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6) - 참다운 스승을 기다리며

펜보이 2007. 7. 8. 11:51

 

  참다운 스승을 기다리며


  문명의 이기 중에서 텔레비전은 인류의 시야를 무한대로 넓혀 놓는데 기여했다.  인간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는 오지의 생태계는 물론 월드컵과 같은 스포츠 경기를 지구 어디서나 실시간으로 볼 수 있도록 해준 것이 텔레비전이다.  텔레비전은 단지 흥미를 본위로 하는 오락적인 면뿐만 아니라 새롭고도 폭넓은 지식을 전하는 교육적인 도구로서도 훌륭히 기능하고 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갖가지 교양프로그램 중에서도 동물의 세계를 심도 있게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는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타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간중심의 세계관이 얼마나 오만한 것이었는가를 일깨워준 것이다.  하찮은 미물이라고 여겼던 곤충의 세계에도 인간세상과 마찬가지로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엄숙한 생명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우쳐준 것이 텔레비전이다.  텔레비전은 인간의 눈을 대신해서 세상의 진실을 전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사마귀의 생태를 기록한 프로그램을 본 일이 있다.  사마귀는 종족번식을 위해 교미를 한 다음 수놈이 그 자리에서 암놈에게 잡혀 먹히고 만다.  인간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참한 장면이지만 종족번식의 수단의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순간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회귀물고기인 연어는 오랜 여행 끝에 고향의 하천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는 마침내 생을 마감한다.  생명체의 종족번식이란 그처럼 장엄하고 엄숙한 의식인 것이다.

  이러한 다큐멘터리를 볼 때마다 동물과 인간을 비교해보게 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임을 자처하며 생명체의 원천인 자연마저 지배하려고 한다.  인간중심의 세계관으로는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인간과 대등한 고등동물이 존재하지 않는 지구상에서 절대자로 행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하지만 인간사를 돌아보면 반드시 이러한 생각에 동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경쟁상대가 없는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는 존재라면 마땅히 그에 상응한 책임감도 있어야 하거늘 현실적인 인간상은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행동으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인간중심의 가치관은 인간 자신으로 하여금 온갖 불공정한 게임을 서슴치 않는 비인간적인 행태를 낳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인간대 타 동물과의 경쟁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의 생존경쟁에서도 감히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비교하여 고등동물임을 자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사회를 지탱케 하는 도덕과 윤리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비교대상이 없을 만큼 고도로 발달한 지능으로 인해 다른 힘센 동물을 제압할 수 있는 도구 및 무기를 만들 수 있기에 고등동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고등동물로서 지구의 진정한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공정한 게임을 할 수 있는 규칙, 즉 도덕, 윤리, 법질서를 마련했다는데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규칙은 단지 인간사회에서만 효용성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규칙이 인간사회에서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데는 강제성을 띤 법보다는 자발성이 강한 도덕과 윤리가 더 적합한지 모른다.  법이 무너진 사회는 강제적으로라도 치유가 빠르지만 도덕과 윤리가 무너진 사회는 치유되기가 어려운 것도 바로 자발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인간 사회가 그나마 지탱이 될 수 있는 것은 강화된 법률의 강제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자발적인 도덕과 윤리가 서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통제하기 어려울 만큼 대단위 사회집단으로 구성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도덕과 윤리는 단순히 계도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  그래서 교육이라는 효과적인 방법을 통해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고 실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도덕과 윤리는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교육된다.  사회구성의 최소단위인 가정을 비롯하여 학교 그리고 갖가지 형태의 사회교육기관 등에서 끊임없이 도덕과 윤리를 강조한다.  도덕과 윤리는 법률에 우선하는 사회적인 규범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공동체의 사회생활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하나의 규칙이고 질서인 것이다.  도덕은 ‘사회생활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행해야하는 이법과 실천적 행위’를 의미하며, 윤리는 ‘사회생활과 관련해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도덕과 윤리가 무너지면 사회가 지탱될 수 없다.  이상적인 사회는 법률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도덕과 윤리가 살아있는 사회를 의미한다. 

