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7) - 부적합하게 쓰는 미술용어

펜보이 2007. 7. 8. 12:12
   

 부적합하게 쓰이는 미술용어


  언어는 사회적인 약속이다.  언어는 의사 전달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면서 거대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가장 긴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서로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언어를 통해 사고하게 된다.  사회적인 동물로서의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바로 인간다운 사고를 매개하는 언어를 사용하는데 있다.  언어는 마치 생물과 같이 자기증식의 생리적인 구조를 가짐으로써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를 발생시킨다.  사회적인 규모 확대 및 문화의 발전에 따라 새로운 의미체계를 갖는 다양한 전문용어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문용어는 그것이 어떤 연유, 어떤 파생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든 간에 사용빈도가 높아지면서 공용어로 정착하게 된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과학이 발달하면서 각종 전문용어의 숫자도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새로운 사실(물질 물건을 포함하여 감각기관에 의해 감지되거나 인지되는 모든 형이하학적인 실체), 새로운 사상(감각기관으로는 감지되지 않더라도 의식을 통해 인식되는 모든 형이상학적인 내용)이 생기는데 따라 그를 사회적으로 인지하고 인식하기 위한 공식 명칭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이런 연유로 해서 새로운 용어 및 전문용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미술계에서도 예외 없이 다양한 새로운 미술용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새로운 미술용어는 미학의 발전과도 관계가 있음은 물론이다.  새로운 미학에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미술양식과 형식 그리고 그에 따른 새로운 표현방법과 재료가 뒤따르게 된다.  이처럼 새로운 미술의 출현을 사회에 알리는가 하면, 또 미술인들의 공감을 얻고 동참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공동으로 인지하고 인식할 수 있는 특정 용어가 필요하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미술용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미술이 생기거나 그와 관련한 미술운동이 일어나게 되면 그에 적절한 미술용어가 부수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난 20세기 미술은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오는 실험미술로 인해 급박한 변화의 물결을 탔다.  미술전문가들조차 새로운 미술용어를 습득하고 이해하기 급급한 나머지 그야말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와 병행하여 그처럼 다양한 실험미술과 그를 설명하기 위한 갖가지 새로운 전문용어의 등장으로 인해 미술인들 또한 의식의 혼란을 느껴야 할 정도였다.  그것은 급변하는 과학문명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사회적인 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유독 미술계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현상은 더불어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를 필요로 하게 만들었다.  박물학적인 박학다식한 지식인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새로운 미술용어가 통용되기까지에는 어떤 식으로든지 사회적인 공인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설령 한 두 사람에 의해 새로운 미술용어가 만들어졌다고 할지라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통용되지 못한다면 죽은 언어가 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사회적인 공인의 절차는 각종 언론매체와 저술 따위로 문자화되거나 일상적인 언어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끼어 들어 생명력을 얻게 되는 과정을 통해 성립되는 것이다.  이렇듯 새로운 용어의 정착과정은 사회적인 합의가 선결조건이다.  이때 사회적인 합의는 묵시적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미술용어의 정착은 미술인과 미술애호가라는 특정 전문집단의 사회적인 언어생활 속에서 공용어로서 일상화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최근 한국미술계에서는 한국미술, 즉 한국적인 미술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새로운 미술용어가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한국적인 풍토와 한국인에 의해서만 가능한 토착적인 ‘한국미술’을 규정하려는 노력과 병행하여 등장한 ‘자생미술’ ‘자생조각’ ‘자생회화’ 등의 새로운 용어가 눈길을 끈다.  이들 새로운 용어가 미술계에 등장하게 된 시점을 살펴보면 한국미술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과제, 즉 세계미술계에서 한국미술의 독자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일련의 한국적인 미술양식의 산출하고 그를 규정하기 위한 노력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다시 말해 특정 미술인의 개인적인 작업의 성과를 부각시키기 위한 전략적인 계산에서 비롯되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미술’ ‘조각’ ‘회화’ 따위의 기존 미술용어 앞에 “자생”이라는 접두어를 붙여 만든 ‘자생미술’ ‘자생조각’ ‘자생회화’라는 새로운 미술용어의 사용에서 그 용도가 적확하지 않다.  여기에서 ‘미술’ ‘조각’ ‘회화’ 등의 용어는 개인에 작업에 한정해서 사용될 수 있는 미술용어가 아니다.  물론 개인의 작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용어를 사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작업만을 한정하여 이들 새로운 용어를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미술’ ‘조각’ ‘회화’라는 미술용어는 미술전체나 어느 특정 장르를 가리키는 광범위한 대상을 포괄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생”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뜻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자생”의 사전풀이는 ‘저절로 나서 자람’이다.  가령 식물을 예로 든다면 누가 씨앗을 가져다가 뿌리거나 다른 곳에서 옮겨다 심는 이식과정을 거치지 않은 그야말로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형태로 생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위적인 어떠한 간섭도 배제한, 즉 인간에 의해 외국에서 씨앗을 가져다가 뿌린다거나 이식하지 않았는데도 자연적인 조건에 따라 생장하는 식물이 바로 자생식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자생미술에 대한 정의도 어렵지 않다.  한마디로 외국의 미술양식이나 미학개념에 영향을 받지 않는 가운데 한국이라는 나라의 특수한 문화적인 전통 및 그 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성립되는 고유의 미술양식이 바로 ‘자생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생미술’이란 어느 한 두 사람의 개인적인 미술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을 획득한 미술양식으로의 일반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미술양식으로서의 일반성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부지불식간에 하나의 공통적인 견해로 인식되고 있는 미술의 양식적인 특징을 뜻한다.

