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23) - 슬픔으로 가는 길

펜보이 2007. 7. 18. 06:50
  

  슬픔으로 가는 길


  정 호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

  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슬픔으로 걸어가는 들길을 걸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

  슬픔을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고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

  슬픔을 버리고 나를 따른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

  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

  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현대의 천문학 및 우주과학은 그야말로 눈부신 발달을 계속하고 있다.  평범한 인간의 상상력을 벗어나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손금 보듯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과학이 아무리 발달했을지라도 우주의 본질, 그 정체에 대한 접근은 한마디로 이제 그 시작에 불과할 따름이다.  우주는 그처럼 아득히 존재하는 신비의 대상이다.  하지만 거꾸로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서 일어나는 온갖 자연현상이라는 것은 우주의 미세한 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대자연이라는 것도 우주의 생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서 그리 특별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지구 안에서 일어나는 자연현상을 통해 우주의 한 속성을 이해할 수 있기에 그렇다. 

  인간은 어차피 자연현상에 적응해야 되는, 즉 우주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현상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주어진 조건으로서의 자연환경에 순응하면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신이 속한 우주가 만들어내는 현상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미묘한 자연현상을 통해 사색하는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찾는다.  밤과 낮이 구분되고 눈과 비가 내리며 사계절이 순환하는 현상을 지켜보면서 이러한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인간 스스로의 삶에 대해 의문을 일으키고 그 답을 얻으려 한다.  인간 스스로의 삶에 대한 사고야말로 철학의 본질이 아니던가.  그러나 철학이 반드시 난해한 추상언어의 나열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설령 인간의 정신적인 영역이란 눈에 보이듯이 명백히 드러나는 실체가 아니어서 불분명한 언어로는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어려운 관념언어의 유희가 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정호승 시인의 “슬픔으로 가는 길”은 아주 쉬운 언어들로 꾸며지고 있다.  그리고 그처럼 쉬운 시어들에 의해 꾸며지는 서정적인 정경은 그림 그리듯 선명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와 정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슬픔’이라는 추상명사가 지어내는 정서는 슬프지도 않거니와 우울하지도 않다.  오히려 여기에서 말하는 슬픔은 인생을 달관한 자의 체념과 같은 정서에 훨씬 더 가까운지 모른다.  그렇다.  그가 말하는 슬픔은 감상적이거나 우수에 젖게 하는, 그런 애조는 분명 아니다.

  ‘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는 표현은 어쩐 일인지 너무도 담담한 나머지 슬픔을 불러들이지 않는다.  어떤 미래의 행위를 다짐하는 결연한 의지처럼 보일 뿐이다.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구절에서 말하는 ‘슬픔’이란 정녕코 어떤 상대적인 존재로부터 비롯되는 감정적인 세계가 아닐 것이라는 심증이 앞선다.  오히려 차가운 이성적인 면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뒤를 잇는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이 시사하듯이 ‘슬픔’은 개인적인 감정의 한 표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슬픔’은 관념적인 것이다. 또한 ‘저녁 들길’이 지시하듯이 ‘슬픔’은 상대적인 존재로부터 비롯되는 것도 아니다. 

  ‘낯선 새 한 마리 길 끝으로 사라지고/길가에 핀 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슬픔’은 새나 풀꽃들과도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새’나 ‘풀꽃’의 존재는 시인의 ‘슬픔’에 무심하다.  따라서 시인이 꾸려 안고 있는 ‘슬픔’의 정체는 문득 理想(이상)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슬픔으로 가는 들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어떤 장소에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구체화되지 않는 어떤 것, 즉 현실로 오지 않는 것일 가능성이 많다. 

  ‘내 진실로 슬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라는 표현이 말하고 있듯이 슬픔은 ‘어루만져지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슬픔’은 어느 먼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시인의 옆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실체는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슬픔’은 더욱 관념적이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는 ‘슬픔을 앞세우고 지나가고’ 있다.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 ‘앞세우고 내 앞을’ 지나가는 것이 ‘슬픔’이요, 그런가 하면 ‘어디선가 갈나무 지는 잎새 하나’가 버리는 것이 다름 아닌 ‘슬픔’이기도 하다.  이처럼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는 ‘슬픔’이어서 그 정체는 갈수록 더욱 모호해진다. 

  그러나 ‘슬픔’은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의 최종적인 목표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서라는 목적이 선행한다.  그렇다면 시인이 말하는 ‘슬픔’은 서서히 안개를 걷고 그 모양을 드러내고 있는지 모른다.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서 있는 것은 ‘아름다운 사람 하나’를 만나려는 것이니, ‘슬픔으로 가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아름다운 사람’은 이상이요, 슬픔은 그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임과 동시에 방편이 된다.  ‘슬픔’을 인간 삶의 정서로 이해하자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자 태도가 될 수 있다.  여기에서 ‘슬픔’은 무저항의 어떤 삶의 방식을 의미하는 것은 또 아닐까.  인생을 달관한 자의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여러 감정 중에서 슬픔은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힌다.  슬픔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감정의 한 표출이다. 

  ‘내 진실로 슬픔으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으로/끝없이 걸어가다 뒤돌아보면/인생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저녁놀에 파묻히고’

  ‘인생을 내려놓고’ 저녁놀에 파묻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슬픔’은 현실로부터 이탈한 어떤 세계이자 그 정서임을 추측케 한다.  인생을 내려놓는다는 표현은 고단한 현실적인 문제로부터 잠시 떠나 대자연이 만들어내는 정서에 빠져든다는 뜻이다.  따라서 ‘슬픔’이라는 것은 현실적인 문제와 절연된 채 개인적인 이상세계로 가기 위한 정서적인 태도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그렇다.  ‘슬픔’은 저녁놀과도 같은 대자연의 정서에 쉽사리 감전되는 인간의 감정세계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다. 

  이렇듯이 복잡한 추측을 유도하는 ‘슬픔으로 가는 길’의 깊은 철학적인 세계와 상관없이 단순히 그림처럼 말간 서정적인 이미지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서라면 슬픔은 이미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인간이 아니어도 좋다.  나를 황홀한 꿈에 빠뜨릴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면 무엇인들 어떠랴.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