  그런데 도덕과 윤리는 자발성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 제도적인 교육보다는 그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층의 모범적인 활동이 훨씬 더 교육적인 효과를 낳는다.  어쩌면 인간은 언제나 모범의 제시, 즉 사회적인 지도층의 실제적인 언행을 통해 보다 더 인간다워지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도덕이나 윤리는 그것이 무의식적이고 습관적이 될 때 더 큰 성과를 나타낸다고도 할 수 있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이러한 도덕 및 윤리의식이 점차 미약해지고 있다.  세상이 복잡해짐으로써 인간사회의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까닭이다.  내 것에 대한 소유개념이 커지면서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이기주의는 더불어 사는 정신이 아니라 나 혼자만의 이익을 챙기려는 독단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기주의에는 사회성이 결여되기 마련이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감을 상실하는 데서 이기심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미술계에서도 집단이기주의가 발호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개인적인 영달에 급급한 이기주의는 이미 보편화된 일이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불공정한 게임도 마다하지 않는 형편이다.  내가 유명해지고 작품을 팔기 위해서는 스승이고 선배고 동료고 안중에도 없다.  그래서 오늘의 미술계는 점잖게 말해서 적자생존, 나쁘게 말해서 약육강식의 논리만이 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미술계에서 도덕과 윤리는 땅에 떨어진지 오래다.    제자는 스승의 자리를 훔치기에 여념이 없고 스승과 선배는 기득권을 지키는데 급급하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생명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서구적인 무한경쟁의 가치관의 도입과 무관하지 않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과 끝없는 양보는 물론이요, 선배에 대한 깍듯한 예우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놓은 불공정한 게임의 규칙이 아니다.  더불어 때가 되면 스승과 선배가 제자 및 후배에게 자신들이 닦아놓은 길을 열어주는 것은 비굴한 양보가 아니다.  그것은 동양적인 도덕관 및 윤리관에 바탕을 둔 사회적인 아름다운 미풍양속이었다.  즉, 동양사회를 지탱하는데 필요한 힘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술계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을 보면 도덕과 윤리에 바탕을 둔 미풍양속은 간데 없다.  그저 세력다툼이나 아니면 개인적인 영달에만 급급한 모습이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잘못을 준엄하게 꾸짖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참다운 스승이 없는데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어느 사회에서나 잘잘못을 가릴 수 있는 위치에는 스승 또는 지도자가 자리하고 있다.  그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층 중에서도 직접적인 교육을 담당하는 선생의 역할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다.  선생은 단순히 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 전체의 모범적인 인물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기에 사표는 그 사회 전체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규범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선생은 중요한 위치에 있다.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대로 그 사회의 모범이 되는 것이다.  다음 세대의 올바른 성장, 올바른 시민을 만드는 데 전권을 부여받은 선생이야말로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선생, 참다운 스승이 미술계를 떠난 지 오래 되었다.  우리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스승은 한국미술계에서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사도가 땅에 떨어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 이유중의 하나는 특정 학교간의 세력다툼에서 비롯된 이른 바 ‘내 새끼 살리기’라는 비문명적이고 비인간적인 행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는 해방 이후 유일한 작가 등용문 역할을 했는데, 어느 때인가부터 일부 대학을 중심으로 출신학교별 입상자 숫자를 놓고 경쟁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처음에는 선의의 경쟁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경쟁의 내용이 변질되기 시작했다.  입상자 숫자에 따라 학교간의 우열이 결정되고 그에 따라 교수의 실력이 평가되는 듯한 이상한 풍조가 생긴 것이다.  그러다 보니 차츰 과열경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아울러 일부 대학교수들은 자교 출신들을 입상시키기 위해 온갖 인맥을 동원 심사위원이 되려고 로비를 했다.  실제로 학교별로 심사위원이 몇 명이 되느냐에 따라 입상자 및 수상자의 숫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국전 이후 반민전 형태로 바뀐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이렇게 되자 각 미술대학에서는 미술대전 입선 및 수상자 숫자에 의해 교수의 능력이 평가되는 듯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분위기는 교수들로 하여금 정실심사를 하게끔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선생은 참다운 교육을 위한 명분을 잃게 된 것이다.  이성적 판단과 객관성을 상실한 선생이 사회적인 흠모의 대상이 될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단 미술대전 뿐만이 아니다.  각종 민전에서도 이러한 정실심사가 거의 대동소이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러한 일들이 계속되면서 선생은 존경받는 위치에서 내려서는 입장이 되었다.  스스로 불공정한 게임을 자행한 결과이다.  사표가 땅에 떨어진 마당에 학생과 제자 후배들이 선생과 선배의 언행을 가볍게 여기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본받을만한 일이 없게 되었으니 존경심을 가질 리가 없다.  윗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없으면 장유유서 따위의 전통적인 윤리적인 가치는 무시되기 마련이다.  도덕과 윤리가 붕괴됨으로써 불공정한 게임에 대해서도 하등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경쟁의 원리로 받아들이고자 할 따름이다.  이로 인해 동양의 전통적인 가치관으로 자리잡았던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의 위계질서가 붕괴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기회포착에 민감하고, 술수에 능하며, 인맥과 자금을 동원한 로비에 능숙한 사람들이 화단활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세태가 된 것이다.

  스승이란 단순히 기술이나 지식만을 가르치는 존재가 아니다.  기술이나 지식에 앞서 인간다운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인격의 완성을 중시하는 것이 참다운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승이란 자신이 갈고 닦은 지식과 인격을 다음세대를 이끌어갈 제자들에게 남김없이 쏟아 부어주는데 그 존재가치가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제자는 오직 배운다는 차원에서 스승의 단 피를 남김없이 빨아먹는데 전력투구하는 일종의 기생충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야말로 동물과 다른 가장 인간다운 모습일 것이다.  남부끄럽지 않은 떳떳한 자기희생이야말로 참다운 스승의 모습이다. 

  또한 스승은 자신의 그늘을 벗어나 제자가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그 길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미술계에서는 이상하게도 자신의 작품세계를 따르기를 강요하여 세 불리기에 여념이 없는 듯한 스승이 적지 않다.  자신의 예술관 및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후배 및 제자들이 자신을 추종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스승의 태도는 많은 제자들을 개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특정 이념으로 몰고 가는 왜곡현상을 낳기도 했다. 

  예술이란 도덕 및 윤리와 마찬가지로 자발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스승의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따르는 것은 올바른 예술가의 태도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제자는 궁극적으로 스승을 극복하는 순간 비로소 독립적인 작가로서 완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보다 우수한 분신을 기대하며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사랑하는 수놈 사마귀나, 산란을 끝으로 생을 마감하는 연어의 삶의 태도는 우리 인간을 숙연하게 만든다.  약속된 미래 앞에서는 두려울 것이 없다.  스승은 자신보다 나은 제자를 배출하는 것만으로 그 의무를 다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  자연의 법칙, 생명의 법칙을 거울로 삼을 일이다.  그런 순연한 태도를 지닌 참다운 스승이 그리운 세상이다. (신항섭)

                                                                

<"미술신문" 2000년 7월20일(제247호)>