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22) - 장사를 하며

펜보이 2007. 7. 16. 08:10
 

                                                             

  장사를 하며


  양애경


  더 이상 세상에 무슨 아름다움이 있을까

  구겨진 지폐 몇 푼을 깎자 못 깎는다 흥정을 하고 욕을 먹고 돌아오는 밤에도

  별. 너는 나뭇가지 끝에 지상의 모든 빛을 흐리며 빛나고 있구나

  하지만 이제 나는 알고. 슬프다

  멀리서 반짝이기만 하는 것은

  몇 억년 이후에라도 닿을 수 없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더러는 문득 산다는 일이 얼마나 고마운지 누구에겐가 자꾸만 감사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렇다.  삶이란 고해의 바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살아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복인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를 맡고 감촉하는 다섯 가지 감각에다가 생각하는 기능까지 덧붙여 세상의 온갖 물상과 만나는 우리 인간의 삶은 더도 보탤 것 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크나 큰 축복인 셈이다.  봄이면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들의 눈부신 생명력도 그러하거니와 현란한 색깔로 치장하는 온갖 꽃들의 개화는 어떠하며, 저마다 기묘한 형체로 뽐내는 갖가지 곤충들의 존재방식은 또 어떠한가.  손에 쥔 것 하나 없다해도 이처럼 아름다운 생명의 대열에 동참한다는 사실만으로 삶이란 이미 충분히 벅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다 많은 것을 손에 넣고자 한다.  사회적인 동물로서의 인간은 다른 여타의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간결한 삶의 방식, 즉 먹고 배설하고 잠자고 번식하는 것만으로는 충족하지 못한다.  생명을 이어간다는 단순한 행사 이외에 너무나 복잡한 삶의 방식을 만들어냄으로써 그에 필요한 물질적인 욕구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기에 물질적인 욕구를 얼마나 해소시키느냐 여부가 행복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우리가 소유하려는 것들이란 인간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행복이란 것도 결과적으로는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행복이 어디 물질적인 충족만으로 오는 것인가.

  행복을 보장한다고 믿는 돈이라는 것이 그렇다.  물건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만능재주꾼이긴 해도 따지고 보면 인간 삶을 오히려 속박하는 존재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데 긴요하며 또한 편리한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되레 인간을 부자유스럽게 만든다.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의 하나처럼 되고 있다.  돈을 버는 일이 곧 사회생활이자 삶의 목적의 전부가 되고 있는 듯한 세상이다.  그렇다.  우리가 세상살이를 힘겹게 느끼는 것은 돈에 대한 쟁탈에 기인한다.  행복이 돈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삶은 돈을 버는데 바쳐지는 듯하다.

  돈 버는 일 중에서 가장 힘겨운 것은 물건을 파는 장사가 아닐까.  장사가 각박한 삶의 한 전형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우연은 아니다.  거기에서는 사회생활의 극한, 즉 돈버는 일에 얽매어 살아야 하는 인간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에 그렇다.

  양애경 시인의 “장사를 하며”는 ‘삶은 아름답다’는 따위의 상투적인 표현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음을 천명한다.  적어도 장사를 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힘겨워도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장사가 무엇인지를 체험하고 나서는 누구라도 ‘세상은 더 이상 아름다운 곳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더 이상 세상에 무슨 아름다움이 있을까’

  자조적으로 들리는 첫 구절만으로도 물건을 파는 상행위에 대해 얼마나 절망하고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이다. 

  ‘구겨진 지폐 몇 푼을 깎자 못 깎는다 흥정을 하고 욕을 먹고 돌아오는 밤에도’라는 구절은 물건을 파는 과정에서 실랑이를 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마음의 상처가 어떠한지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돈 몇 푼을 벌기 위해 낯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욕설까지 들어가며 시달려야 하는 삶의 방식은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절망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장사꾼에게는 그처럼 힘겨운 삶의 방식을 거두지 못한 채 물건을 파는 행위가 일상화되고 있다.  ‘구겨진 지폐 몇 푼을’ 벌기 위해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언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거듭거듭 빠져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각박한 현실은 누구에게나 참담한 좌절감만을 안겨준다.  그러다가 결과적으로는 체념하며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말이다.

  이렇듯이 뼈아픈 현실적인 고통을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그 누가 알까.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장사꾼에게도 현실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꿈이 있기 마련이다.  절망적인 순간에도 희망적인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있기에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장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심히 빛나는 별을 보면서 불현듯 이상이란 어쩌면 끝내 닿지 않는 허공의 별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시인의 시심의 촉수는 바로 여기에 닿아 있다.  허무주의에 이르는 것이다.

  ‘별. 너는 나뭇가지 끝에 지상의 모든 빛을 흐리며 빛나고 있구나’

  지상의 모든 별의 빛을 흐리게 할 정도로 초연히 빛나는 별의 존재는 무엇인가.  지상의 빛을 비웃듯이 홀로 빛나는 별의 존재방식이란 우리의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그럴지 모른다.  별은 인간에게는 지상(현실)에서 구할 수 없는 꿈의 상징이 아닌가.  그 꿈이란 이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별을 올려다보며 꿈을 키운다.  언젠가는 우리의 삶이 별처럼 아름답게 빛나리라는 꿈을 걸어두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알고. 슬프다/멀리서 반짝이기만 하는 것은/몇 억년 이후에라도 닿을 수 없는 것은/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꿈은 멀리 있고 현실은 가까이 있다.  별의 존재방식을 통해 문득 꿈과 현실이 하나가 되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슬픔이 밀려든다.  ‘지상의’ 삶이 가지는 그 차가운 현실상이 기운을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조적인 자각이야말로 현실과 꿈의 괴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힘겨운 현실에 아무런 대꾸도 대안도 제시해주지 못하는 존재란 끝내 허상일 수밖에 없다는, 그래서 이상이란 어디까지나 잠시 위안의 대상일 뿐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지상의 모든 빛’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저 혼자 빛나는 별의 무심한 존재방식을 통해 이상이란 끝내 허망한 것일 수도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 깨달음이야말로 절망이고 허무이다. 

  ‘몇 억년 이후에라도 닿을 수 없는 것’ 그것은 결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성찰은 힘겨워 하는 우리의 삶을 더욱 고단하고 슬프게 만든다.  꿈을 거두어들여야 할 만큼 각박한 현실이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그러나 시인은 허무로 매듭지으려 하지 않고 슬픔으로 마음을 닫는다.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