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명시감상 (28) -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펜보이 2007. 7. 30. 07:46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강연호 


  문득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

  저 물 위의 파문, 언젠가 그대의 뒷모습처럼

  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

  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

  가엾은 연초록에서 너무 지친 초록에 이르기까지

  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

  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

  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

  처음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줄 알았지

  그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 모은다는 것을

  흔들다가 저렇게 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의 무수한 연속이거나

  혹은 모든 정지가 움직임의 한순간이듯

  물 위에 떠서 머뭇거리는 저 나뭇잎의 고요는

  사라진 파문의 사라지지 않는 비명을 숨기고 있다

  그러므로 글썽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상은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언젠가는 사라지고 만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마찬가지다. 영원한 존재란 없다. 만물은 저마다의 특질에 따른 생명의 주기를 가지고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 생명의 주기는 이미 정해진 약속이다. 그 약속을 파기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존재의 주기, 즉 약속된 시간의 흐름에 맡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무생물이야 어찌 할 수 없다지만, 생명체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 주기를 조금은 변경할 수도 있다. 맹목적인 복종이나 거부가 아니라 순응하면서 이미 주어진 주기를, 아니 약속된 바를 조금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혜는 아니다. 모든 생물체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인간은 사고력으로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생명의 주기를 임의적으로 조율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인간 역시 생명의 주기를 벗어날 수도 없고 약속된 시간을 파기할 수도 없으니 여전히 속박된 존재일 따름이다. 생명의 주기에 관한 한 생물체는 스스로의 선택권이 없다. 다만 주어진 약속의 시간 안에서 존재의 의미 또는 그 가치를 변경할 수는 있다. 이 정도의 선택의 여지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체에게 균등하게 부여된다.

  강연호시인은 적어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체란 그 모양이 어떠하고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든 생명의 유한성이라는 문제 앞에서는 균등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려 한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는 명제가 시사하고 있듯이 생명체의 그 시원, 즉 뿌리는 같다는 점을 갈파하고 있다. 또한 아주 하찮은 미물일지라도 그 미미한 움직임조차 결코 공연한 것이라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는 듯 싶다. 생명체 또는 유기체의 미세한 움직임에는 그 외적인 크기를 훨씬 뛰어넘는 존재의미가 담겨 있다는 성찰이 이 시의 살 속에 박힌 심지이다. 어떤 하나의 존재가 움직임으로써 또 다른 존재가 움직이게 되고, 그럼으로써 이 세상이 서로 얽히고 설킨 유기적인 집단으로서 유지된다는 것이다.

  ‘문득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저 물위의 파문, 언젠가 그대의 뒷모습처럼/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

  주어진 생의 주기를 다하여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물위에 떨어지는 나뭇잎은 생명을 잃는 것으로써 그 의미를 끝내지 않고 또 다른 형태로 존재를 과시하듯 파문을 만든다. 그리고 파문은 잠시 물위의 표정을 바꾸고 사라진다. 나뭇잎이 그러하듯이 파문도 존재의 주기가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파문은 시인의 감수성을 건드리면서 다른 의미로 전이된다. 나뭇잎이 물위에 떨어져 만드는 파문이 시인 자신의 마음의 물결로 전이되는 것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존재는 완전히 소멸하지 않은 순환의 흐름에 어떤 식으로든지 지속적으로 관여한다. 그 순환의 흐름이야말로 세상이 유지되는 법칙이다. 나뭇잎은 생명의 주기를 소진하여 떨어지는 존재가 된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파문을 만들면서 의미를 되새기도록 함으로써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실증한다. 실제로 나뭇잎이 썩어 거름이 되어 새로운 나뭇잎을 만드는데 관여하는 것은 보다 실제적인 생명의 순환의식이다. 이는 존재의 사라짐을 부정하는 확고한 증거이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

  어떤 존재를 가능케 한 그 최초의 움직임 또는 그 존재의 태어남이야말로 이 세상의 근원이자 생명의 시발점이다. 따라서 그 존재가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정말 사라지고 마는 것인가를 묻고 있다. 파문에는 그 근거인 동심원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파문이 일어나게 된 동기로서의 동심원처럼 현재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의 자리, 또는 존재의 근원에 이르게 된다. 존재의 근원에 이르는 역순의 행로를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기억이다.

  ‘가엾은 연초록에서 너무 지친 초록에 이르기까지/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

  나뭇잎이 생의 주기를 다하여 떨어지는 것은 운명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러기 전까지는 모든 생명체가 저마다의 목소리를 다하여 존재성을 알린다. 한 나무에 달린 잎새들도 한결같지는 않다. 저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로 자신의 존재, 그 고유성을 확정짓고자 한다. 이러한 의지야말로 생명체로서의 아름다움이다. 주어진 시간 안에서 확고한 자신의 존재성을 확보하려 애쓰는 모습은 아름답다. 그것이 곧 생명체에게 주어진 삶의 진정성인 까닭이다.

  ‘처음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줄 알았지/그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스스로를 흔들어/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모은다는 것을/흔들다가 저렇게 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

  그렇다. 이 세상에 나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축복된 일이니 부단한 노력으로 스스로를 가꾸어 보다 아름답고 건강하게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으로써 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들일 수 있다. 이는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스스로의 의지의 결과이다. 주어진 생의 주기가 다하기까지 최선을 다하여 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다가 몸을 던지기도 한다. 던진다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인 것이다. 운명에 대한 순응이 아니라 자의적인 선택인 것이다. 이는 생명의 유한성을 의식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물론 생명의 주기를 다하였기에 가지 끝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이지만 이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의적인 결정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기억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의 무수한 연속이거나/혹은 모든 정지가 움직임의 한 순간이듯/물 위에 떠서 머뭇거리는 저 나뭇잎의 고요는/사라진 파문의 사라지지 않는 비명을 숨기고 있다/그러므로 글썽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 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긍정이자 감복이다. 세상을 이루는 온갖 생명체들의 그 진지한 삶의 모습은 참으로 눈물겨운 것이며, 삶의 주체인 모든 생명체는 존재가 소멸하면서도 그와 같은 사실을 믿지 않고 다음 생으로 이어지거나 최소한 기억된다고 확신한다. 이와 같은 믿음이야말로 생명체의 자기존재성의 확인이며 동시에 세상을 지탱케 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