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한성기
푸른 불 시그낼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
빈 대합실에는
의지할 의자 하나 없고
이따금
급행열차가 어지럽게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아득한 선로 위에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만 역처럼 내가 있다.
사람은 애초부터 철학적인 존재라고 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한다는 것이야말로 철학적인 존재로서의 이미지에 합당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것들을 통해 생각의 길을 넓혀가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자신의 존재에 이르게 된다. 이쯤에서야 비로소 철학적인 존재로서의 본연의 모습일텐데, 삶과 관련된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해 의문하고 어떤 답을 얻으려 고뇌하는 태도를 통해 마침내 완연한 인간으로서 탈바꿈하는 것이 된다. 인간에게는 동물과 다른 점이 많이 있지만 자기자신을 돌아본다는 그 엄숙한 태도야말로 인간임을 스스로 천명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럴 때 인간은 대체로 혼자만의 시간 속에 잠긴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시선을 내부로 돌리는 것을 뜻한다. 일체의 외부적인 간섭으로부터 홀가분하게 스스로를 놓아둠으로써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세상과 차단된 혼자만의 공간에서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의문과 답으로 이어지던 간에 스스로의 삶에 대해 보다 신중한 태도를 가지게 할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어진 생각의 기능은 문자언어를 통해 더욱 증폭되고 깊어지게 되는데 이는 바로 철학자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이다. 보통의 우리는 문자언어보다는 현상계의 어떤 사물을 근거로 하여 생각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하지만 정신 및 감각세계 또는 현상계를 빌어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는 방법 말고도 철학과는 또 다른 형태의 문자언어인 시를 통해 사고하는 방법이 있다. 시는 우리에게 인간답게 사고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가장 아름다운 교사인 것이다.
한성기 시인의 ‘역’은 아주 간결한 이미지로 압축되어 있다. 기차역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시선을 집중시킴으로써 시각적인 이미지의 간결함과 함께 의식의 심화를 유도한다. 기차역은 인간이 어떤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출발점이다. 그러나 거꾸로 보면 기차역은 출발점이 아니라 누군가의 목적지가 된다. 그런가 하면 기차역은 선로의 어느 한 지점을 장악하고 있을 뿐인 그 전체의 중간 기착점에 불과하다. 출발하는 자와 도달하는 자가 공유하는 곳으로서의 기차역은 그래서 흔히 인간의 삶의 여정에 비유되곤 한다. 물론 이때 기차역은 대체로 문학적인 사유의 지평에 놓이기 일쑤이다. 보내는 자와 맞이하는 자가 함께 하는 곳이기도 해서 희비가 엇갈리는 정경은 기차역에서 흔하디 흔하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서리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떠나고 보내며, 돌아오고 맞이한다는 그 행위는 일상사여서 대수롭지 않은 듯싶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간 삶 중에서 그보다 엄숙한 순간이 어디 있으랴. 인간 삶이란 결국 자신과 타인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로 점철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기차역이란 그처럼 반복적인 드라마를 위한 없어서는 안될 세트인 셈이다.
두 줄의 무쇠로 된 선로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침목을 거듭거듭 물고는 끝없이 이어지는 평행선을 달린다. 사람과 짐을 실은 객차가 그 선로를 따라 육중한 무게의 쇠바퀴를 다그치며 무한궤도의 운동을 충동질한다. 선로의 이음새를 지날 때마다 털커덕 털커덕거리는 그 반복음의 무심함에 취해 잠시 삶의 고뇌를 잊기도 한다. 그러나 그 소리에 익숙해질 때쯤이면 떠나는 자는 떠나는 대로, 돌아오는 자는 돌아오는 대로 각박한 현실공간에 감금되고 만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역’은 남루한 드라마가 있을 따름이다. 급행열차가 그냥 지나쳐버리는 단역이나 다름없는 자그마한 역을 주시하면서, 시인은 자신이 연루된 인간 삶의 정체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여기에서 시인의 시선은 아주 은밀하고도 섬세하게 인생살이가 주는 의미에 집중한다. 마치 햇빛을 받아내는 돋보기의 초점처럼 삶의 의미를 꿰뚫으려는 것이다. 철길을 철길답게 만들어주는 정경으로서의 시골 기차역이 만들어내는 시적인 이미지는 어딘가 애상의 냄새가 짙다.
‘푸른 불 시그낼이 꿈처럼 어리는/거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
시인은 ‘그냥 지나가도 좋다’는 푸른 신호등이 무심히 서 있는 조그만 역을 주시한다. 푸른 신호등은 지속을 뜻한다. 진행해도 좋다는 그 무언의 약속을 실천하는 기차역의 푸른빛 신호등이 던지는 의미는 그의 시적인 상상력 속에서 예상외로 심상치 않다. 가벼운 바람에도 닻에 묶여 망연히 흔들리는 조각배처럼 그저 습관처럼 푸른빛을 발하는 신호등이 있어 역은 역으로 존재할 수 있다. 한데도 여기서의 ‘역’은 할 일이 많지 않다.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역으로서의 기능이 하잘 것 없는 까닭이다. 이는 세상에 대한 존재의 가벼움을 시사한다. 무언가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한 묵직한 일이 없다. 그저 정해진 일상대로 어쩌다 찾아오는 한 두 사람을 실어 보내고 맞이하는 일이 고작이다. ‘조그마한 역’은 단지 그런 존재방식에 순응할 뿐이다.
‘빈 대합실에는/의지할 의자 하나 없고/이따금/급행열차가 어지럽게 경적을 울리며/지나간다’
역 대합실에는 잠시나마 고단한 이를 편하게 받아줄 의자 하나도 놓여 있지 않다. 사람의 왕래가 많지 않아 의자 하나조차 필요치 않은 한갓진 간이역의 정경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나마 간이역의 외로움을 덜어주는 것은 ‘이따금’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급행열차뿐이다. 그런데 정작 그 경적은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 잠든 듯이 머물러 있는 간이역의 정적을 간단없이 깨뜨리는 것이다. 이러한 정경은 변함없다. 눈이 오고 비가 와도 무심하게 되풀이되는 ‘조그만 역’의 일상사일 따름이다.
‘아득한 선로 위에/없는 듯 있는 듯/거기 조그만 역처럼 내가 있다.’
이쪽저쪽으로 아득히 멀어지는 선로 위에 그저 ‘없는 듯 있는 듯’ 존재하는 기차역을 보면서 시인은 문득 그와 다르지 않은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다. 없는 듯 있는 듯이 존재한다는 자아에 대한 성찰이야말로 거꾸로 너른 세상을 내다볼 수 있는 내 마음의 창이 아닌가. (신항섭: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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