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26) - 절간 이야기 19

펜보이 2007. 7. 23. 09:26
 

 절간 이야기 19

              

  오현


  사내 대장부 평생을 옷 한 벌과 지팡이 하나로 살았던 雪峰(설봉)스님은 말년에 부산 범어사에 주석했는데 그 무렵 곡기를 끊고 곡차를 즐겼지요.

  그날도 자갈치 그 어시장 그 많은 사람사람 사투리사투리 물비릿내물비릿내 이것들을 질척질척 밟고 걸어 들어가니, 생선좌판 위에 등이 두툼한 칼로 생태를 토막내고 있던 눈이 빠꼼한 늙은 ‘아즈매 보살’이 무르팍을 짚고 꾸부정한 허리를 펴며 뻐드렁니 하나를 내어 놓았지요.

  “요새 시님 코빼기도 본 사람 없다캐싸서 그마 시상살기 싫다캐서 열반에 드셨나 갰나캐도요. 오래 사니 또 보겠다캐도......”

  이러고는 바짝 마른 스님의 손목을 거머잡는가 싶더니 치마 끝자락으로 눈꼽을 닦아내고, 전대에서 돈 오천원을 꺼내어 곡차 값으로 꼭 주어 주고, 이번에는 빠닥빠닥한 일만원권 한 장을 흰 봉투에 담아 주머니에 넣어 주면서

  “둘째 미누리 아아가 여태 태기가 없다캐도... 잠이 안 온다캐도요. 둘째놈 제대 만기제대하고 취직하마 시님 은공 갚을끼라캐도요. 그마 시님이 곡차 한 잔 자시고요. 칠성님께 달덩이 머스마 하나 점지하라카소. 약소하다캐도 행편 안 그렁교?”

  하고 빠꼼빠꼼 스님을 쳐다보자. 스님은 흰 봉투 속을 들여다보고는 禪話(선화) 하나를 만들었지요.

  “아즈매 보살! 요새 송아지 새끼 한 마리 값이 얼마인 줄 알고 캅니꺼? 모르고 캅니꺼? 도야지 새끼도 물 좋은 놈은 몇만원 한다 카는데에 이것 가지고 머스마 값이 되겠니꺼?”

  그러자 맞은편 좌판 앞에서 물오징어를 팔고 있던 젊은 아즈매 보살이 쿡쿡 웃음을 참다못해 밑이 추지도록 웃고 말았는데, 때마침 먹이를 찾아왔던 갈매기 한 마리가 그 웃음소리를 듣고 멀리 바다로 날라 갔는데, 그 소문을 얼마나 퍼뜨렸는지......

  그 후 몇 해가 지나 설봉스님 장례식 때는 부산 앞바다 그 수백 마리의 갈매기들이 모여들어서 아즈매 보살들의 울음소리를 흑흑흑...... 흉내를 내다가 눈물 뜸뜸 떨구었지요.


  문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시 소설 수필 희곡 시나리오 따위의 여러 가지 표현양식을 아우르는 문학은 그것이 실제의 사실에 근거하든, 아니면 순전히 상상에 의하든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제시한다. 다양한 형태의 인간 삶의 모양을 만들어내 인생에 대한 이해 및 실천의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언제나 실현성이 낮은, 활자가 만들어내는 가상의 세계일 따름이다. 그러기에 문학과 현실이 합치되는 것을 이상으로 여길 수는 없다. 문학은 어디까지나 인생에 필요한 반면교사일 따름이다.

  우리가 시를 읽으면서 느끼는 감동은 그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감동이 어떤 유형의 것이든 간에 한동안은 그 여운에 사로잡힌다. 시를 통해 맛보는 미적 감흥의 여운은 세상 앞에서 곧바로 설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시로부터 세상을 보는 방식을 깨우칠뿐더러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시인은 우리의 일상적인 시각을 넘어 전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노래하기에 그렇다. 더 크고 너른 세상과 마주하는데 필요한 용기를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가 반드시 교훈적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직설적인 언어로 가르치려 들면 시적인 감동과 여운은 신기루처럼 금세 사라지고 만다. 시의 묘미는 그 시가 지시하는 진실을 감추는데 있다. 그리고 시를 읽는 이는 혼자만의 감수성 및 지적인 이해를 통해 그 진실을 캐내는 수고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시는 은유 상징 암시 비유 따위의 간접어법으로 무장하기를 즐긴다. 시를 읽는 이에게 그 무장을 해제시키는 즐거움을 맛보게 해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오현 시인의 “절간 이야기 19”는 실제의 사실을 보는 듯이 담담한 산문체로 풀어나가지만 끝내는 사뭇 교훈적이다. 하지만 그 교훈이란 꾸짖는 준엄한 훈장의 목소리가 아니다. 아주 나긋나긋한 아가씨 목소리처럼 또는 아지랑이를 비켜 가는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며 우리들 의식 및 감정의 공명을 울린다. ‘절간 이야기’라는 명제가 시사하듯이 실재했던 스님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중심에 둔 구성이 마치 소설 같다. 구어체가 섞여 힘 안들이고 읽히는 것이 그대로 잘 닦인 산문이나 다름없다. 이 시는 언어의 농축미로 다가오는 일반적인 시의 형태로부터 한참이나 벗어난다. 그저 일상사 속에서 있을법한 성직자의 에피소드처럼 들리는 데도 마지막에 가면 그 어떤 시보다도 진한 여운이 가슴을 휘감는다. 그 여운 속에는 묵직한 교훈이 자리한다. 보이지 않는 뼈대로서의 교훈적인 이미지야말로 이 시가 지닌 설득력이다.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시적인 감동이 출렁인다.

