 반영했다고 했다.  설계를 한 이는 인사동을 하나의 나뭇잎 개념으로 보아 자동차 길은 큰 잎줄기로, 그리고 골목길은 자잘한 옆 줄기로 상정함으로써 전체를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나뭇잎 줄기 모양으로 만들 것이라고 했다.  즉 수분을 나르는 나뭇잎 줄기처럼 생기가 넘치는 인사동 길이 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로정비 및 미관사업의 기본개념은 그 발상이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실제로 먼저 완성된 큰 잎줄기인 자동차 길을 보면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우선 검은 색의 벽돌이 인사동과 과연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하는 문제도 그렇거니와, 더구나 검은색 벽돌 위에 길가로 도열하듯 줄지어 놓인 화강석 장방형의 돌들이 왠지 생경하다.  도로와 인도를 구분하는 경계선이면서 동시에 잠시 지친 몸을 쉬어가게 한다는 목적으로 놓인 돌이라고 하는데 그런 배려가 반드시 친절하고 따뜻하게 보이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다.  친절하게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보행자들의 흐름만을 끊어놓고 있다.  평일이야 귀찮기는 하지만 그래도 비켜 갈 수 있어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주말이나 휴일에는 차량의 통행을 통제하는 데도 워낙 사람들이 많아 곳곳에 늘어선 화강석들이 정말 보행을 짜증스럽게 만든다.  물 흐르듯 해야할 인파의 흐름을 간단없이 차단하고 나서는 것이다.  그처럼 도전적인 물체가 바로 화강석이다.  이들 돌은 쉼터 및 화분의 용도가 될 것이라고 했으나 정말 인사동에 그런 화분이 필요한지도 생각해볼 일이다.  미관을 위해서라지만 누구를 위한 미관인가.  그런 화분을 설치하는 것도 널찍한 공간이 있을 때 필요한 일이다.  인사동처럼 차와 사람이 함께 가기에도 비좁은 거리에 어디 화분이 들어설 공간이 있는가.   

  그런가 하면 자동차길 중간 중간에 울퉁불퉁한 화강석이 돌출한다.  자동차의 속도를 줄이기 위한 장애물의 기능을 한다고 하는데 차보다는 되레 보행자들의 발걸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조심하지 않으면 자칫 굽이 채여 넘어질 위험성이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안국동 쪽에서 내려오는 초입 왼쪽에 인사동 물길이 화강석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너무 인위적이어서 조잡해 보인다.  그런 장식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인사동다운 일이다.

  아울러 안국동 쪽과 탑골공원 건너편 쪽에 있는 걸개 걸이 장식 역시 실용성보다는 전시위주의 발상에서 비롯된 인위적인 시설로써 재미가 덜하다.  전시회의 현수막을 걸도록 한 모양인데 광고효과가 얼마나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 크기도 작거니와 시각적으로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너무 좁게 배치됨으로써 바짝 다가서서 일부러 살펴보지 않고서는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왜 보도 블럭이 검정 색인가.  같은 검정색인 아스팔트보다는 낫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인사동에는 검정 색 기와집이 많으니까 서로 조화되리라는 판단이었을까.  그렇지 않아도 인사동 중심부에 느닷없이 커다란 검정 색 건물이 들어서 흉칙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처지이고 보면 검정 색 보도 블럭도 우리에게는 그리 친숙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검정 색 건물이 전시관으로 꾸며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사동 전체적인 조화라는 시각에서 볼 때는 동떨어져 있을뿐더러 시각적으로도 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처지에 거리가 검정 색 일색이니 인사동이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러면 인사동에 어떤 색깔의 보도 블럭이 어울릴 것이냐고 반문해도 사실 뾰족한 대안은 없다.  다만 문제는 서울 속의 인사동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있다.  인사동이라고 해서 유별난 모양새를 갖추어야 한다는 식의 발상은 유치하다.  인사동도 서울의 한 부분일 따름이다.  옛 골목이 옛 집이 남아 있다고 해서 다른 곳과 달라야 한다는 시각은 잘못이다.  바꾸어 말해 인사동이 전통적인 거리로서의 특색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면 시간의 흔적을 느낄 수 있도록 자연스런 모습이 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어떤 새로운 발상에 의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놓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인사동이 외국인이 찾는 거리라고 해서 깨끗하고 반듯해야만 한다는 원칙은 없다.  인사동이 외국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건물 따위가 비록 보잘 것 없이 작고 낡아 있을지라도 거기에는 한국인의 삶의 흔적과 문화의 모습이 진솔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만일 새로운 건물 현대적인 건축양식으로 꾸며진 인사동이라면 외국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단지 관광상품이나 팔고 사는 곳이라면 여느 상업적인 거리와 다를 바 무엇이겠는가.  외국사람들과 우리들이 인사동을 찾는 이유는 세월의 때, 즉 수 백년 동안 이어져 온 한국인의 삶의 체취를 느끼기 위해서이다.  그런 인사동에서 과거의 때를 지우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말끔히 단장해 놓았으니 우리가 원하는 삶의 체취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인사동은 공동가게와 미술전시장이 중심이 되어 독특한 하나의 문화적인 공간으로 정착된 곳이다.  그러기에 인사동에는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우선 인사동에 들어서면 머리 위로 마치 축제의 깃발처럼 나부끼는 갖가지 전시회 현수막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어쩌면 무질서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색깔과 글씨로 꾸며진 현수막은 괜히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만든다.  한창 신나는 축제의 마당에 들어선 듯한 감흥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현수막의 물결은 유독 인사동만의 특색이다.  현수막이야말로 인사동을 가장 인사동답게 만드는 요인의 하나인 것이다.