  따라서 한국미술에서 자생미술로서의 조건에 합당한 미술양식을 찾는다면 민화가 그 하나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민화는 제도권 미술로부터 독립한 서민들의 회화양식이다.  즉,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양반사회의 고급한 문화생활을 거드는 문인화, 또는 중국의 북화양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장식성이 강한 채색화, 즉 화원의 그림과 다른 입장을 취한다.  민화는 제도적으로 강제성을 가지고 보급한 것이 아니라 서민들의 삶 속에서 ‘저절로 이루어진’ 회화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민화는 서민들의 삶의 정서를 매개로 하는 일종의 생활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표현기법 및 형식에서 제도적인 강제성이 개입되지 않는 자유로움을 특징으로 한다.  물론 민화는 단순한 장식화 또는 생활화이기에 앞서 길흉화복과 관련한 상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민화의 대부분은 회화가 주는 아름다움에 대한 소박한 경의를 담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점은 민화가 가지고 있는 표현적인 특징이야말로 ‘자생미술’ ‘자생회화’라는 용어를 정의하는데 가장 실제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민화야말로 한국과 한민족이라는 특수한 생활 정서를 반영한 미술양식이라는 뜻이다.  한민족의 삶 속에서 그 어떤 필요성에 의해 저절로 생겨나고 하나의 보편적인 미술양식으로 자리잡게 된 회화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민화에서는 중국미술의 영향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중국의 어떠한 회화양식과 비교하더라도 당당히 독립적인 지위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전통회화의 대부분이 중국의 영향권에 있는 한국의 실정으로서는 표현양식의 독립은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러한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민화의 전통은 일제의 강점기를 거치면서 맥이 끊긴 채 역사적인 전설이 되어버린 듯한 상황이다.  전통적인 문화를 의도적으로 단절시킨 일제의 식민정책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민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부족이 민화의 단절을 재촉한 것이다.  한마디로 민화를 서민들이나 즐긴 초라한 미술로 그 가치를 폄하한 탓이다.  이렇듯 잘못된 문화의식이 아직까지 중국의 ‘국화’나 일본의 ‘일본화’에 대응할 수 있는 독자적인 회화양식을 확립시키지 못한 연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민화’는 한국미술의 양식화라는 문제를 이미 해결하고 있는 셈이다. 

  이럴 경우 바로 ‘자생미술’ ‘자생회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따른 타당성이 인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작업 또는 일련의 그룹전에서 ‘자생’이라는 용어가 무분별하게 쓰이고 있다.  물론 ‘민화’를 재현하거나 그 현대적인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는 전시회에서 ‘자생’이라는 용어가 쓰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민화가 아닌 새로운 경향의 미술에 ‘자생회화’ ‘자생적’ 따위의 용어를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  물론 ‘자생적인’ 미술양식의 성립을 위한 노력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표현양식이 성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생회화’ ‘자생적’인 용어를 쓰는 것은 성급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칫 ‘자생미술’ ‘자생회화’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따를 혼란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생미술’ ‘자생회화’에 대한 양식적인 특징이나 방법론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는데 문제가 있다.  미술계 내의 합의 또는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생미술’ ‘자생회화’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일 따름이다.

  우리는 이미 미술용어를 잘못 사용하는 데 따르는 혼란을 경험한 바 있다.  ‘한국화’ ‘한국성’ 따위의 용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함으로써 한국미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화’라는 용어를 쓰기 전에 우리는 일제시대부터 보편화된 ‘동양화’라는 용어를 써왔다.  그러다가 ‘동양화’라를 용어가 부적절하다 하여 1980년대부터 ‘한국화’라는 용어로 대체하여 쓰고 있는데 이 역시 적절한 용어선택은 아니다.  필자 또한 이러한 상황을 알면서도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어 여전히 ‘한국화’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한국화’는 고유명사이다.  다시 말해 한국그림에 한해 쓸 수 있는 용어이다.  그런데 ‘한국화’는 중국의 ‘국화’ 또는 일본의 ‘일본화’처럼 고유의 독자적인 표현양식이 확립되지 않음으로써 알맹이 없는 빈 껍질과 다름없는 상태이다.  고유명사로서의 내용이 불분명한 것이다.  알맹이가 없는 상태로 이름만 ‘한국화’로 부른다고 하여 한국미술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한국적인 그림’, 즉 ‘한국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해결되지 못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마당에 ‘자생미술’ ‘자생회화’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러한 용어를 쓰기 위해서는 먼저 ‘자생미술’ 또는 ‘자생회화’로서의 조형적인 요건이나 형식적이고 양식적인 특징을 먼저 제시하고 그와 병행하여 전시회를 통해 미술계 내부의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이러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한 두 사람의 개인적인 작업을 놓고 ‘자생미술’ ‘자생회화’라고 명명하는 것은 순서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자생미술’ ‘자생회화’는 개인적인 작업을 지칭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라 미술계의 일반성을 나타내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화처럼 ‘자생회화’로서의 양식적인 요건을 충족시키는 미술양식이 새로이 산출되고, 동시에 미술계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공인된 연후에는 그 같은 요건에 합당한 개인적인 작업에 대해서도 ‘자생회화’라는 용어를 써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한국화’ ‘자생회화’ ‘자생미술’이라는 용어의 제자리 찾아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바꾸어 말해 한국적인 고유의 미술양식의 성립을 위한 이론적이고 실제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한 노력이야말로 바로 우리의 미술이 중국이나 서구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자 길이기 때문이다.  (신항섭)


 <"미술신문" 2000년 7월5일(24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