  이 시에는 간명한 시어가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이 없다. 시가 되고자 하는 의도를 철저히 숨긴 채 무소유의 실천자인 스님과 시장 아주머니가 나누는 구수한 사투리를 빌미로 한 바탕 너스레를 떨 뿐이다. 그래서 이러한 형식의 시가 낯선 이들에게는 엽편소설 같은 산문이 왜 시가 되어야 하는지 의문으로 남을 법하다. 함축적인 시어로 쓰여 지는 긴장미 넘치는 시에 익숙한 이들로서는 쉬이 승복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래도 시인은 눈 딱 감고 재치 넘치는 말솜씨로 있을법한 투정조차 간단히 받아넘긴다.

  ‘옷 한 벌과 지팡이 하나로 살았던 설봉스님’이 ‘말년에 곡기를 끊고 곡차를 즐겼다’는 진술로 시작되는 이 시는 이미 허구의 세계가 아니다. 명백하게 드러난 사실의 전달처럼 들린다. 실재하는 자갈치 시장도 그러하거니와 ‘두툼한 칼로 생태를 토막내고 있는 늙은 아즈매 보살’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묘사되기에 그렇다. 더구나 “요새 시님 코빼기도 본 사람이 없다캐싸서 그마 시상살기 싫다캐서 열반에 드셨나 갰나캐도요. 오래 사니 또 보겠다캐도......”라는 원색적인 사투리는 웃음을 지어내면서 현실적인 상황을 증폭시킨다. 스님을 마치 친구를 보듯 하는 늙은 아즈매 보살의 존재는 삶의 진실성이 가지는 아름다움을 연꽃처럼 떠올린다. 아니, 이처럼 티없는 삶의 진실은 연꽃의 아름다움을 훨씬 능가한다. 그래서 가식이 담긴 교양 따위로는 전혀 걸러지지 않은 늙은 아즈매 보살의 순수한 어투에서 우리는 실제의 상황인 듯이 속수무책 빠져들고 만다. 이로써 감동의 여울에 휩쓸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대에서 돈 오천원을 꺼내주고, 이번에는 빠닥빠닥한 일만원권 한 장을 흰 봉투에 담아’ 설봉스님의 주머니에 넣어주는 늙은 아즈매 보살의 착한 마음씀씀이가 성성한 서릿발같이 가슴에 박힌다.

“둘째 미누리 아아가 여태 태기가 없다캐도... 잠이 안 온다캐도요. 둘째놈 제대 만기제대하고 취직하마 시님 은공 갚을끼라캐도요. 그마 시님 곡차 한 잔 자시고요. 칠성님께 달덩이 머스마 하나 점지하라카소. 약소하다캐도 행편 안 그렁교?”

  이에 맞대응 하는 스님의 걸쭉한 화답이 늙은 아즈매 보살이 마련하는 제법 심각한 분위기를 일변시킨다. 아주 건강한 웃음을 폭발시키는 것이다. 이런 반전이야말로 시가 지닌 묘법이다. 하지만 그 반전 이면으로는 웃음을 일거에 날리는 날이 시퍼렇게 선 禪(선)의 세계가 들어선다.

 “아즈매 보살! 요새 송아지 새끼 한 마리 값이 얼마인 줄 알고 캅니꺼? 모르고 캅니꺼? 도야지 새끼도 물 좋은 놈은 몇만원 한다 카는데에 이것 가지고 머스마 값이 되겠니꺼?”

  이쯤에 이르러 시는 심각하기는커녕 젊은 아즈매 보살을 밑이 추지도록 웃게 만드는 우스개로 돌변한다. 게다가 먹이를 찾아왔던 갈매기마저 젊은 아즈매 보살의 웃음소리를 듣고 멀리로 날아가 온 동네방네 소문을 퍼뜨렸는데......

 ‘그 후 몇 해가 지나 설봉스님 장례식 때는 부산 앞바다 그 수백 마리의 갈매기들이 모여들어서 아즈매 보살들의 울음소리를 흑흑흑...... 흉내를 내다가 눈물 뜸뜸 떨구었지요.’

  자갈치 어시장 아즈매들의 영락없는 친구였던 설봉스님을 잃은 허전함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이 어디 자갈치 어시장 아즈매들뿐이던가. 아즈매들과 노상 함께 했던 부산 앞바다 갈매기들 울음주머니마저 터뜨리고 만다. 아즈매들의 울음소리를 흉내 낸다고 했지만 설봉스님의 영원한 부재를 알리는 부음은 갈매기들에게도 더없이 슬픈 일인 것이다. 스님의 존재는 마침내 날짐승까지도 감화시켰다나 어쨌다나......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