  새롭게 단장된 도로와 함께 현수막이 사라졌다.  반면에 국적 모를 골동품 및 관광상품 파는 가게와 카페 그리고 술집이 골목길마다 빼곡이 들어차고 말았다.  현수막을 걷어치우고 나니 인사동 특유의 활기가 사라진 듯한 느낌이다.  게다가 말끔히 단장된 검은색 보도 블럭과 거친 화강석 거리가 인사동을 핏기 가신 거리로 만들고 있다.  수 백년 동안 면면이 이어져 온 삶의 흔적이 일시에 사라지고 만 것이다. 

  낯설고 어색하게 보인다는 여론에 대해 인사동 길을 설계한 이는 처음에는 생경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익숙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독재시대의 개발논리를 따르자면 그렇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인위적인 부자연스러움이 자연스러움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의 몫은 아니다.  그렇게 되리라는 막연한 환상의 몫이다.  자연부락을 해체하고 서구식 관광지로 산뜻하게 꾸민 설악산이나 콘크리트로 문화재를 보수해 놓는 그런 사람들의 문화의식이 오늘의 전문가들에게까지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 서글플 따름이다. 

  인사동이 전통문화의 거리라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면 가능한 한 현재의 상태를 그대로 내버려두거나 옛 상태대로 보존하는 것이 순리다.  보도 블럭이 깨어지고 아스팔트로 누덕누덕 기운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현재 우리 서울의 삶의 한 양태라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차라리 자연스러운 일이다.  만에 하나라도 인사동이 외국 관광객들을 의식한 나머지 깨끗한 인상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시각에서 이전과는 생판 다른 모습으로 단장했다면 그것은 문화의 속성을 잘 모르는 소치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설령 그런 일을 관이 주도했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문화예술을 아는 전문가라면 거기에 동조하지 않아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전문가라고 하여 한 시대의 문화의 흐름을 자신의 힘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만일 따름이다. 

  많은 미술인들은 인사동이 상업지구화 되어 가고 젊은이들의 천국이 되고 있다고 하여 사뭇 걱정이다.  화랑이 카페에 밀려나고 공동가게가 외국 골동품 및 조잡한 관광상품에 쫓겨나는 현상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더구나 구들장 아랫목의 그 따스함을 즐기던 전통가옥이 이상한 모양의 카페로 개조되는 현실을 개탄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돈벌이라면 마구잡이로 개발하는 세태의 흐름을 어찌 막을 것인가.  말로만 전통문화의 거리라고 떠들어대면서 아무런 대책도 지원도 없이 단지 도로만 현대적으로 꾸며 놓는 이상한 나라에서 제 모습을 잃어 가는 인사동을 누가 구할 것인가. 

  내버려두자.  가슴 아파해 하지 말자.  화랑이 없어지고 나도 인사동은 관광상품이나 팔고 젊은 아베크족들이나 끌어들이는 이상한 상업지역이 되는 데는 아무런 이상이 없을 터이니 말이다.  달랑 하나 남은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의 얼굴인 인사동마저 사라지고 나면 서울은 부쩍 국제적이고 세계적인 세련된 현대도시로 남게 될 테니까.  인사동 길을 고치면서 이미 그런 길로 들어서고 있다.

                                                               

<'미술신문' 2000년12월5일(제2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