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8) - 미술비평의 존재이유

펜보이 2007. 7. 11. 13:43
 

  비평의 존재이유


  미술비평은 왜 존재하는가.  미술비평은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미술비평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미술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의문에 사로잡힌 적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비평은 미술가에게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미술비평은 작가가 작업에서 손은 떼는 순간부터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작가가 작업을 마친다는 것은 하나의 독립된 미술품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했다고 스스로 확신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미완성인 채로 남겨 둔다면 아직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작품으로서의 독립적인 가치를 결여하고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하지만 작업을 마치고 낙관하거나 사인을 하는 것으로써 그 작품은 작가의 손으로부터 벗어나 세상으로 나오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세상에 나와 스스로 독자적인 길을 걸어야 하는 운명에 놓이는 셈이다. 

  하나의 작품이 세상에 나오면 그 이후부터 세파에 시달리게 된다.  전시회를 통해서든 아니면 언론을 통해서든 얼굴을 드러내게 된다.  그도 저도 아닌, 개인 콜렉션이 되는 운명에 처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작품의 소유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친지나 친구들의 시선을 받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때 작품을 보면서 한 두 마디 가볍게 던지는 촌평이 바로 비평인 것이다.  그것이 비록 미술가나 비평가의 시각이 아닐지라도 미술작품을 보는 데 따른 감상자로서의 비평이다.  그렇다고 보면 미술작품은 작가의 손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그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어떤 형태로든지 비평을 받는 입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술작품은 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까.  그것은 기계적인 수단에 의해 생산되는 단순한 공산품이 아니라, 이른 바 정신적인 산물이라고 보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거기에는 공감하고 감동할 수 있는 예술적인 가치가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술작품 속에서 그러한 감동적인 요소, 즉 미적 가치가 과연 존재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하는 심리가 발동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미적 가치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심리에서 바로 비평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공산품이 아닌 정신적인 산물이 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과 시간 그리고 열정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노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일반인이 흉내낼 수 없는 남다른 재능이 있어야 함은 물론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그에 따른 자기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이 또한 예술인 것이다.  만일 예술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정신적인 가치’ 따위의 말에 현혹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예술은 분명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구든지 노력에 의해 어느 지점까지는 흉내낼 수는 있겠지만 일반성을 뛰어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고도의 기술 및 정신성을 구현하는 것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할 뿐이다.  그처럼 극소수가 도달하고 이룩한 예술세계는 당연히 일반인들의 시각에서 선망과 추앙의 대상이 된다.  아무나 도달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동경과 감동은 반드시 예술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어느 분야든지 최고점에 오른 인물은 선망의 대상이 된다.  그 중에서도 예술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선망의 대상이 된다.  무엇보다도 예술가는 눈앞의 이익이나 세속적인 명예에 현혹되지 않고 오직 자기신념에 의해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예술적인 가치 하나를 창조한다는 숭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듯 투철한 자기신념 및 정신 속에서 피어나는 숭고한 예술혼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그렇다.  예술품은 어떤 형태로든지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 감동적인 요소로 말미암아 예술품은 높은 화폐가치로 환산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미술작품을 보면서 사람들은 누구나 감동하기를 원하고 그러한 요소를 찾아내려 한다.  그러나 미술작품 속에 구현된 예술적인 가치가 모든 사람에게 같은 크기의 감동을 전하는 것은 아니다.  미술품이란 자연물이나 공산품이 아닌 고도의 숙련과 미적 감각이 만들어내는 세련된 아름다움과 깊은 정신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기에 그러한 숨겨진 가치를 읽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추상미술이 등장하기 이전의 미술은 단지 눈에 보이는 사실에 대한 시각적인 이해만으로도 그 속에 담긴 감동적인 요소에 감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상을 눈에 보이는 사실 그대로 묘사하는 고도의 테크닉만으로도 사람들을 충분히 감동시킬 수 있었다.

  이때 미술품을 보면서 감동하는 것도 하나의 비평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잠시 비평이라는 용어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보통은 ‘비평’이라고 하면 잘못된 점만을 지적하는 비판적인 시각 및 관점으로만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비평’의 참뜻은 ‘사물의 선악 시비 미추 등을 분석하여 분석 논란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비평은 부정적인 시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보는 것이 바로 비평인 것이다.  이에 반해 ‘비판’은 부정적인 쪽으로 기운다.  ‘비판’은 ‘인물 행위 판단 학설 작품 따위를 평가 검토하여 그릇된 점을 밝혀내는 일‘이다.

