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9) - 현대미술과 속도의 상관관계

펜보이 2007. 7. 19. 14:57
 

 현대미술과 속도의 상관관계



  21세기는 우리 인간 삶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인가.  단적으로 말하자면 21세기의 인간 삶은 속도에 의해 지배될 것이란 점이다.  속도는 무엇인가.  시간과 결부시켜 빠르기의 정도 및 그 물리적인 운동량을 의미한다.  가령 100미터 달리기에서 누가 얼마나 먼저 결승지점에 도착하는지 그 시간과 물리적인 운동량을 재는 것이 속도의 개념이다. 

  속도는 원시시대부터 인간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동물을 사냥하는 상황에서는 보다 빨리 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돌과 같은 형태의 무기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보다 빠르고 힘차게 던져야만 사냥감을 맞힐 수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맹수와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맹수보다 민첩한 몸놀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움직이는 동물로서의 인간은 원시시대부터 생존의 수단으로써 속도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의 생활이 문명화될수록 속도의 필요성은 더욱 늘어난다.  동물과의 생존과 결부된 싸움뿐만 아니라 인간끼리의 경쟁체제로 이행하면서 물리적인 속도에 그치지 않고 두뇌에 의해 결정되는 사고력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속도경쟁이 시작되었다.  사고력에서 상대보다 더욱 빠르지 않으면 내 몫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고사하고 물리적인 싸움에서도 패배를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두뇌 활동의 결과물인 각종 살상무기는 속도의 싸움에서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속도는 단순한 빠르기에 대한 경쟁이 아니라 인간 삶의 조건을 결정짓는 투쟁의 무기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속도는 더욱 첨예한 대립과 경쟁의 수단이 되고 있다.  속도에서 뒤떨어지면 삶의 내용에서도 열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  특히 교통과 통신이 급속히 발달한 20세기는 그야말로 세계가 온통 속도의 경쟁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말에 이르러서는 누가 먼저 빠른 교통수단을 만들고 누가 먼저 빠른 통신수단을 갖느냐에 따라 부자와 강자가 결정되는 상황이 되었다.  전쟁무기만 해도 그렇다.  누가 보다 빠른 미사일을 개발하느냐에 따라 패권을 장악하게 되는 현실인 것이다. 

  속도의 개념은 이제 디지털시대를 맞이하면서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바뀌고 있다.  전기와 전자 전파만으로 가상현실이라는 비현실적인 공간을 마치 현실처럼 영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상현실은 보이지 않는 속도의 개념이 만들어낸 인간의 의식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즉 현실과 가상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전자 네트워크를 통해 인간의 의식을 하나의 통합된 질서체제로 제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의식까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힘이란 바로 속도이다.  인터넷에 매료당하고 있는 현대인은 전기 전자 전파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다.  전기 전자 전파의 속도가 합성해내는 환상을 마치 현실로 착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상적인 삶에만 국한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미술에 국한시켜 보더라도 그렇다.  적어도 20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오랜 수련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수련의 시간에서는 속도의 개념이 무색하였다.  왜냐하면 손의 기능이란 속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일정한 시간과 노력이 있어야만 목표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미술공부를 시작하여 자립하기까지에는 짧더라도 10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이 필요했다.  미술공부는 달리기처럼 목표지점에 빨리 도달한다고 하여 되는 일이 아니다.  일정한 시간과 부단한 노력이 선행하는 과정에서 한 작가로서의 기능과 미적 감각 그리고 미적 안목을 갖추게 되는 것이고, 이러한 필요조건을 만족시킴으로써 한 작가로서 인정받았다.

  그러나 20세기 초 추상주의의 등장과 함께 작가가 되는데 필요한, 손의 기능을 숙달하기 위한 전통적인 교육방식은 그 효용성에 대해 의심을 받게 되었다.  대상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정확히 묘사하는 전통적인 아카데미 교육방식에 의한 사실적인 표현기법에 구애받지 않게 된 것이다.  손의 기능보다는 미적 감수성이라든가, 상상력이나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을 계발하는 것만으로 얼마든지 작가행세를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추상세계의 등장은 전통적인 가치를 중시해온 미술의 입장에서는 기존질서를 부정하는 예술적인 혁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추상세계는 속도를 수반한다.  왜냐하면 상상력 무의식 잠재의식으로부터 열리는 추상세계에서는 순간적인 표현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영감을 받아쓰기 위해서는 즉자적인 표현방법이 요구된다.  상상이나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이란 실재하는 현상이 아닌 까닭에 영속성을 지니지 못한다.  대부분 작업하는 그 순간에만 나타나는 신기루 같은 것이어서 아주 짧은 시간선상에 스치듯 지나가는 것이다.  그것을 캔버스나 입체적인 형태로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그 짧은 시간 안에 모든 작업을 마쳐야만 한다.  여기에서는 거의 반사적인 표현행위가 필요하다.  속도가 요구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데생을 하고 다시 채색으로 입히는 전통적인 표현기법으로는 추상적인 표현에 반응할 수 없게 마련이다.

  추상세계에 돌입한 20세기 미술은 단순한 표현의 빠르기로서의 속도만이 요구된 것이 아니었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해 어제의 새로움이 오늘에는 구식이 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어쩌면 20세기의 미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형태로 쏟아져 나온 새로운 표현양식 및 형식도 따지고 보면 속도의 산물인 것이다.  누가 먼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용하는가에 따라 표현양식 및 형식의 선구자 자리에 대한 선점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때 누구보다도 먼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용했을지라도 정보를 관리하는 매스컴에 소개되지 않으면 소용없다.  따라서 새로운 작업에만 매달려서도 안 된다.  남보다 한 발 먼저 발표해야만 한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설령 누구보다도 먼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용한 작업을 발표했을지라도 세계적인 정보체계를 장악하는 매스컴에 소개되지 않으면 그 사실을 인정받을 수 없다. 

