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24) - 소녀는 배가 불룩했습니다

펜보이 2007. 7. 20. 08:04
 

  

  소녀는 배가 불룩했습니다


  전영경


  섭씨 0도

  해빙 봄 초원 꽃 나비 나비가 있어

  봄은 더욱 좋았습니다

  라일락 무성한 그늘 밑에

  오월은 있었습니다

  소녀가 붉으스런 얼굴을 가리우며 아니나 다를까

  계절을 매혹했습니다

  솟구친 녹음을 헤쳐 소녀는

  난맥(亂脈)을 이루었습니다

  라일락 무성한 꽃 가루 속에 묻혀 나비는

  바다를 잊었습니다

  바다

  몇 번인가 파도가

  소녀의 유방을 스쳤습니다 이방인처럼

  소녀는 붉으스런 보조개에 부끄러움을 가리우는걸랑

  필시 계절을 잉태했는가 봅니다

  섭씨 0도

  그 어느 날 나비는 학살을 당했습니다

  슬펐습니다

  소녀는 엽서와 더불어 목놓았습니다

  실컷 울었습니다

  병든 잎을 지우며 구구구구 비둘기가 날으던 날

  소녀는 배가 불룩했습니다


  비극적인 결말을 지닌 사랑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그래서일까, 신화나 전설 또는 실제로 있었던 비운의 사랑이야기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문학적인 픽션의 경우는 그렇다치고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 속에서도 비극적인 결말을 지닌 사랑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사랑이 두고두고 사람들에 회자되는 것은 정녕 아름답기 때문인가.  비극적이어야만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얘기인가.  아니면 비극적인 결말이 뱉아 놓은 허무의 냄새가 아름답다는 것인가.  아무래도 좋다.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건 비극적인 사랑을 아름답다며 미화한다.  미완의 사랑에는 아쉬움과 더불어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극적인 요소가 있는 까닭이다.  그런 애석함으로 인하여 미완의 사랑, 타자의 사랑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학적인 상상력은 비극적인 사랑이 지닌 애련함을 더욱 증폭시킨다.  그래서인지 유사 이래 수도 없이 많은 문학가들이 다투듯 더욱 더 애잔한 비련의 사랑을 그려내고자 애쓴다.  비극적인 사랑에는 감동이 있다.  현실적인 나의 사랑이 가지고 있는 건조함에 비해 비극적인 사랑은 얼마나 인간적이고 습윤한 것인가.  거기에는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는 적당한 슬픔과 함께 꿈같은 환상으로 이끄는 감미로움이 있다.  그런 사랑의 전형 하나를 가슴에 두고 사는 일은 아름답다.  그래서 문학가들은 온갖 형태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유형의 사랑을 제시한다.  아름다운 사랑, 그리고 가능한 한 비극미가 넘치는 사랑의 한 전형을 보여줌으로써 거기에 감동하는 우리들 사랑의 교본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전영경 시인의 “소녀는 배가 불룩했습니다”는 비극미가 넘친다.  단적으로 말해 비극적인 사랑 그 하나의 전형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극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  마치 대하와 같은 장편 서사시를 압축한 듯한 줄거리는 그대로 한편의 비극적인 드라마나 다름없다.  꽃과 나비로 상징되는 청순한 소녀의 사랑얘기가 이토록 아름답게 그리고 은유적으로 묘사된 문학이 이전에 따로 있었는지 모르겠다.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여 본능적인 사랑의 욕구에 이끌림으로써 발단한 소녀의 사랑은 가련하고 애틋하다 못해 가슴이 미어질 지경이다.

  ‘섭씨 0도/해빙의 봄 초원 꽃 나비가 있어/봄은 더욱 좋았습니다/라일락 무성한 그늘 밑에/오월은 있었습니다’

  얼음이 어는 온도, 즉 빙점으로서의 ‘0도’를 시어로 채택한 것은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0도’는 얼음이 어는 시점이 아니라 얼음이 풀리는 시점을 뜻한다.  봄으로 가는 문인 셈이다.  봄에 대한 인상이 그렇듯이 아주 서정적인 이미지가 전개된다.  적어도 처음 단계만으로 보아서는 서정미 넘치는, 해피엔딩으로 귀착할 듯싶다.

  신록의 오월을 가리켜 계절의 여왕이라고 했듯이 가장 왕성한 생명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때를 맞아 소녀들의 꿈도 부풀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성장하는 소녀의 탱탱한 볼에 분홍빛 꽃물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다.  수줍게 얼굴을 가리는 소녀의 싱그러운 모습을 보면 계절인들 어찌 모르는 체 할 수 있으랴.  계절조차도 능히 매혹될만한 그 풋풋한 소녀의 아름다움은 온 세상을 헤젓는다.  불끈불끈 솟구치며 싱싱하게 성장하는 나무들조차도 소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있다.  소녀의 매혹적인 모습에 녹음으로 우거진 숲이 혼란스러움에 빠지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능히 그럴만한 것이다.

  ‘소녀가 붉으스런 얼굴을 가리우며 아니나 다를까/계절을 매혹했습니다/솟구친 녹음을 헤쳐 소녀는/난맥을 이루었습니다’

  소녀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은 여기에서 라일락꽃으로 형상화된다.  라일락의 그 짙은 향기는 너끈히 나비를 유혹할 만하다.  ‘라일락 무성한 꽃가루에 묻혀 나비는’ 미구에 올 불행조차 전혀 예감하지 못한다.  또한 소녀는 황홀한 라일락꽃과의 사랑의 유희에 빠져든 나머지 유방을 스치는 파도의 암시를 가벼운 희롱으로만 받아들인다.  그래서 ‘붉으스런 보조개’에 번지는 부끄러움을 가린다.  무언가 숨길 것을 들킨 듯이 부끄러워하는 소녀의 행동은 사랑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강력한 증표이다.  

  첫 구절에서 나왔다가 반복되는 ‘섭씨 0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계절이 변화하는 분기점을 뜻한다.  앞에서는 겨울과 봄 사이를, 뒤에서는 가을과 겨울 사이를 가리킨다.  두 ‘0도’ 사이에는 봄과 여름과 가을이 있다.  이 세 계절은 모든 생물이 생식과 생육을 하는, 그야말로 생명의 환희로 넘치는 때이다.  나비로 상징되는 남자와 꽃으로 상징되는 소녀가 이와 같은 자연의 섭리에 의해 사랑하니, 필경 그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꽃에 나비가 날아들어 수분이 이루어지고 열매를 맺는 이치이다.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러나 가혹하게도 소녀에게는 불행이 찾아든다.  예시된 불행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 어느날 나비는 학살을 당했습니다/슬펐습니다/소녀는 엽서와 더불어 목놓았습니다/실컷 울었습니다’

  소녀가 받아들인 사랑, 즉 남자는 엽서만을 남긴 채 죽고만 것이다.  나비의 존재는 병사를 암시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전쟁으로 인한 상처이다.  그 상처는 소녀에게는 치유될 수 없는 불행으로 구체화된다.  나비, 즉 병사의 아기를 갖게 된 것이다.

  ‘병든 잎을 지우며 구구구구 비둘기가 날으던 날/소녀는 배가 불룩했습니다’ 

  이럴 때 병사에게는 자신의 분신을 남길 수 있다는 점에서 그나마 위로가 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소녀에게는 결코 벗어버릴 수 없는 멍에가 된다.  어린 소녀에게 곧 들이닥칠 감당키 어려운 삶의 무게는 너무도 끔찍한 형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 이보다 더 비극적인 사랑이 따로 또 있을까 몰라.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