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여있는, 그러나 흔들리는
-우포에서
나희덕
후두둑 빗방울이 늪을 지나면
풀들이 화들짝 깨어나 새끼를 치기 시작한다
녹처럼 번져가는 풀은
진흙뻘을 기어가는 푸른 등처럼 보인다
어미 몸을 먹고 나온 우렁이 새끼들도 기어간다
물과 함께 흔들리고 있는 풀들
그 사이로 빈 우렁이 껍데기들 떠다닌다
비가 아니었다면
늪은 무엇으로 수만 년을 견뎠을까
무엇으로 흔들림의 징표를 내보였을까
기어가는, 그러나 묶여 있는
고여있는, 그러나 흔들리는
후두둑,
후두둑,
후두후둑,
빗방울이 늪 위에 그려넣는 무늬들
오래 고여 있던 늪도
오늘은 잠시 몸이 들려 어디론가 흘러갈 것 같다
세상은 우리가 보려는 만큼만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이 보여주는 만큼만 본다. 세상의 만물상은 저절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보려는 이의 의지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여지는 것이 세상이다. 단순히 시지각만으로 인지되는 세상은 실상이 아닐 수도 있다. 시지각이 감지하는 것은 세상의 거죽일 뿐이기에 그렇다. 세상의 진면목, 즉 알맹이는 오직 마음의 눈을 통해 볼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우주 또는 자연현상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 및 호기심을 통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세상을 보는 또 다른 형태의 방식은 지식의 힘을 빌리는 일이다. 다른 이가 이미 보아온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사색의 힘이다. 스스로 생각이 깊어지면 세상사를 미루어 보는 눈이 열리게 된다. 생각이 깊어진다는 뜻은 세상에 대한 이치를 터득하는, 즉 물리가 튼다는 뜻이다. 물리가 트면 세상의 모든 것이 환하게 눈에 들어온다. 이제껏 보이지 않던 사실들이 확연히 시야에 박히는 것이다.
시인은 지식으로 닦은 눈을 통해 사물의 존재방식을 인식하면서 사색의 힘으로 세상의 이치를 관통한다. 일테면 직관력과 같은 형태의 눈을 가지게 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세상에 대한 색다른 관심으로 이루어지는, 지적인 호기심과 사색 및 직관 그리고 미적인 감수성의 산물이다. 시가 아름다운 이미지로 귀결할 수 있는 것은 미적인 감수성으로 다듬어지는 언어의 유희이기 때문이다.
나희덕 시인의 “고여 있는, 그러나 흔들리는 -우포에서”는 자연에 대한 관심과 지적인 호기심이 어떻게 발동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늪이라는 실상을 통해 오묘한 자연의 법칙을 깨닫고 그로부터 사색의 근거를 찾아냄으로써 대자연의 생명활동, 그 순환의 법칙을 통찰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 시는 거대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시인은 아주 부드럽고도 나긋나긋한 손길로 세상을 어루만지며, 다만 생명활동의 경이로움에 우리를 감전시킨다.
늪은 수 만년 혹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있어온 생물의 서식지이다. 늪은 호수처럼 깊지도 않으면서도 물이 마르지 않아 침수식물과 수생식물이 공생한다. 그 늪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숱한 생명체들이 기거한다. 말하자면 늪은 천재지변이 없는 한 일정한 생육의 조건을 갖춘, 다양한 생명체를 키우는 젖줄이자 터전인 셈이다. 아주 하찮을 수도 있는 늪이 별안간 경이로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숨겨진 생명활동에 대한 엄숙성 때문인지 모른다. 시인의 눈은 늪에 시선을 주다가 엄숙한 생명의 법칙이 지어내는 달디단 샐비어 꿀 같은 세상의 아름다움에 문득 전율하는 것이다.
‘후두둑 빗방울이 늪을 지나면/풀들이 화들짝 깨어나 새끼를 치기 시작한다/녹처럼 번져가는 풀은/진흙뻘을 기어가는 푸른 등처럼 보인다’
늪에 비가 내리는 자연현상이란 결코 놀랄 일이 아닌데도 시인의 감수성은 곤충의 촉수처럼 빗방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늪은 늘 물이 고여 있어 생명활동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곳이건만 빗방울이라도 던지는 날이면 그 존재를 미처 드러내지 않던 생명체들의 활기찬 활동으로 갑자기 부산해진다. 빗물에 감응하는 풀들이 ‘새끼를 치기 시작’하고 영역확장을 위해 ‘녹처럼 번져가는’ 것이다. ‘진흙뻘을 기어가는 푸른 등’의 그 낮은 포복이야말로 생명의 놀라운 번식력을 상징한다.
시인의 시선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이번에는 생명의 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을 목도한다. 우렁이 새끼들과 역할을 다한 우렁이 껍데기를 대비시키면서 생명의 고리가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실증하려 한다. 자기 몸을 부숴 종족번식이라는 엄숙한 의식을 기꺼이 수행하는 우렁이의 어미는 마침내 ‘껍데기로 떠다니는’ 운명이 된다. 이는 어디 우렁이 뿐이던가. 지구를 덮고 있는 뭇 생명체들이 그러하며, 인간 또한 자기희생을 통해 대를 이어가는 생명의 순환의식에 순종한다.
‘어미 몸을 먹고 나온 우렁이 새끼들도 기어간다/물과 함께 흔들리고 있는 풀들/그 사이로 빈 우렁이 껍데기들 떠다닌다’
그저 예사로이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건만 생명의 연결고리를 전해준 어미 우렁이의 형해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그렇다. 존재의 사라짐처럼 서글픈 의식이 어디 있으랴. 더구나 자기희생을 담보로 하는 존재의 사라짐이야말로 생존의 법칙이라는 준엄한 부름에 따르는 일이 아닌가. 그 부름에 승복함으로써 ‘껍데기’로 떠다니며 세상을 마감해야 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서글프다.
그러나 그처럼 준엄한 생명의 질서를 장악하는 늪이라고 할지라도 ‘비가 아니었다면’ 어찌 수만 년을 한 결 같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다시 말해 ‘비가 아니었다면’ 어찌 뭇 생명체를 키우는 살아있는 존재임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을까. 늪은 ‘기어가듯, 아주 미미하게 존재성을 알리지만 납덩이처럼 묵직하게 한 곳에 정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가 하면 늪은 ‘고여 있는’ 가운데서도 ‘흔들리는’ 존재이다. 빗방울이 떨어짐으로써 수면이 차오르고 거기에 무늬가 생긴다. 늪은 비를 통해 잠시나마 항상 고여만 있는, 그리고 묶여만 있는 존재가 아님을 웅변할 수 있는 기회를 찾게 된다.
‘오래 고여 있던 늪도/오늘은 잠시 몸이 들려 어디론가 흘러갈 것 같다’
그렇다. 수만 년 동안 한 결 같이 무겁게 잠겨 있던 늪도 부산한 생명의 활동과 더불어 칙칙한 모습을 벗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물이 차오르는 상황을 ‘몸이 들려’로 표현한 멋진 구절을 통해 아름다운 늪의 변신을 보게 된다. 늪은 비를 매개로 하여 비로소 자유로운 생명체처럼 제 몸을 벗어나 너른 세상과 한통속이 되는 것이다.
시인의 눈은 이렇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이 전혀 다른 곳, 다른 모습일 수도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신항섭: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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