  따라서 비평은 긍정적인 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미술작품을 놓고 감동적이라거나 그저 그렇다는 식의 개인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니, 그것은 개인적인 권리이기도 하다.  우리가 미술작품 앞에서 좋다 나쁘다고 평가하는 것은 작가를 직접 겨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눈앞에 놓여 있는 작품 그 자체에 대한 평가일 따름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작가의 손에서 떠나는 순간 그 작품은 운명적으로 그 누구의 비평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미술작품에 대한 일차적인 비평은 작가가 아닌 작품 자체일 따름이다.  그런데도 대다수의 작가들은 작품에 대한 비평을 마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단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그를 보는 모든 사람들의 비평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그 작품을 직접 제작한 작가 자신으로부터도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제작하였다고 하여 비평적인 시각을 거두는 것은 옳지 않다.  작가야말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냉철한 비평자일 수 있어야 할뿐더러 동시에 혹독한 비판자여야 한다.  한마디로 자신의 작품을 철저히 객관화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장단점을 정확히 분석 파악 이해하지 않으면 작품의 지속적인 가치상승을 기대할 수 없다.  즉 더 이상의 자기발전을 기대할 수 없기에 그렇다.

  하지만 미술현장에서 보면 대다수의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비평을 금기시하고 있다.  타인의 비평은 물론이요 자신의 작품에서 시선을 돌리거나 눈을 아예 가리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이 곧 이상적인 세계로 확신한다.  그러나 그것은 확신이 아니라 착각이다.  모든 예술가가 다 그렇듯이 예술세계에서 완전함이란 존재할 수 없다.  개인적인 이상세계는 있을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을 충족시키는 이상이란 이 세상의 예술세계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예술의 이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허무일 뿐이다.  미술이 지향하는 이상은 모든 미술가 개개인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일 따름이다. 

  그래서일까.  한 작가로서 작품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작가일수록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막연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는 그런 이상세계에 도달해 있는 듯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어떤 외부적인 비평으로부터도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마치 자신이 이룩한 작품세계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영역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외부로부터의 비평적인 시선을 피할 도리는 없다.  작가 자신이 막는다고 하여 될 일이 아니다. 

  작가들이 가장 경계시하는 비평은 언론을 통한 전문가의 시각이다.  비평을 전문으로 하는 평론가의 논평에 대해 가장 민감한 것이다.  평론가의 관점이야말로 비평이 가지고 있는 전문성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작품에 담긴 미적 가치, 즉 예술적인 성과를 분석적으로 검증하는 일이야말로 전문적인 시각을 필요로 한다.  미적 가치를 분별해내는 일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인지하는 시지각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미술작품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 및 안목, 즉 심미안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평론가의 촌평 한마디는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미술작품은 겉으로 보이는 사실 이면에 작가의 사상이라든가, 이념, 의지, 감정 따위를 은유 상징 암시 등의 형태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작품 하나 하나는 미술가 자신의 총체적 삶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미술작품의 참다운 가치는 어쩌면 이와 같이 내면에 숨겨진 가치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시각적인 이해가 가능한 조형적인 아름다움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 그 안에 담긴 내재적인 가치를 살피는 것이 순서이다.  이때는 전문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찾아내려면 전문적인 식견과 심미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다수의 작가들은 평론가의 존재와 비평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작품이 비평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라면 쌍수를 들어 반기겠으나 비판적인 평가일 경우에는 그 자체마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서도 작가들은 평론가의 역할에 대해 불만이 많다.  비판적인 태도를 결여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틀리는 말이 아니다. 

  하기야 평론가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외부적인 간섭이나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소신을 밀고 나가는 것이 올바른 평론가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소신 있는 비평 비판을 받아들일 수 있는 풍토가 먼저 조성되어야 한다.  평론가가 미술계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존재라면 그들이 마음놓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풍토가 조성되었는데도 비평적인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을 때는 평론가가 비판받아도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한국미술계는 평론가의 비평활동이 활성화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특히 한국미술계에서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중진 원로들일수록 비평적인 분위기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가령 미술전문지나 일간지 시사주간지 종합잡지 등의 개인전시평에서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내용이 있으면 그 글을 평가 절하하거나 평론가를 직간접적으로 인신공격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러한 풍토에서는 올바른 비평활동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평론가의 비평에는 나름대로 기준이 있다.  개인이나 단체 전시회에 대한 평을 쓴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평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전시회 리뷰에 선정되는 일 자체가 평론가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글에 부분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애정이 담긴 충고 정도로 받아들이면 좋다.  그러한 객관적인 충고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참다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미술애호가들에게는 한 작가의 장단점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미술가와 애호가를 좀더 인간적으로 가깝게 만들어주는 계기도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작가들은 그 짤막한 지적이 자신이 쌓아온 모든 성과를 무너뜨리는 일로만 받아들이려 한다. 

  비평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작가는 대인이다.  세상을 크고 넓게 보면 한 순간의 짤막한 촌평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자신의 작업에 대해 진정 확신을 가지고 있는 대작가라면 평론가의 촌평 한마디에 두려워하지도 무너지지도 않는다.  그런 대가들은 오히려 그 어떤 부정적인 평가에도 초연하다.  그렇지 못한 작가들, 이를테면 세속적인 명예나 이해관계에 밝고 언론이나 교묘히 이용하여 그럴싸한 모습으로 포장되어 있는 작가들이 평론가의 비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온갖 술수로 쌓아올린 사상누각이 하루아침에 무너질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신항섭)

                                                                                                                                            

<"미술신문" 2000년5월1일 (제24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