  미국이 20세기 후반 세계미술을 선도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로서의 정보통신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보통신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앞선 기술과 그를 운용하는데 필요한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  미국은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보다 빠른 정보통신 기술과 경제력에서 우위를 누림으로써 세계미술을 주도할 수 있었던 셈이다. 

  20세기 후반 미술의 상당부분이 과학의 소산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비디오 아트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전기 전자 전파를 이용하는 전위적인 미술은 모두가 과학과 손을 잡은 결과물이다.  홀로그래피 일렉트로닉스 네온 레이저 신시사이저 사진작업 컴퓨터그래픽은 물론이요 기계적인 작동을 필요로 하는 설치작업 등 20세기 후반에 각광받은 전위적인 미술은 바로 속도의 소산인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미술은 전통적인 미학개념에서 볼 때 과학에 불과하다.  손의 기능이 퇴행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인 것이다.  이들 작업에서 전통적인 손의 솜씨에 의한 그리기나 만들기는 거의 필요 없다.  설령 손을 빌리는 부분에서도 고도의 숙련된 기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숙련과정이 없는 아주 초보적인 신체적인 기능만으로도 그 작업을 수행하는데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아니 손의 기능을 숙련시키는 대신 과학이 만들어낸 도구를 사용하는 별도의 방법을 익히는 것으로써 족하다.  또한 거기에는 미적 감수성이 크게 요구되지 않는다.  미적 감수성 대신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따른 전자기기의 조작과 기계를 작동 운용하는 지적인 해결능력을 필요로 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라는 이름의 미술로 등장했고, 또 사회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이른 바 대중미술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포장한 현대미술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20세기 미술계를 풍미했다.  이 모든 결과는 속도를 받아들임으로써 비롯된 현상인 것이다.  이와 같은 미술활동에 동조하고 옹호하는 사람들은 모더니즘과 그 이전의 미술양식을 진부한 것으로 치부한다.  속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 단순노동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속도가 없는 미술은 현대미술이 아니라고 단언하고 싶어할지 모른다.

  컨템포러리 아트 신봉자들은 속도를 미학의 개념으로 끌어들였다.  전통적인 순수미 또는 숭고미는 현대미술에서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허상이라는 것이다.  현실감 즉 속도감을 현대미학의 중심에 두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미술을 진보 발달 발전의 개념으로 받아들인 데서 비롯한다.  현대미술이란 변화하는 시대, 다시 말해 과학의 발달에 따르는 시대상황을 반영하고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속도의 미학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일련의 전략적인 방법론이다. 

  속도의 미학에 깊이 빠져든 진보적인(?) 미술가들 일부는 최근 그들 스스로가 속도를 경계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속도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속도에 대한 개념의 차이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속도미학을 신봉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속도의 영역에 갇혀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컨템포러리 아트의 대부분이 속도의 산물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21세기의 미술도 여전히 속도의 미학에 사로잡힐 것인가.  그렇다.  이제까지 속도의 미학을 즐기고 그를 주도해온 사람들은 여전히 속도에 열광할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과학자들의 주변을 기웃거리며 새로운 과학적인 발명품 및 개발품을 찾기에 혈안이 되고 있으리라 짐작되는 것이다.  새로운 과학의 발명품 및 개발품을 곧바로 미술현장으로 끌어들이는 기민함이야말로 현대미술가로서의 능력을 좌우하는 미술가(?)로서의 기능이자 기술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과학기술이 눈에 띄면 주저하지 말고 뉴욕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보수적인 화상들이 밀집해 있는 57번가보다는 소호나 첼시의 실험적인 작업을 선호하는 진보적인 화상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타임스퀘어든지 브로드웨이 어느 한쪽에서 퍼포먼스를 벌여야 한다.  물론 미리 매스컴에 안내장 정도는 발송해야 한다.  뉴욕시민들은 어떠한 형태의 전위적인 예술가들의 행위에 관심을 가질 만큼 익숙해 있을뿐더러 또 적당히 흥을 돋구어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식의 도전이 아니라면 속도를 중심적인 가치로 두는 현대미술을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는 안 된다.  남보다 빠른 새로운 과학적인 생산물의 뒷받침 없이 단순히 유행하고 있는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미술을 따르는 것은 들러리 역할에 그치고 마는, 예정된 운명의 열차를 타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속도의 미학의 전령자 백남준이 뉴욕에서 성공할 있었던 것은 바로 비디오라는 현대과학의 첨단 전자제품을 이용한 새로운 속도의 개념을 제시한 최초의 작가였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현재로서는 속도가 만능인 것처럼 보인다.  디지털 기술의 눈부신 발달을 상징하는 인터넷은 속도를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속도감에 취하고 또 길들여질 것이다.  가상현실에 취한 사람들은 당연히 현실적인 속도감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미술에서도 인터넷을 이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작업이 속속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인간의 신체적인 기능은 디지털의 속도에 적응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보다 인간적인 그리고 자연적인 환경이 그리워지게 될 것이다.  속도를 역류하는 가역현상이 일어날 것이라는 뜻이다.  거기에서는 과거의 미술, 전통적인 그리기 및 만들기에 대한 새로운 가치 발견을 위한 운동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전통적인 그리기 및 만들기를 신념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시대의 도래에 대한 희망으로 이 비인간적이고 반자연적인 시대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신항섭)


 <미술신문 2000년 3월20일(제23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